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대산문화재단
대산문화재단 10주년 기념원고
대산문화재단 10주년 기념원고 /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세계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은행나무
최미경 / 번역가,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 제7회 대산문학상 수상
벌써 대산문화재단 창립 10주년이라는 말에 진심어린 축하인사와 더불어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1995년도 한국문학작품 불어번역 지원자로 선정이 되면서 시작된 대산문화재단과의 인연은 이후에 계속된 지원뿐만 아니라 『열녀춘향수절가』로 1999년 대산문학상 번역부문 수상과 재단이 개최한 여러 국제 문학교류 행사에서 동시통역을 맡음으로써 더욱 깊어졌다. 유학생의 신분으로 파리에 있을 때, 대산문화재단의 번역지원에 선정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던 어느 여름 아침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기량이 부족한 초보 번역사에게 과감히 지원을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파리까지 전화를 해주었던 것에 더욱 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또한 대산문학상을 수상하였을 때는 시상식이 끝난 며칠 뒤 시상식 장면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와 사진이 배달되었고, 그 테이프는 과분한 상금과 상패만큼이나 나를 감동시켰다. 민족문화 창달과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거시적이고 중요한 사업의 수행만큼이나 대산문화재단의 이런 세세한 배려와 인간적인 면모는 내게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다. 문화사업은 인간의 정신에 양식을 고양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1998년에 국가적 경제위기를 거치면서도 대산문화재단은 창작지원, 번역지원, 국제 문학교류, 청소년 문학상과 같은 기존 사업을 변함없이 시행하며 오히려 국내 문학 활성화를 위해서 외국문학 작품의 한국어 번역, <대산문화> 발행 등으로 사업을 심화, 확대하였다. 다른 재단이 사업을 축소, 폐지하던 시기에 대산문화재단은 여전히 젊은 문인들에게 창작지원을 하며, 문학상을 통해 국내의 우수작을 시상하고 외국어롤 번역하에 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밑거름 작업을 지속하였던 것이다.
한국문학의 외국어 번역은 대산문화재단이 한국문학 번역지원을 시작하기 이전까지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재는 한국문학번역원)이 유일한 지원기관이었다. 대산문화재단은 민간재단으로서 참신함과 패기를 가지고 한국문학 번역지원을 시도하여 많은 젊은 번역가군을 발굴하였고,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을 여러 언어로 집중 번역, 소개하는 등 일관성있는 번역, 출판정책을 시도하여 한국문학의 해외소개 사업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 심사위원 선정에 있어서도 역량있는 국내외 인력을 활용함으로써 합리적, 효율적 심사를 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미 세상이 많이 좋아진 시대에 태어난 젊은 내가 10년이라고 하는 세월의 감을 깊이 느낀 적이 있다. 함께 번역을 하는 외교관인 장-노엘 주테씨가 1991년 말 주한 프랑스대사관에서의 임기를 마치고 본국에 돌아가면서 50cm도 채 안되는 은행나무 묘목 두 그루를 세관 몰래 가져다가 고향 리옹의 집에 심을 적이 있다.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주테씨는 한국의 많은 것들 중에도 특히 가을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은행나무를 좋아하는데, 프랑스에서는 은행나무가 국립공원에나 몇 그루 있는 아주 희귀한 나무에 속한다. 그 은행나무들은 그에게는 마음 속의 한국이었다. 나는 해마다 은행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2001년 늦은 가을 리옹에 간 나는 프랑스 혁명시대에 지어진 고풍스런 집을 지키고 있는 눈부신 황금색의 늘씬한 나무들을 보게 되었다. 은행나무는 장신인 주테씨 키의 두 배도 넘어, 가까이에서 사진을 찍으면 한 프레임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훌쩍 커 버렸다. 페트병에 담겨 한국을 떠나던 모습을 본 나로서는 이 나무들의 성장한 모습에서 대견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10년이란 시간은 어린 나무를 제법 나무의 위용을 갖춘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문득 대산문화재단의 10년이 바로 그러했다고 느낀다. 재단의 노력은 해외에서의 한국문화와 문학의 인정으로 차츰 드러나고 있다. 한국 토종의 은행나무가 이국 만리 땅에서 외국인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로 앞으로 1천수를 누릴 채비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고생대에 고사리와 함께 화석화되었던 은행나무는 인류 역사의 산 증인으로 장수하여 주변의 우람한 플라타너스보다 더 오랫동안 고가를 지킬 것이다.
월드컵에서의 눈부신 선전, 한국영화의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 안시영화제 대상 수상 등이 최근 한국 문화가 우선적으로 얻어낸, 드러낸 노력의 결실이라면, 이제 문학에서도 한국문학이 마땅히 인정을 받을 날이 올 것이라고 본다.
한국문학 번역작품들이 해외의 서점에 조금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은행나무처럼 성실하게 비바람을 물리치고 자라다보면 그 아름다움은 눈에 띄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어떤 지원도 필요없이 한국문학이 해외에서 필독서가 되어 재단이 사업목표를 변경해야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날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 재단의 헌신적인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이사장님을 비롯해 직원들에게서 나오는 그 인간적인 아름다움 역시 지속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