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향가 이래 한국의 문학사는 천년을 헤아린다. 그동안 인멸되고 엄격한 도덕주의로 하여 배제되어 사라진 것도 수월찮으리라. 천년의 역사치고는 작품의 양이 많지 않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반드시 처진다고만 할 수는 없다.
부동문학(current literature) 시대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문자문학, 즉 정착된 이른바 고정문학(fixed literature)의 시대에 들어선 이후로는 한국의 한국다운 전통을 그런대로 쌓아왔다고 할 수 있다.
고대에는 우선 향가와 고려가요 등의 서정문학을 들 수 있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작품의 수가 영세하기는 하나 서정시로서는 독특한 한국적인 성격을 갖춘 세련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서사문학은 훨씬 뒤에 나오고는 있으나 『춘향전』 『심청전』 『사씨남정기』 『홍길동전』 등 로망스는 유럽이나 중국 등지의 그것들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다. 스케일이 작고 길이가 장편이 아니라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봉건시대의 산물들로서는 신선함이 돋보인다. 로망스라는 장르가 작자미상의 경우가 허다한데 당대 일급의 선비(지식인)들이 서명을 하고 글을 쓰고 있다. 소설문학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는 증거다.
영정조(英正朝)에 오면 프랑스 상징주의에 앞서 한국에서는 시에 해체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엇시조, 사설시조가 그것이다. 시의 산문화현상이다.
이해조, 이인직의 신소설과 최남선, 이광수의 신체시는 간접적이기는 하나 서구 근대문학의 도입의 길을 연 하나의 시도다. 시도인만큼 유치하고 어수룩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뒤 백년을 거치는 동안 한국의 근현대문학은 이제 국제적인 수준에 오를 정도의 전개를 거듭해 왔다.
대산문화재단이 이러한 한국 근현대문학을 국제적인 마당에 내놓기 위하여 10년의 노고를 다해 왔다. 그 성과는 이제부터 서서히 드러나리라. 나는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 늘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못지 않게 앞으로의 기대 또한 크다.
2
대산의 문학 후원 10년,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신경림 / 시인
시장에만 맡겨 놓아서는 가장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 곧 문학이겠지요. 독자는 아무래도 달콤한 말에 약한 법이니까요. 문학을 도와주는 길은 오직 내버려 두는 것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권력이 경우이고, 아무래도 문학은 선의의 후원자를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선의의 후원자, 이 일을 해온 지 대산문화재단, 이미 10년이 되었군요. 그동안 많은 문학작품 찾아주었고, 키워주었고, 지켜주었습니다. 신인들에게 글을 쓸 힘을 불어넣어주었으며, 좋은 작품을 가려 세상에 알리기도 했고, 또 우리문학이 세계문학이 되게 하는 데도 큰 몫을 했습니다. 이점, 우리 문학사는 결코 대산문화재단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흔히 문학은 그것을 생산하는 측과 그것을 향유하는 측의 두 바퀴로 굴러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두 바퀴로만은 부족합니다. 또 하나의 바퀴, 아무런 간섭 없이 문학의 생산을 돕는 또 하나의 바퀴, 그것이 있을 때 문학은 제대로 굴러갑니다. 대산문화재단은 한국문학에 있어 바로 그 세 번째 바퀴 노릇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대산문화재단 출범 10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3
대산문화재단 창립 10주년을 기념하며
정현종 / 시인
우선 대산문화재단 창립 10주년을 축하한다.
대산문화재단은 한국문학을 꽃피우겠다는 취지를 갖고 출범하여 그동안 창작, 번역, 해외출판, 문학적 행사 등 여러가지로 지원을 해왔으니, 글 쓰는 사람의 하나로 느낌이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을 비롯해서 한 나라의 문화는 그 나라의 존재가치를 판단하는 제일 중요한(필경 유일한) 요소임을 생각한다면 기업이 문화를 후원하는 일은 실은 기업 자체가 더없는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할 필요가 있을까.
10월 초순 나는 덕수궁에 갈 일이 있어서 갔다가 마침 전통공예 기능인 작품전시회를 하고 있어서 들어가서 보았는데, 공예의 명인들이 만들어 놓은 보석함, 다완, 향로 등의 작품을 보면서, 너무 아름다워서, 이 나라에 살고 싶다는 느낌이 무슨 축복처럼 솟아나는 것이었다.
예컨대 너무 한심해서 말도 하기 싫은 한국 정치라든지 공공의식이 너무 없는 국민들의 행태 같은 것들을 보면서 이 나라에 미래가 있는가 의심하며 정이 떨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는데, 그런 예술작품을 만드는 장인(匠人)들이 있는 걸 보고는 여기도 살만한 곳이라고 느끼게 된 것이다.
모든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한 공동체의 얼굴이고 자존심이며 대내적으로는 그 사회를 지탱하는 영혼이요 생명력이며 그곳으로 이끄는 견인력이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뒤떨어졌다고 하는 남미 대륙에서만 보더라도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를 얼마나 드높이며, 옥타비오 파스는 멕시코를, 그리고 마르케스는 콜롬비아를 얼마나 드높이는가. 그들은 그들의 시와 소설과 에세이로 그렇게 했으며, 그런 작품들을 읽은 사람은 그들의 나라를 도무지 깔볼 수 없는 것이다.
대산문화재단이 하는 일은 그러므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영혼과 생명력과 자존심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니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재단의 일을 구상하고 결정하고 추진하는 데 참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한 상상력(융통성)과 공정성이 있는 실력 있는 사람들로 이어지기를 바랄 따름이다.
4
빈손으로 와서 일해 놓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박경리 / 소설가
해방 후, 수많은 지도자가 나타났다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왕과 같은 권력을 탐했지만 세종대왕을 꿈꾼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기는 시절이 하도 수상하여 인성에다 탈을 씌우지 않고는 생존이 힘든 지경이라 문화 따위는 허섭쓰레기 같은 것, 성역이 없는데 세종대왕인들 별 볼일 있겠습니까. 장땡이는 전략과 전술이지, 이상이나 사명감 같은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이런 세태에서 진정한 문화사업을 한다는 것은 외롭고 적막한 일이겠습니다.
중앙에서 멀어져 있는 처지여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산문화재단이 십년을 꾸준히 민족문화, 한국문학을 위하여 이바지해 온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물질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며 봉사정신과의 괴리가 심한 상황에 회의를 느낀 것도 한두번이겠습니까. 채산이 맞지 않아 포기하고 재원이 바닥나서 손 털고, 뜻은 세웠으나 절망적 현실에 꺾이고, 그렇게 주저앉는 문화사업체가 부지기수인데 십년 세월을 꾸준히 이어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아까는 별 볼일 없다 하고 무례한 말을 했습니다만 기실 우리는 잊고 있습니다. 불과 이삼십년 동안 나라가 발전한 것은 세종대왕을 꿈꾸는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세종대왕이 끌어올린 우리민족의 문화의식이야말로 오늘의 밑거름이었습니다. 그것도 이제 바닥이 났지요. 촛불은 가물거리고 있습니다. 어둠을 밝혀줄 새로운 촛불이 절실한 시점에 와있습니다. 지식인들 각성은 두말 할 것도 없고 대산문화재단은 더욱 확고한 신념을 느끼게 해주셔야 합니다. 십 년을 바탕 삼아 백년 이백년 죽은 땅이 살아날 때까지 ―
모포 한 장 둘러매고 눈보라의 만주벌판을 뛰든 왕시(往時)의 우리 독사투사들에겐 독립이 된다는 보장도 보상을 받는다는 약속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모포 한 장 두르고 설원에 누워 그들은 꿈을 꾸었습니다. 끝으로 대산문화재단의 건투를 빕니다.
대산문화재단 창립 1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10년 세월은 잠깐입니다. 그래 그런지 사람이나 공공기관이나 열살을 먹었다면 아니 벌써 10년이 지났나 싶은데 대산의 경우는 이제 10년밖에 안됐나 싶었습니다. 10년 동안에 한 일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굵직굵직하고 빛나는 업적을 쌓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나 봅니다.
“민족문화 창달”과 “한국문학의 세계화”란 재단 창립취지는 거창했지만 조금도 특별할 것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문화재단치고 듣기 좋은 거창한 취지를 내세우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창한 취지는 거창할수록 빨리 구호로 전락하게 돼 있지요. 그러나 대산은 넉넉한 재력과, 우수한 인력과, 약속을 실행에 옮기고야 말겠다는 사명감으로 당초의 취지를 특별하고 빛나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해마다 시, 소설, 희곡, 평론, 번역 등 문학의 각 분야에 베푸는 대산문학상이 수상자가 진심으로 영예롭게 여기고, 문단이 주목하고 있다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인 것은 그 넉넉한 상금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처음부터 정착된 상 운영의 공정성뿐 아니라 한번 상을 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좋은 번역자를 찾아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빛을 보게 하려는 재단의 꾸준한 뒷받침이 지구촌에서도 가장 변방의 언어로 글을 쓰는 작가의 쓸쓸함에 힘이 돼주고 있기 때문일 터입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대산이 한 일 중 가장 큰 일이자, 대산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은 ‘2000 서울 국제문학포럼 - 경계를 넘어 글쓰기’가 아닐까요. 대산은 그 행사에 각국의 세계적인 문인, 석학을 서울로 불러들여 우리의 문인, 학자들과 다문화세계 속에서의 문학이 할 일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하고 대화함으로써 한국문단에 새로운 기운과 자신감을 불어넣었습니다. 그 포럼은 국내 문인들 뿐 아니라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애정을 가지고 한국문학을 전공하는 학자들도 크게 고무시켰다고 합니다. 귀 재단이 오래오래 계속해서 우리 문학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해주길 바라며 감사와 신뢰감을 보냅니다.
도시에는 등고선이 없다. 스카이라인의 들쭉날쭉이 그때그때 다를 뿐이다. 서울하고도 종로1가 1번지에 교보빌딩이 떡 하니 들어섰을 무렵의 새로운 거리 형성이 이를테면 그렇다.
사면 벽이 온통 고동색인, 간결하되 미끈한 건물이 주변의 잿빛 빌딩군을 압도하고 남았다.
처음엔 좀 뜨악했다. 길 건너편 동아일보에 다니면서 정붙인 올망졸망 업소 출입과 무관하지 않다. 유명화가의 초상화가 늘 걸려 있던 ‘귀거래’다방에, 그때 이미 흘러간 곡조였던 해리 벨라폰테의 ‘마틸다’나 페티 페이지의 ‘체인징 파트너’를 들려 주던 ‘보래로’다방이 있던 자리다. 밤낮으로 외상을 긋기 바빴던 ‘복취루’가 무엇보다 요긴한 쉼터 구실을 했다. 자장면으로 허기를 때우고 배갈로 고단한 심신을 달래며 오만세상 일을 복사 재해석하는 기자질에, ‘복취루’는 따라서 시쳇말로 일정 부분 기여를 한 셈이다.
그것들이 사라지고 훤칠한 구조물이 세워진 것이 80년 초던가. 세종로 일각의 면모가 일신되었다. 한 시대가 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멀지 않아 생긴 교보문고는 수도 서울의 명물로 차츰 자리잡았다.
10년 후에는 다시 대산문화재단이 조촐한 간판을 단다. 문학하는 이들과는 그때부터 관계가 돈독해졌다. 작은 문패 만큼이나 조용한 시작이 그리고 마음에 들었다. 재단의 초창기 운영에 멋모르고 한동안 끼어든 경험에 비추어 말하건대 매사를 서둘지 않았다. 제 시간 다 채우고 뜸을 들일대로 들여야 무엇이 나와도 나오는 창작이나 번역에 걸맞은 걸음으로 차근차근 실적을 쌓아 올렸다.
당장의 효과만을 앞세웠다가는 될 일도 안되는 것이 ‘민족문화 창달’이요 ‘한국문학의 세계화’ 아닌가. 갈 길이 까마득해서도 좀처럼 달라붙기 힘들다. 한데 그토록 벅찬 일을 어쩌자고 겁도 없이 벌였을까. 하필이면 쉽게 생색이 나지 않는 문학을 왜 사업의 단일품목으로 산택했을까. 이런 염려에 대한 대답이 곧 10년 후 나타난 여러 성과들이지 싶다.
묵묵히 해낸 작업들…… 문학을 꿈꾸는 아이들의 기(氣)와 기(技)를 살리고 포상 등으로 현역작가를 격려하는 한편, 간고(艱苦)한 세월 속에 묻힌 작고문인들을 되일으켜 따뜻하게 점검하는 행사를 펼쳤다.
못지 않게 꾸준히 공을 들인 것이 대산문화재단의 더 큰 목표이기도 한 밖으로 길을 내는 일이었다. 책을 서양말로 옮기고 작가들이 갔다. 때로는 그쪽의 이름난 손님을 불러들여 말씀을 경청했다. 어찌 생각하면 속상할 노릇인데, 기왕의 판이 그런 걸 어쩌랴. 무의미한 탄식 대신 진일보한 ‘교류’로 여기면 그만이다. 타고르가 노래한 ‘동방의 등촉’을 더욱 환히 밝히도록 애써야겠다.
지난 10년의 이런저런 노력을 일종의 도움닫기나 씨를 뿌린 기간으로 친다면, 앞으로의 10년을 두고는 도약과 수확을 마음먹을 수도 있을까. 아니 될 것이다. 내내 그랬던 것처럼 조신한 끈기로 한국문학 발전의 미더운 서포터 역할에 계속 전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나마나 쓸데없는 소리겠으나 고마운 심정으로 그런 당부를 한다. 문학은 그냥 문학이기 때문이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 가운데 무언가를 이루어 나가는, 고독의 마지막 상징인 탓이다.
7
문인들에게 믿음을 준 대산
이근삼 / 극작가, 서강대 명예교수
고독과 가난을 운명인 양 씹어가며 창작을 하고 있는 작가들에게 후원기금이나 상은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밖에서 나의 존재를 인정해 주고, 하고 있는 일에 의의가 있으니 계속 하라는 신호가 작가에게 주어지는 후원금이요 상 제도이다. 한국에도 작가에게는 물론 예술가를 위해 많은 시상 제도와 기관이 생겼다.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사회 일각에서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시상 기관이 오히려 예술계에 좋지 못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내가 새삼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래 전 일인데 나는 교보문고에 책을 사러 갔다 어떤 대학 대학원 교실에서 한 학기 동안 만났던 곽군을 책방에서 만났다. 어디서 일하는가 물었더니 대산문화재단에서 일한다고 했다. 문화재단이 한두곳인가. 문화재단이란 간판을 내건 이상한 단체가 수없이 많았던 때라 나는 곽군의 근무처가 위태스럽게 느껴졌다. 10년 전의 나의 대산문화재단에 대한 인상은 이런 정도였다.
이런 나에게 재단은 심사위원장을 맡겼고 작년에는 칠순을 넘은 나에게 희곡상도 주었으니 부끄럽지만 고마운 일이다. 나는 그간 숱한 심사를 했다. 그러나 심사 후 나는 항상 씁쓸한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시상 단체는 그것이 언론기관이건 기업체이건 시상 행사는 자기네 홍보용일 뿐 문학 창달이나 장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사하는 사람도 상을 타는 사람도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노여움마저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산문화재단은 창립한 지 10년밖에 안되지만 작가들의 신임을 얻었고 모두가 아끼는 후원단체로 자리를 굳혔다. 문인들도 대산을 문학의 장래와 그 육성도 생각하는 참다운 후원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시상에 그치지 않고 수상작의 번역지원, 젊은 작가들을 위한 창작지원, 외국문학 번역지원, 해외 한국문학 연구지원, 국제문학교류, 청소년문학상과 교육, 그리고 우리들 극작가에게는 한없이 고마운 전국 청소년 연극제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재단은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창립 10년만에 이런 큰 일을 한 재단이다. 앞으로 더 크고 실질적인 일을 계속해 주기를 빈다.
오래간만에 묵은 원고지(原稿紙)를 꺼내놓고 만년필을 들어본다. 손가락 끝으로 자판을 톡톡 쳐서 글자를 띄우는 습관이 어느틈에 몸에 배었는지 잘 써지지가 않는다. 깁스로 조여있던 손목이나 발목을 한참만에 움직여볼 때처럼 동작이 서투르다.
그러나 한두장 써내려가니 손과 팔의 감각이 조금은 되살아난다. 만년필의 감촉에서 옛사랑 같은 것이 느껴지고 팔의 움직임에서도 가벼운 긴장(緊張)과 함께 쾌감(快感)이 다시 인다. 글을 쓴다는 것이 정신의 작업일 뿐 아니라 육체의 몫이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내가 글쓰기에 따른 이 육체의 기쁨을 일시라도 회복(回復)하게 된 것은 대산문화재단(大山文化財團)의 덕분이다. 그 운영자가 반드시 원고지에 육필(肉筆)로 글을 써보내라고 요청(要請)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 요청이 지난 십년 동안 대산재단이 해온 일의 상징(象徵)이라고 여겨졌다. 기계문명이 베푸는 성역화(省力化)와 안이성(安易性)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자신에게 내재된 다부지고 풍요로운 가능성을 잃어가고, 따라서 그 실현이 가져오는 고귀한 기쁨을 잃어가는 오늘날, 그런 추세를 거스르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온 것이 대산재단이었다. 그 의지는 특히 문학을 위한 다양한 후원(後援)으로 구체화되었다. 대산재단은 고차적(高次的)인 문학작품을 쓰고 읽고 알리는 행위야말로 우리가 자아를 되찾는 길이라는 것을 그 어느 기관보다도 깊이 인식하고 그것을 고무(鼓舞)하는데 진력해왔다.
하기야 나는 그 귀중한 노력이 전 국민적인 차원에서 결실(結實)되리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인간다운 반성과 사유를 이어나가는 소수의 사람들마저 아예 사라져버리는 ‘끔찍한 신세계(新世界)’를 상상하기는 정녕 싫다. 혹시 그런 세상이 올 것 같으면 그 도래(到來)를 막기 위해서 심신을 바치려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대산재단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곁에 서고 그것을 지탱해주는 적극적인 후원자로 존속(存續)하리라고 믿는다. 이런 확신을 서투르게나마 몇자 적게 된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