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대산문화재단
대산문화재단 10주년 기념원고
대산문화재단 10주년 기념원고 / 젊은작가포럼
어느 가을밤의 꿈에 관한 추억

- ‘2000년을 여는 젊은 작가 포럼’(1998.9.17~18)에 관한 회상기

정과리 / 평론가, 연세대 명예교수, 2000년을 여는 젊은 작가 포럼 기획위원장
그 때가 아득하다. 추억 속의 마음은 어떤 기대로 충만해 있었던 듯한데, 아니 있었는데, 그 내용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품었던 목표, 내 복부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치던 의욕은 지금 그렇게 낯설 수가 없다.
무슨 유별난 깜짝 이벤트를 모의했거나 기존의 문학판을 송두리째 뒤엎는 유쾌한 반란을 ‘획책’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의 한국문학의 정황에 대한 나의 혹은 우리의 불안과 초조함이 기획의 강력한 촉매였다. 냉전 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불어 닥친 정치적 상상력의 와해, 문화 산업의 팽창으로 인해 문학판에 광범위하게 퍼져 나간 상업주의라는 질병, 그래서 글쟁이들은 표류하고 글싸개들은 활개친 한 십년의 흉몽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현상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던 평론쟁이들의 대책모름에 대한 자조와 무력감을 입술이 해어지도록 곱씹고 있었던 때였다.
대산문화재단이 2000년 맞이 특별 기획을 하자고, 우리를, 그러니까, 김태현, 정호웅, 황종연, 이광호 그리고 나를 꾀어내서, 1998년 1월 17일 이른바 ‘2000년을 여는 젊은 작가 포럼 제 1차 기획회의’라는 것을 열었을 때, 우리는 저 문화산업의 요란방정과 텍스트의 무기력과 담론의 무능력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절박하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묵직하게 얹힌 체증처럼 느끼고 있었다.
한국의 작가들에 대한 문학사적 배치는 70년대에서 끝나 있었다. 요컨대 한국문학의 좌표가 4·19세대 작가들까지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문득 실종되어버린 것이었다. 80년대에 왕성한 작품 생산이 있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겠으나, 이념이 압도했던 그 시절에 90년대 이후에도 살아남은 작품들은 생산량이 덜했던 그 이전보다 오히려 적다고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휴전 직후 헐벗은 아프리카 난민 비슷한 신세에 빠져 있었던 한국문학은 4·19세대의 분발과 더불어, 한국의 경제 성장만큼이나 급속도로 성장하여, 아주 탄탄한 틀, 즉 미학적이고 사회적인 하나의 제도를 정착시켜 놓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 이후 세대의 작가들은 그 제도의 주형틀에 의해 찍혀 나온 복본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될 수 있는 여지가 농후하였고, 실제로 일상적 담화의 차원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 거울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의 기획은, 그리고 그 기획을 자극한 희망은 헛된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198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공간에 등장한 적지 않은 작가, 시인들에 의해서 1970년대적 문법을 쇄신하고 삶을 투시하는 시각과 층위를 근본적으로 달리 하는 작품들이 씌어졌으며, 단지 그것이 시대의 풍문과 공론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암암리에 굳게 믿었고, 21세기의 한국문학은 이 비가시적 일뤼미나시옹의 발광인(發光人), 이 ‘소리없는 아우성’의 성악가들에 의해서 새로운 방향을 잡아 나갈 것이라는 예측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1980년대 이후 문학의 장에 참여한’ 젊은 작가들을 주인으로 모신 연회가 틀을 이루었고, ‘2000년을 여는 젊은 작가 포럼: 21세기 작가란 무엇인가’를 포럼의 명칭으로 삼아, 8개의 주제가 공식 메뉴로서 나뉘어졌다. 전체적인 구성과 참여자 명단을 확정한 게 여섯 차례의 기획 회의를 거친 4월 말이었으며, 곧바로 6월 말을 마감으로 잡은 원고 청탁서가 발송되었다. 포럼이 열린 1998년 9월 17일, 18일은 특별히 기억되어도 좋을 것이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을 가득 메우다 못해, 복도마저도 자리를 펴고 앉아 모니터로 포럼을 관람한 사람들로 북적대었으니, 그 꼴이 2002년 6월의 시청 앞 광장을 방불케 하였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름 있는 작가들의 사인을 받으려 많은 팬들이 줄지어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작가에게 사인을 받는 일은 예전에도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작가의 책을 들고 와 그 책에 서명을 받는 정도였으며, 90년대 이후 흔해진 ‘작가 사인회’도 같은 형식을 밟고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부터 별도의 사인 노트를 들고 와서 사인을 받는 사태가 일어났으니, 이 무렵부터 일반인들에게는 작가와 연예인이 동렬에서 파악되었다는 것을 가리켜 보여준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많은 청중으로 하여금 젊은 작가들에게 몰려들게 했던 것일까? 기획위원들 대부분이 대학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을 은근히 동원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그 많은 청중을 채울 도리가 없다. 어쩌면 문화 산업의 팽창이 작가의 상징적 교환가치를 한껏 올려놓은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적으로 공백으로 놓여 있는 작가들, 그러니까, 문학사에서는 부재하고 사회적으로는, 정치적 이념틀의 붕괴 이후, 무규정 상태로 남아 있는, 그러나 “즐겁게 하고 교화한다”는 문학의 공리에 충실한 텍스트들을 줄기차게 생산해내어서 ‘문학적 글쓰기’의 실체 자체로 환원된 작가들을 알고 싶어 하는 즉, 그 무엇이든 어떤 지식의 틀에 가두어 이해하고 싶다는, 지적 호기심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이질적인 원인들의 다원적 결정체로서 청중은 탄생하였을 것인데, 당시의 정황 속에 흠씬 취해 있었던 나는 그것을 제대로 분석할 여유를 갖지 못한 채, 그냥 흘려보내고 만다.
포럼은 대성공이었다. 기획 기간 도중에 상임이사로 부임하신 윤상철 이사의 놀람으로 한껏 커진 눈동자가 지금도 기억날 정도다. 생각해 보면 9개월에 걸친 꽤 긴 장정이었으나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들떠 시작해서 즐겁게 메지낸 사업이었다. 그 사업을 끌고 간 건 기획위원들이었지만, 앞서서 멍석을 펴고 온갖 뒷바라지를 한 재단의 그 ‘총기’와 ‘성실함’이 없었더라면 이 사업은 시작되지도 이루어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사업 하나만으로도 대산문화재단은 본래의 창립 취지를 얼마나 완벽하게 충족시키는지를 여실히 증명한 것이다. 그 흥분된 시간이 지나간 지 벌써 4년이 되었다. 그 때의 젊은 작가들은 지금 한국문학 공간의 가장 중심적인 작가들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꿈꾸었던 것, 즉 21세기의 한국문학을 위한 새로운 지형짜기라는 목표는 이루어졌던가? 여기에서 나는 멈칫 서고 만다. 작가들이 왕성하게 작품을 써내고 독자들이 열심히 읽어주는 것과 그것을 세계 전체의 움직임 속에 위치시키고 그 의미를 측정하는 것은 층위가 다른 문제다. 후자의 문제는 전자 위에서만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의 해(解)를 구해야 하는 문제다. 그리고 지금 그 답은 세월의 저편 너머에서 붙박인 채로 오늘의 시간대로 건너오고 있지를 못하다.
우리의 작업은, 기왕에 짜여졌던 것이든 새롭게 짜인 것이든 그 존재론적 상태로서는 ‘이미 있는’ 역사 속에 문학을 끼워넣는 작업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당시의 우리는 여전히 ‘문학’의 신화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꿈꿀 권리’의 실천이라는 문학의 원천적 기도 속에 힘껏 머물고 결코 빠져나가려 하지 않았다. 점점 사람들은 그것이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환상이 없다면 어떻게 삶이 변화할 수 있겠는가? 환상을 잘 먹고 환상과 싸워 환상으로부터 태어났으나 환상과는 전혀 다른 무엇을 ‘현실’로 만드는 것, 그것이 실은 문학의 ‘진실’이자 정의가 아니었던가? 그것을 이제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듯하다. 그걸 할 수 있는 환경도 거의 사라져버린 듯하다. 그러나 문학의 눈으로는, 그 환경의 소멸은 삶 전체의 실종이다.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자동인형들로서 존재할 뿐이다. 어떻게 그 환경을 소생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 물음이 이 한여름에 ‘지난날의 눈’이 되어 내 눈앞을 환각처럼 내리고 있다. 충동적으로 내 입술은 전혀 익숙지 않은 한 곡조를 읊는다. “아 옛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