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20주년 기념원고 / 종합
격동의 20년을 헤치고
- 대산문화재단 창립 20주년에
유종호 / 평론가, 연세대학교 전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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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교보생명 창립자 대산 신용호 선생의 높은 뜻으로 설립된 대산문화재단이 이제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변화가 없거나 더디던 옛날에도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다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다. 그러나 요동치는 격동기인 20세기의 마지막 10년에서 21세기의 첫 10년에 걸친 세월인 만큼 우리에게는 각별한 감회를 주는 20년이었다. 밖으로는 동구권의 붕괴로 말미암은 세계질서의 재편성이 전개되었고 안으로는 금융위기를 거치며 여야의 정권교체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20세기 말의 금융위기를 극복한 우리는 그 후 세계적 불황의 여파로 야기된 경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비교적 선전하고 있다는 대내외의 평가를 받고 있다. 정치적 경제적 격동기에는 상대적으로 문화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희박해지고 갖가지 문화실천에서도 침체와 정체가 빚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 동안 축적된 문화적 역량과 특히 젊은 세대의 유연성 있는 창의력이 결합하여 우리의 문화 동력은 위축됨이 없이 지속적인 성장과 대외진출에서의 휘황한 진전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대세에 대산문화재단이 음으로 양으로 기여한 바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문화가 곧 국가경쟁력임을 의미하는 시대적 흐름에 기여하기 위해 출발한 대산문화재단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대산문학상, 대산창작기금, 한국문학번역지원, 외국문학번역지원, 해외 한국문학 연구지원, 국제문학교류, 대산청소년문학상, 전국청소년연극제 및 각종 기회사업을 통해 당초 목적한 한국문학 진흥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괄목할만한 기여를 하였다. 첫 10년 동안 소기의 목적을 기대치 이상으로 달성한 뒤에는 자신감을 가지고 2002년에 비전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0년 내에 세계에서 문학을 지원하는 가장 신망 받는 문화재단이 되는 것을 지향하련다는 포부는 사실상 성취된 것이라는 것이 관찰자의 결론이다. 세계에 문화재단은 수다하고 다양하지만 대산문화재단 같이 문학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문학을 원조하는 곳은 과문한 탓인지 들어 보지 못했다. 문학상에 공을 들이는 곳이 있고 문학인의 지원이나 간행물을 지원하는 사례는 있지만 대산문화재단처럼 다양한 사업을 동시적으로 실천하는 경우는 없다. 전체주의 혹은 권위주의 국가에서 정부가 이러한 사업을 담당하는 경우는 흔히 있었다. 그러나 순수 민간재단이 규모 큰 후원업무를 지속적으로 어김없이 담당하고 있는 예는 달리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20세기 한국문학의 육성 및 후원자 기능을 담당한 것은 사실 언론 그것도 신문잡지사였다. 20세기 전반기의 주요 문학유산이 되어있는 장편소설은 대개 신문연재소설이었다. 또 전 세계에 유례없는 신춘문예 현상 제도를 실시하여 신인을 배출하고 또 문학의 대중화에 획기적으로 기여하였다. 일간지 신문지면에 시를 게재하여 시 독자의 저변확대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 신문사에서 간행하는 자매 월간지에 지면을 개방하여 많은 단편과 시를 실었고 이 중에는 현대문학의 고전 반열에 오른 작품이 적지 않다. 신문과 함께 단명으로 끝난 많은 문학지가 현대문학 생산과 소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물질적 토대의 취약성은 문학의 건전하고 합당한 발전에 늘 장애요소가 되었다. 문학 영위와 빈곤의 상관관계는 너무나 현저하여 많은 문인들이 가난과 병고와 요절로 그들의 삶을 마감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문인들의 고유 불행이 아니라 식민지 주민들의 공통적 운명이었지만 기록에 생생히 남아있어 돋보이는 것이다.
이런 빈한하고 불행했던 과거지사를 새삼 회고하는 것은 비교와 대조를 통해서 대산문화재단의 창달과 후원 20년이 얼마나 큰 규모이며 획기적인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가령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김유정이 운명하기 열하루 전에 친구인 안회남에게 썼다는 편지는 비통 그 자체이다. 돈 백 원을 마련해서 닭과 구렁이를 고아먹으려 하니 번역할 탐정소설을 알려주고 번역을 주선해주면 좋겠다고 쓴 편지는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만약 그 당시에 웬만한 문화재단이 있었다면 김유정이 이런 편지도 쓰지 않았을 터이고 그리 이른 나이에 요절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란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참고로 다시 떠올려본다면 지난 20년간 시, 소설, 희곡, 평론, 아동문학 부문에서 약 2백20명의 젊은 문인들이 창작기금을 지원받았고 총액은 약 22억 원에 이른다. 문학인 창작지원의 규모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짐작케 하는데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물질적 토대의 견고함을 말해주면서 지원에 상응하는 문학적 응답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긍지를 느끼게 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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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의 창달 사업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대산문학상이다. 관련자도 다수이고 또 시상식 참석자도 다수인만큼 당연지사이긴 하지만 알려진 만큼 그 의의도 크다. 우리 사이엔 문학상이 과다해서 그 의미가 희석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고 그 말이 일말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괄처리로 다룰 사안이 아니다. 개개 사례 별로 검토해 보아야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제 20년의 역사를 자랑하게 된 대산문학상은 특정 장르에 치우치지 않고 시, 소설, 희곡, 평론, 번역 등 우리 문학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특색이 있다. 이것은 영리를 초월한 문화재단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독자가 많은 장르에 비중을 둔 시상 제도가 결과적으로는 그 분야의 판촉행위의 일환으로 운영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문학외적 고려 없이 독자의 다과에 구애받지 않고 두루 시상하는 것은 소수파 장르에 대한 창달과 격려 의지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는 이미 정평을 얻고 있기 때문에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우리 문학의 외국어 번역에 주는 번역상은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지원 사업과 함께 특히 그 의미가 깊다.
편의상 우리 문학의 세계화란 말을 쓰지만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외국 독자의 다수획득을 통한 우리 문학의 수용 수요를 늘리고 이를 계기로 해서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주요 현대어로 우리 문학을 번역하고 독자를 늘리는 수밖에 없다. 이 때 주요 언어 원어민의 적극적 번역 사업 참여가 필요해진다. 일본문학이 유럽과 미국을 위시해 세계 각국에서 널리 수용된 데에는 사실상 사이덴스티커나 도날드 킨 같은 우수한 영어 원어민의 번역이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다. 물론 일본의 경제대국 부상과 다도(茶道)를 위시한 선불교, 하이쿠, 일본 영화 등 일본 문화의 오래된 서구 수용이 그 배경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몇몇 우수한 번역자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지대하였다. 이들은 단순 번역자가 아니라 서구 문학에 대한 높은 감식안을 가진 문학애호가였고 일본 문화의 깊은 심취자로서 탁월한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의 문학 비평을 많이 읽지 못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일인이 쓴 반(半)문학외적인 시인론이나 작가론보다 사이덴스티커나 도날드 킨이 쓴 일본문학 비평이 훨씬 보편적인 언어로 씌어져 이해하기도 공명하기도 쉬웠다. 이러한 탁월한 원어민 번역자가 갑자기 홍길동처럼 나타날 수는 없다. 많은 문화적 유인이 필요한데 우리 문학 번역에 대한 격려와 현창을 통해서 이들을 육성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문학 번역지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대산문화재단이 이 점에 착목한 것은 시의적적한 처사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20년의 사업 결과를 재점검해서 축적된 경험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수다한 언어로 번역하는 양적 확대와 세분화보다 주요 언어를 중심으로 작가와 작품을 집중적으로 번역해서 효과를 도모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번역된 작품의 현지 반응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대산문학상 역대 수상자 장서표를 남궁산 판화가에게 위촉하여 제작하고 “장서표로 읽는 대산문학상 20년” 전시회를 마련한 것도 이색적이면서 운치 있는 사업의 하나였다. 책의 제작과 출판이 용이해지면서 책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전통적 관행이 쇠퇴해가고 있다. 장서표는 비록 소소한 개인 용품이긴 하나 유서 깊은 옛 전통을 이어간다는 면에서 예비 문화재 품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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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해외의 한국문학 연구에 대한 지원, 외국문학 번역지원도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해외에서의 한국문학 연구는 외국에서의 한국문학 수용에도 중요하지만 우리 쪽에서 배려가 없는 한 외국에서의 자발적 연구는 당장 기대하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언젠가는 풍성한 과실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 구미 여러 나라에서 일본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또 그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는데 거기에는 저팬파운데이션(Japan Foundation)의 역할도 컸다. 막대한 재원을 투자했고 지금은 그 결과를 수확하고 있다. 일본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일어를 능숙하게 하는 미국 혹은 유럽인들이 많은데 이들 상당수가 일본기금의 수혜자들이다. 우리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이다.
국제문학교류 사업도 그 연장선상에서 매우 뜻있는 일이다. 우리 문인들과 외국 문인 및 독자들의 현지 접촉을 통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측면 말고도 우리 문학 애호자를 외국인 사이에서 배출하는 좋은 기회로도 작동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문학경험은 독서를 통한 간접경험에 머무는 경우가 많지만 가끔은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서 직접적인 것이 되고 또 그것이 지속적인 관심사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외국문학 번역지원도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여러 상업출판사들이 외국문학 번역과 출판을 현재 경쟁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독자가 많은 작품에 편중되어 중복출판 현상이 허다하다. 대산에서는 문학성은 탁월하지만 독자의 획득이 난망한 과거 혹은 현대의 고전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구하기 힘든 많은 고전을 일반 독자에게 접근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외국문학 연구자에게도 격려와 자극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이중적이다. 읽을 만한 문학 고전에 관한 한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 없다는 말이 미구에 나오게 될 것이다. 외국문학 연구자의 인적 자원이 상대적으로 풍부하기 때문에 이 사업은 앞으로도 번역문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이 세상 모든 일이 공들이기 나름인데 상업출판사의 경우처럼 시간에 쫓기지 않고 공들일 수 있기 때문에 원문 충실과 가독성 측면에서 양질의 번역이 나오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기획사업 중에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도 의미 깊은 것이다. 2001년도에 김동환, 박종화, 박영희, 심훈, 이상화 등의 작가를 재조명한 것을 기점으로 해서 해마다 많은 문인들에 대한 비평적, 문학사적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반 독자에겐 잊혀지고 소수 연구자에게만 기억되고 있는 작가들에 대한 다시 읽기를 시도하는 것은 결국 문학적, 사회적 기억의 회복을 도모하는 것으로서 우리 문학의 유산을 재음미하고 동시에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어주고 있다. 여기에는 저명 문인과 함께 일반 독자에겐 지극히 생소한 문인까지 포함되어 있어 특히 문과 대학생을 위시한 문학 연구자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한국현대문학 50년>, <21세기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을 위시한 각종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우리 문학에 대한 비평적, 문학사적 조명을 시도한 것은 문단과 학계에 공히 신선한 충격을 주고 젊은 문학도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다양한 기획사업 가운데서도 특히 인상 깊고 개인적으로 배운 바가 많은 것은 <서울국제문학포럼>이다. 2000년에 「경계를 넘어 글쓰기 - 다문화 세계 속에서의 문학」이란 주제로 제1회 포럼을 연 이후 5년마다 이어지고 있다. 오랜 숙고 끝에 결정된 주제의 적정성도 눈길을 끌었지만 노벨상 수상 작가를 포함한 19명의 외국의 중진 문인들을 초청하는 일만 하더라도 장기간의 준비가 필요하였다. 또 한국에서 처음인 대규모의 국제 포럼인 만큼 실무진의 노고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장관보다도 주제 발표의 구체적 내용이 시의적절하고도 중량감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책으로 엮여져 나온 단행본을 보면 일목요연하다. 특히 프랑스의 사회학자로 당초 방한에 주저감을 나타냈다는 프랑스의 피에르 부르디외, 알바니아의 이스마일 카다레, 미국의 개리 스나이더, 일본의 가라타니 고진 등의 발표논문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2005년의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은 「평화를 위한 글쓰기」란 주제로 열렸고 해외에서 17명의 문인이 참가하였다. 오에 겐자부로, 르 클레지오, 모옌, 마거릿 드래블과 같은 작가, 볼프 비어만, 로버트 하스 등의 시인, 장 보드리야르와 같은 사회학자가 참여하였고 국내문인도 60여명이 참가한 대규모의 포럼이었다. 주제를 위시해 전체 포럼 구상을 맡았던 김우창 교수가 당시 발표된 발제논문을 엮은 논문집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다국가, 다문화, 다성적인 공론의 장이 된 포럼은 전쟁과 폭력의 체험에 대한 추억, 거기에서 겪게 되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증언, 평화의 미래를 향한 비원의 표현 등이 뜨거운 정열과 참여의지”를 보여준 현장이었다. 평화를 향한 열망, 또 글을 통한 이 열망의 보편화 등에서 일치를 본 문인들이 마지막 모임에서 “서울평화선언”을 발표한 것은 커다란 부수적 성과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이는데 주요한 역사적 문건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음을 제안하고 촉구한다.
1. 국제정치 도구로서의 전쟁 종식
2. 핵 확산 금지와 전 지구적 무장해제를 위한 노력
3.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더 많은 지원
4. 부당한 차별의 철폐와 모든 인간을 위한 평등한 권리와 혜택
5. 공평한 노동정책과 실천, 그리고 그것을 위한 국가 간의 상호 연대
6. 모든 소수 인종들에 대한 권리의 존중
7. 모든 지각 있는 존재들을 위한 환경의 보호와 보전
선언문에 해외 작가 17명과 국내 참가자 61명 등 모두 78명이 서명하였다. 이러한 선언문은 다국적 문인들이 평화의 이상에 대한 공통의 정열을 확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외국 문인 전원 그리고 참가 문인들 대부분이 판문점을 방문해서 분단의 실상을 다시 실감하기도 했다.
대규모 국제포럼인 만큼 국내의 모든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포럼을 보도했고 주요 발제 논문을 요약 보도하기도 했다. 역시 2차 포럼도 성공리에 끝마친 것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아쉽게 생각한 면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언론보도가 이른바 해외 유명 문인의 발표에 편중하여 중요 논문이 국내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가령 헝가리 출신의 언론인이자 작가인 티보 머레이는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협정 조인식을 지켜보았고 시인 설정식이 북에서 숙청되었다는 것을 서방 세계에 알린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글과 인물이 응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또 볼프 비어만은 17세에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해서 시인으로 활동하다가 동독 집권당을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41세 때 추방당한 반체제 “시인가수”이다. 「가기 어려운 길」이란 발표문은 당시 발표문 중에서 필자에게 가장 깊은 감동과 곤혹감을 안겨준 글이었다. 특이하고 절박한 경험과 충고의 글이 우리 언론에서 완전히 묵살되는 것을 보고 착잡한 감정을 금할 수 없었다. 판문점에서 돌아오는 길 파주출판단지에서 우연히 같은 탁자에 앉았던 필자는 그와 대화를 나눌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대본이 되어있는 스필만의 『피아니스트』 영역본에 피아니스트를 구명해준 독일군 대위 호젠펠트의 감동적인 얘기를 에필로그로 적은 이가 바로 그 볼프 비어만이라는 것을 까맣게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것을 알고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사사로운 일이지만 그것은 국제포럼에 연결된 나의 안타까운 기억이기도 하다.
2011년의 제3회 포럼은 「세계화 속의 삶과 글쓰기」를 주제로 열려 더욱 세련된 조직과 운영으로 성공리에 마친 것은 가까운 일이어서 더욱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가도 가도 붉은 산이던 젊은 날의 우리 산하가 이제 완벽한 청산으로 변한 사실에서 뿌듯함과 함께 긍지를 느끼게 되듯이 대산문화재단 20년을 돌아보며 비슷한 뿌듯함과 긍지를 느꼈다. 김소월에서 김유정에 이르는 작고문인들이 붉은 산과 중첩되어 떠오르기 때문이다. 불과 30년의 시간차로 태어나서 붉은 산이 사라진 산하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세대의 행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