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10주년 기념원고 / 대산문학상
나와 대산문학상
이승우 / 소설가, 조선대 교수,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
그 때 나는 테니스장에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떨어져 내리는 체력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집 앞 테니스장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 몇 달 전이었다. 몸을 가지고 하는 일체의 일을 자신 없어 하던 내게 집 앞의 테니스장은 아주 멀었다. 그 앞을 지나다니며 공 치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곤 했다. 한 반 달쯤 그랬던 것 같다. 1993년. 소설만 쓰며 살기로 작정한 서른다섯 살의 전업 작가는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주제의 식에 붙들린 글을 읽고 쓰고 사고하던 80년대 작가에게 90년대는 소통이 불가능한 젊고 변덕스럽고 새로운 주인처럼 찾아왔다. 아비는 완고했지만 친근했다. 그 아비가 사라지고 난 뒤 그 뒤를 이은 아들은 아비와는 사뭇 다른 일을 요구했다. 과거의 주인에게 길들여진 80년대 작가들은 대체로 당황했고, 적응을 잘하지 못 했다. 자주 주인과 다퉜고, 거의 일을 하지 못했고, 일을 하더라도 실적을 내지 못했다. 더러 그 집을 떠나 다른 일터로 옮겨가기도 했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주인과 다투고 일을 하지 못하고, 실적을 내지 못했다. 그 집을 떠나 다른 일터로 옮겨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에게는 옮겨갈 다른 일자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 집에서 먹고 살아야 했다. 주인 눈에 들게 일을 하든지, 주인 눈을 내 일에 맞추든지 해야 했다. 비장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을 튼튼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아마 그런 비장함의 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공을 치고 있는 테니스장으로 아내가 찾아왔다. 대산문화재단에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급한 일이라고 했고, 전화를 해 보라고 했다. 대산문화재단이 문학상을 제정하고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상금을 준다는 말을 신문 보도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내가 그 상을 받게 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못했다. 우선은 내 자신에 대한 불신 때문이고(나는 내가 그런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다음으로는 문학상 수상자가 결정되는 과정에 대한 의혹 때문이었다(나는 그런 상이 나에게 주어질 거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문단에 얼굴을 내민 후 문학상이라는 걸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흔히 이런저런 문학상의 후보로 거론되기는 했다. 그러나 상은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신문 기자가 나를 소개하면서 ‘최다 문학상 후보자’라고 한 적이 있었다. 후보에는 언제나 끼는데 결정적으로 상을 받지는 못하는 작가라는 뜻이었겠다. 마치 최종심에는 단골로 오르면서도 당선에는 이르지 못하는 작가 지망생과 같은 꼴이 아닌가. 무난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는 뜻이겠지. 그런 생각은 어쩔 수 없이 쓸쓸한 감상에 빠져들게 했다. 그러나 쓸쓸한 것은 괜찮았다. 문제는 무력증이었다. 나는 의욕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저 포도는 시다!’라는 식의 방어 기제로 무장해야 했다. 나는 내 무장이 타인들에게 초연함으로 보이기를 희망했다. 오해인지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희망대로 된 것도 같았다. 아니면 사람들에게 내가 속아 넘어간 것일까.
집으로 와서 대산문화재단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한 재단의 직원은 제1회 대산문학상의 소설부문 수상자로 결정된 이승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수상 소식을 전하면서도 시부문의 고은 선생, 평론부문의 백낙청 선생과 함께 대산문학상의 1회 수상자로 결정된 서른 다섯 살의 무명 소설가가 도무지 미덥지 않다는 누치를 숨기지 않았다. 나 역시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수상 소식을 전달받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한 해 전에, 기억의 가장 안쪽에 웅크리고 있던 시간들을 끄집어내어 힘들게 만든 『생의 이면』이 수상작이었다. 소식을 듣고 내가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크게 기뻐하거나 흥분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저 포도는 시다, 식의 초연을 위장한 자기 최면이 아마도 효과를 발휘한 덕택이었을 것이다.
대산문화재단과 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생의 이면』은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그 곳에서 제법 좋은 반응을 얻었다. 덕택에 프랑스를 방문할 기회도 생겼다.
대산문화재단은 상을 줌으로써 내 지지부진한 창작 행위를 격려했다. 그리고 낯설고 새로운 주인 아래서의 내 소설에 대해서도 일정한 방향을 암시해 주었다. 그것은 낯선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자신 있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고, 그럼으로써 변덕스럽고 낯선 90년대를 넘어갈 수 있었다. 주인은 나를 그다지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치지도 않았다.
대산문학상은 올해 10회째를 맞는다. 그 상을 받은 지 10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 어떤 문학상도 받지 못했다. 무난하기는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는 초연을 가장하지 않고도, ‘저 포도, 시다’고 말할 줄 알게 되었다. 10년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 시간은 무서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