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대산문화재단
대산문화재단 10주년 기념원고
대산문화재단 10주년 기념원고 /
기업과 재단
유재천 / 전 상지대 총장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카네기재단이나 록펠러재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나와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도 없으면서 왠지 친근감마저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얼마나 돈이 많기에 그렇게 훌륭한 일들을 할까 싶어 부럽기만 했다. 선망의 대상이었다.
카네기나 록펠러가 기업에서 얻은 이익을 사회에 환원시킨 모범으로 지구촌의 한 구석 작은 나라의 젊은이에게까지 각인되기에 이른 까닭을 깨닫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기업이 돈만 많다고 해서 모두 그런 재단을 만들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확인하게 된 것도 우리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기업이 그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재단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다. 더욱이 서양과는 달리 재산의 사유개념이 강하고 유산을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관습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돈보다는 공익재단 설립자의 뜻이 더 중요하다. 우리 사회의 경우 재단까지는 못 되지만 개인이 얼마 안 되는 사재를 털어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경우가 그 같은 본보기일 것이다.
기업이 공익재단을 설립하는 동기는 다양하다. 가장 순수한 동기는 이해타산과 무관하게 무엇인가 사회를 위해 헌신하려는 뜻에서 재단을 설립하는 경우일 것이다. 이같은 동기는 말할 것도 없이 재단 설립자의 갸륵한 뜻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설립된 재단은 사회에 생색을 내거나 자신들이 하는 일을 소문내려 하지 않고 차분하게 사업에 열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도 재단 설립의 동기 가운데서 가장 흔한 것이 기업의 이미지 관리를 위한 목적이 아닐까 생각된다. 현대사회에서 기업은 이윤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라는 여론의 압력을 끊임없이 받는다. 기업의 이윤은 사회로부터 얻은 것이므로 그 일부를 다시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면서 기업의 이미지를 제고하려는 경영적 노력이 재단 설립의 동기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 재단 설립은 하나의 투자라는 경영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기업에 대한 호의적인 이미지가 형성되고 그로 인해 기업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재단 설립은 기업의 PR전략의 하나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도로 설립된 재단의 사업은 대체로 모기업의 사업영역과 연계되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생명보험회사가 설립한 재단이 소년소녀가장 돕기 운동을 전개하는 사례가 그러하다.
이같은 PR동기보다 더 직접적으로 기업경영과 연관시켜 재단을 설립하는 사례도 있다. 많지는 않지만 이런 동기로 기업이 재단을 설립하는 예로서 모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을 양성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동기는 세금감면 등 세제의 혜택을 겨냥한 재단설립일 것이다. 이러한 동기로 재단을 설립한 기업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 쉽다. 기업 임원들의 승용차를 재단 소속으로 해 놓는 등의 비리가 한때 사회의 지탄을 받았던 사례가 그러하다. 그런 일들 때문에 기업의 재단설립이 합법을 가장한 제산도피가 아닌가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현존하는 우리 기업이 설립한 재단 가운데 그런 동기가 작용한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세제혜택이나 재산도피의 동기를 제외하고는 어떤 동기로 기업이 재단을 설립했는지와는 상관없이 기업이 공익재단을 설립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임에 틀림없다. 공공의 영역에서 국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민간기업이 떠맡는다는 것은 상호보완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기업과 공공영역의 상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기업이 설립한 공익재단은 국가가 개입할 수 없는 민간영역의 필요와 사회의 이익을 충족시켜 준다. 그러므로 기업의 재단 설립은 그 자체가 공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기업이 설립한 재단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공익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사적 영역인 기업이 공공영역과 연계됨으로써 기업은 사회적 책무를 성실하게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대산문화재단이 창립 10주년을 맞게 되었다. 연륜으로만 보면 아직 어린 재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산문화재단은 설립동기나 그 동안 시행해 온 사업의 질과 양으로 볼 때 창립 10주년이 된 재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업적을 남겼다. 역사가 오랜 재단 못지 않게 한국의 유수한 공익재단으로 자리잡았다. 이같은 평가는 창립 10주년에 걸맞게 준비한 입바른 찬사가 아니다. 인연이 있었는지 지난 몇 년 전부터 대산문화재단이 지원하는 한두 가지 사업의 자문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그저 그런 재단의 하나이겠거니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 자문역할을 하면서 대산문화재단이 그저 교보생명이 설립한 평범한 재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먼저 재단의 설립동기가 특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재단을 설립한 교보생명의 창립자인 대산 신용호 선생께서는 문학을 인류의 가장 귀중한 문화자산으로 보고 이 땅에 올바른 문학정신을 구현하는 동시에 한국문학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한국 독자들로 하여금 세계의 문학을 향수케 함으로써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주류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겠다는 남다른 취지로 이 재단을 창설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설립취지를 알고 나서 매우 독특한 동기로 태어난 재단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립자의 취지가 그런 만큼 대산문화재단은 처음부터 순수한 동기로 이루어진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이 설립동기가 순수하고 설립목적이 뚜렷했기 때문에 10년이라는 짧은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유수한 공익재단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재단 설립의 목적이 분명했으므로 대산문화재단의 사업 또한 독자성과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기껏해야 문학상을 제정하는 정도로 한국문학에 자극을 주던 풍토에서 제일 큰 문학상을 수상하는 제도를 비롯해 한국문학 번역·출판지원, 외국문학 번역지원, 해외 한국문학 연구지원, 대산 청소년문학상 제정 등 한국문학 특화사업을 일관성 있게 수행함으로써 한국문학 진흥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단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그런 과정에서 재단의 사적 이해관계가 재단사업의 집행에 일절 개입하지 못하게 운영해 온 의지 또한 미덕이라 할 수 있다. 기업이 설립한 대부분의 재단이 기업의 이름을 붙여 재단의 명칭으로 삼음으로써 모기업의 PR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재단은 교보생명이 설립한 재단이라고 선뜻 연상되지 않는 명칭을 선택함으로써 마치 기업과 연계성이 없는 독립된 재단의 이미지를 갖도록 만든 점도 타기업이 설립한 재단과 차별적인 점이라 하겠다. 기업이 설립한 재단의 역할과 전형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대산문화재단의 운영관행은 하나의 전형이라 해도 지나친 칭찬이 아닐 것이다.
목적하는 사업이 무엇이든 기업이 설립한 재단이 지녀야 할 몇 가지 성격을 지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재단 설립의 동기가 순수해야 하며 오로지 공익을 위해 봉사하여야 한다.
둘째, 재단이 모기업을 위해 봉사해서는 안 된다. 모기업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동기는 간접적인 효과로 나타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재단의 운영에서 기업의 간여는 없어야 한다. 공익을 추구하는 만큼 사업의 집행절차부터 공정해야 옳다.
넷째, 사업영역의 전문성 유지 또는 특성화가 바람직할 것이다. 백화점식 나열은 사회에 대한 기여수준을 낮추게 된다.
끝으로 대산문화재단은 기업 메세나운동의 한 전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재단의 한국문학 지원은 무형의 자산, 즉 문화자본 축적을 위한 투자라고도 할 수 있다. 모기업인 교보생명이 메세나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도 대산문화재단의 그같은 업적을 높이 평가한 때문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