나와 대산문화재단
대산문화재단 20주년 기념원고
대산문화재단 20주년 기념원고 / 대산문학상
대산문학상 전후
김연수 / 소설가
2005년 5월, 세 번째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펴낸 나는 그 해 8월 주한 독일대사관의 초청으로 독일 바이에른 주 밤베르크의 예술인 레지던스인 빌라 콘코르디아에 체류하게 됐다. 3개월 일정의 단기 방문작가였다. 한국에서는 나 혼자 가게 된 터라 마중 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국내선으로 환승해서 뉘른베르크까지 가서 지정된 숙소를 찾아 1박한 뒤, 다음날 아침 기차를 타고 밤베르크까지 갔다.
워낙 혼자서 잘 다니는 편이라 가는 내내 어려운 줄을 몰랐는데, 막상 빌라 콘코르디아의 육중한 나무문 앞에 서니, 그 잠긴 문을 두들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돌아서서 독일 관광이나 하다가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서로 알아가면서 경험하게 될 오해, 한국에 두고 온 일들과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등등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힘들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문을 두들겨 그 문을 열고야 말았다.
내가 그 문을 두들긴 이유는 단 하나, 내게는 써야할 소설이 있기 때문이었다. 두고 보면 그 소설은 그로부터 2년 뒤에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텐데, 배경이 독일인데다 조직과 연락이 끊어져 독일에 버려지는 대학생이 주인공이었다. 내 소설의 주인공이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작가라고 왜 피한단 말인가! 문을 두들기는 심정이 꼭 그랬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독일 생활은 예상보다 더 외로웠다. 전화는 물론이거니와 인터넷도 되지 않던 빌라 콘코르디아의 2층 방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는 소설 집필 외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도 일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선의 황금시대』라는 책을 번역했다. 사서라도 읽어야 할 참 좋은 책이긴 했는데, 독일까지 가서 관광은커녕 부처님과 선사의 말씀을 번역하려니 전생에 빚진 업이라도 갚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해 10월에 열린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는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청됐다. 그래서 선배 문인들이 많이 프랑크푸르트로 찾아왔다. 나도 밤베르크에 있다가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그때쯤 나는 매일 해질 무렵이면 리슬링 백포도주를 한 병씩 마시는 체류자가 돼 있었다. 혼자 마시는 술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고나 할까? 하긴 알지 못하면 어쩔 것이냐? 거기서는 나 혼자뿐이었는데.
그러니 선배들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내 눈에 선배들은 모두 나와 같이 술 마셔주려고 서울에서 온 위문단 같았다. 나는 도서전 내내 주빈국의 작가답게 한국문학의 세계화에는, 하지만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 채, 밤마다 음주에만 몰입했다. 매일 와인 1병씩 단련한 몸이니, 아니 매일 혼자 지내는 외로움에 단련된 마음이니 두려울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저녁, 술자리에 함께 앉은 윤대녕 선배가 나를 보더니 웃는 것이었다. 내가 외로워서 매일 와인을 1병씩 마셨느니 어쩌느니 떠들어대는 걸 보니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선배는 “지금 서울에선 김연수 씨 소설집 다들 좋다고 난리던데……”라고 덕담을 했다. 3개월 동안 마신 술이 다 깨는 것 같았다. 아니, 왜 그런 말씀을 이제야 하시는 건가요? 너무나 좋아서 또 술을 마실 수밖에. 이러나저러나 취기를 피할 길은 없었다.
술에 취해서 독일에서 3개월을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니 『나는 유령작가입니다』가 제13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면 다 뻥일 테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미 상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고 말하면 믿으시려나? 그러니까 윤대녕 선배에게서,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윤대녕 선배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이미. 가장 듣고 싶었을 때, 들었던 말. 지금 돌이켜보면 대산문학상이 내겐 꼭 그런 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