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곽준서 / 평론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1학년, 제24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자
평론 「감금과 죽음 사이의 틈 : 정보라식 읽고 쓰기」 등
1.
드레스덴의 알테 마이스터 회화관에서는 여섯 개의 잘린 목을 보았다. 그중 세 점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 위에 올려져 있었다. 헤롯 왕의 의붓딸 살로메는 떨떠름한 얼굴로 자신이 요구한 요한의 머리를 외면하고 있다. 다른 두 점에서는 다윗이 자신이 벤 골리앗의 머리를 들어 보인다. 다윗은 한 그림에서는 아주 어린 소년처럼, 다른 그림에서는 그보다는 자란 청년처럼 그려졌다. 마지막 하나의 잘린 목은 메두사의 것이었다. 메두사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지만 머리카락의 뱀들은 여전히 역동적으로 뒤엉켜 서로 싸우거나 벌레를 노리고 있다.
그밖에도 수많은 그림이 신화나 성서 속 인물의 고통과 죽음을 소재로 했다. 가장 기억에 남은 그림은 18세기 이탈리아 화가인 조반니 바티스타 피아체타의 「아브라함의 희생」이었다. 그림 왼켠의 아브라함은 오른손에는 단도를 쥐고 왼손으로는 천으로 눈을 가린 아들 이삭의 어깨를 안은 채 희생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그림의 오른쪽 위로부터 내려온 등 돌린 천사가 아브라함을 마주한 채 그의 가슴팍에 왼손을 올려 그를 저지한다. 세 인물이 이루는 역삼각형의 구도와 아브라함의 경직된 팔, 그리고 그와 대비되게 힘없이 늘어진 이삭의 아름다움이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종교적 믿음을 약간이나마 이해하는 데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깨달음은 믿음이 꼭 근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일화는 믿음이 오히려 선불제라는 걸 보여준다. 원칙적으로는 증명된 사실만 믿는 현대인들과 다르게 믿음이 진실을 밝히는 가장 주요한 도구였던 시절이 있었고, 그 사고방식이 현대에 일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로서는 모두가 그렇게 사고하던 시대를 상상하거나 재현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신을 믿지만 수백 년 전의 사람들이 믿었듯이 믿는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2.
마찬가지로 드레스덴에 위치한 젬퍼 오페라 하우스에서 본 오페라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에서는 열여섯 명이 단두대에 올랐다. 1956년 작곡된 이 오페라는 프랑스 혁명기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오페라에는 성직자들이 부족할 때면 순교자들이 그 숫자를 채운다는 가사가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믿음이 진실을 밝히던’ 시대의 완연한 끝물인 것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에밀 시오랑의 문장을 빌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카르멜회 수녀들은 마지막 순교 전문가들이었다. 그후부터는 대충 아무렇게나 순교한다……
이처럼 이 오페라는 순교의 순교를 통해 한 시대가 완전히 무너지는 감각을 선명히 드러냈다. 자신은 공포 속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주인공 블랑슈는 결국 그 시대적 불안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공포는 차가운 물과 같아서 처음에는 무서워도 잠길수록 좋아진다는 그의 말 때문에 이 극이 단순히 비극적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종교적으로 승화하는 결말의 블랑슈는 너의 공포는 숭고하지 않다는 제 오빠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 같아 아름답게 느껴졌다.
3.
예니 에르펜베크의 소설 『모든 저녁이 저물 때』에서는 한 여인이 다섯 번 죽었다. 에르펜베크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삶과 역사가 촘촘히 얽히며 만들어지는 섬세하고도 거대한 흐름을 담은 이야기이다. 내가 사회학과에 오길 잘했다고 가장 분명히 느낀 건 사회학은 미시와 거시, 개인과 사회, 일대기와 역사의 통합과 연결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였다. 이 소설은 같은 과제를 문학은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베를린으로 넘어와 만난 작가님도 우리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동독과 서독, 장벽의 붕괴와 그 이후에 대해 고민한 시간들에 대해 실제로 고민이 이루어진 그 공간에서 듣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우리는 소설에 등장하는 거리와 철로, 작가님의 일생이 뿌리내린 것 같은 서재를 보았다.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처럼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일을 다루고, 일상이 얼마나 예외적이고 임시적인지 이야기하면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하루하루와 모든 게 영원할 것 같은 순간들을 빼먹지 않는 소설을 쓰시게 된 경위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솔직하지 못한 글을 쓸 바에야 가명을 쓰라는 조언이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보통 자기 이름을 걸고 할 수 없는 말은 책임질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그런 이유로 수많은 작가들이 하고싶었던 내밀한 이야기를 삼켰다고 생각하니 원통해졌다. 내가 가명으로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일지, 그걸 꼭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지 고민하게 됐다.
4.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에서는 수십 수백의 죽음을 밟았다.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얼굴을 강철로 빚어 폭이 좁고 층고가 높은 복도에 깔아 놓고 그 위를 걸어 다니도록 만든 체험형 전시물인 「낙엽」은 밟을 때의 소리가 충격적으로 강렬했다. 홀로코스트 타워 역시 비슷한 압도감을 주었다. 나는 아직도 어떤 메시지는 언어를 경유하지 않고 체험될 때 더 온전히 전달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이곳에서의 경험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박물관은 홀로코스트 추모 외에도 유대교의 역사와 문화를 저장하고 설명하는 기능에 충실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맨 위층에서부터 한 층씩 내려오며 관람하는 형태였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꼭대기 층이었다. 유대교의 종교법인 할라카는 직역했을 때 ‘걸어가는 방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전시관에서 상영 중인 다큐에서는 유대교를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인 맞춤형 매니지먼트 시스템이라고 표현했다. 유대교는 비유적으로도, 문자 그대로도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면 유대교에서는 생활 습관이 못지않게 중요하고, 종교라는 하나의 영역으로 묶이기에 둘의 본질이 너무 다르다고 느꼈다.
그밖에도 유대교 경전 구절과 랍비의 말, 나치에 저항한 유대교 신자들의 어록 등이 벽에 가득했다.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인류의 차원에서 추모하고 성찰하는 작업 역시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독일의 수많은 학생들과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가득한 박물관에서, 끔찍한 과오를 마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러나 현재 진행형으로 가해와 피해가 교차하며 일어나고 있는 제노사이드와 전쟁을 직면하는 일에 비해서는 또 얼마나 쉬운 일인지에 관해 생각했다.
5.
베를린은 습지 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나는 대부분의 인간은 여러 면을 갖고 있다기보다도 딱히 면이랄 것이 없고, 신념이 있는 인간은 정말 드문 것 같다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불합리함을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지킬 원칙을 찾지 못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매 순간 주어진 걸 조합하여 최선의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이쪽이 예외 없이 원칙을 지키는 것보다 어렵지만 정확한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런 고민을 안고 떠난 이번 해외문학기행은 좋은 어긋남의 연속이었다. 베를린을 걷다 보면 튼튼한 도시를 만드는 데에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 단단한 토대보다도 끝없이 변화하고 보수하는 노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나는 진짜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는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대전제 없이도, 습지 위에 세운 글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제 몫을 해낼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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