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10주년 기념원고 / 대산창작기금
작가를 작가이게 하는 것
한창훈 / 소설가, 1997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난 전업작가다. 글 쓰는 것 외엔 돈벌이가 없다는 소리다(올해부터 문창과에 수업을 나가고 있으니 이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방학이면 실업자 신세인데다가 대학 강사 보수라는 게, 내가 나가는 학교가 가장 낫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말씀이 아니다. 그러니 강사보다는 전업 작가에 훨씬 가깝다). 97년 후반부터 본격적인 전업작가 노릇을 했다.
그 전에는 여러 현장에 일 하러 다니고 글짓기 강사 노릇을 했었다. 돈버는 일이라는 게, 특히 몸 써서 벌어먹고 산다는 게 늘 고단하기 마련이라 중고 컴퓨터 앞에 앉아 출퇴근할 필요도 없이 집에서 일을 한다면 언뜻 봐서는 아주 늘어진 팔자로 보인다. 초기에는 나도 그랬다. 소설 창작에 한번 매진해보려고 전업을 선택했는데 한동안이야 어디 일하러 가지 않아서 느긋했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나의 직업을 <백수> 대신 <작가>로 불러 주니 (첫 소설집이 나온 다음에 시작됐다) 못할 바도 아니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전업작가 이거, 보통 난감하고 곤란한 작업이 아니다. 물론 벌이 때문이다.
어떤 해는 일곱 편인가를 발표했다. 상당한 양이다. 두 달에 한 편이면 할 만하겠구나 싶겠지만 천만의 말씀. 보통 한 편 쓰는 데 한 달 정도 걸리는데 (물론 쓰는 시간만 따지면 며칠 되지 않는다) 보통 에너지가 들어가는 게 아니다. 채권자가 고용한 흥신소 직원에게 쫓기는 채무자 신세가 딱 그것이다.
여담으로, 당시 작가회의 행사에 가면 선생님들이 나를 보시고 다들 “좋은 소설 쓰겠어”라고 하셨다. 나한테서 혹시 별다른 능력을 발견하셨나 싶어 바라보면 “덩치가 좋으니까. 힘없으면 글 못쓰지”가 답이었다.
그래, 덩치 좋은 나도 두 달에 한 편은 버겁다. 문제는 역시 돈이다. 일년에 여섯 편을 발표했다 하더라도 (이 정도 발표하면 작가 인생에서 가장 혈기왕성할 때다) 편당 오십만원의 원고료를 받으면 월 이십오만원. 한달에 잡문이라고 통칭되는 짧은 산문 청탁이 한 편씩 들어온다고 하면 그게 평균 십만원. 삼십오만 원으로는 자동차 할부와 이런 저런 잡비로도 빠듯하다. 책이 잘 팔린다면 (사실 이게 중요한데) 달라지지만 대중적인 인기가 드문 편에서는 참으로 요원한 이야기다. 대산창작기금에 대한 이야기를 그 즈음에 들었다. 풀리지 않은 숙제를 며칠간 안고 끙끙대다가 간신히 실마리를 찾은 그런 기분이었다. 나는 돈이 필요했고 하여 창작기금을 신청했다. 그리고 받았다.
천만 원은 아주 큰 돈이었다. 빚을 갚았고 그리고 동생들에게 처음으로 용돈을 줄 수 있었다. 자그마한 오디오를 샀다. 한 열흘 내리 음악만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아주 흐뭇했고 창작에 매달릴 수 있었다. 그런 것이다. 작가는 자존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작가라면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를 한다. 당시 내 자존심은 대산문화재단의 창작기금이 살려주었다.
대산창작기금을 희망하는 신인 작가들이 많다. 그들이 대산창작기금 받기를 희망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사실 내가 권하고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도 회사 이익과 연관된 요구가 없다는 것이다. 큰 미덕이다. 창작기금 신청했던 원고로 『가던 새 본다』라는 소설집을 냈었는데 재단에서 나에게 요구했던 것은 증거물로서의 증정본 20권이 다였다. 그리고 내가 뽑혔었다고 해서 하는 말은 아닌데 (아니, 내가 뽑혔다는 것은 좋은 증거가 된다. 나는 학연, 지연도 없는 상태였으니까) 심사가 공정하다는 것이다(물론 오해가 없으시기를. 다른 곳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니까).
문화적인 인프라 구축은 이렇게 해서 나온다.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다못해 별 부담 없이 대포 한 잔 살 수 있도록, 냄새나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 작가를 작가이게 하는 것. 나는 대산창작기금에서 그것을 느꼈다. 이왕이면 더 많은 작가들에게 지원금을 주었으면 하는 내 바람이 무리라는 것을 안다. 대산 같은 곳이 더 있었으면 할 뿐이다. 고독한 대산의 발전을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