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반은지 / 극작가, 서울예술대학교 극작과 2학년, 제24회 대산대학문학상 희곡 부문 수상자
희곡 「당신이 영영 모를 주문」 등
1. 의문 갖기: 한국에서는 만날 수 없는 양식으로 지어진 드레스덴의 건축물들. 벽과 조각상들이 곳곳이 탄 것처럼 그을려 있다. 제각각의 농도를 가진 회색빛은 마치 잘못 맞춰진 퍼즐처럼 얼룩덜룩하다. 대부분의 건축들이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으니 자꾸 눈에 밟힌다. 의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된다. 복원의 흔적이다. 전쟁 이후 무너졌던 건물들을 재건하면서 이전에 있던 벽돌과 새로운 벽돌이 혼합되어 갖춰진 모양새. 복원이란 완전히 새롭게 하기가 아니기에 지워지지 않는 건 애써 지워내지 않는다.
2. 모른 채로 감상하기: 알테 마이스터 미술관. <007:스카이폴>에서 제임스 본드와 Q가 미술관에서 접선하는 장면을 좋아하는 나에게 유럽의 미술관은 공간 자체로 충분하다. (물론 영화관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곳은 영국의 국립 초상화 미술관이지만) 꼭 봐야하는 작품이 뭔지 모른 채로 내게 말을 걸어오는 작품들을 기다리기. 관람을 마치고 머릿속에 박힌 작품들을 엽서로 구매하면서 이 시간을 보존했다는 착각을 한다.
3. 관광 상품에 대해 생각하기: 정주가 미술관에서 사온 0유로 지폐를 재밌게 보여준다. 신기하다. 0유로가 있구나. 0유로를 4유로에 파는구나. 우리나라에도 0원이 있으면 팔릴까. 0유로는 살아 있지만 죽은 돈이라고 시시덕거리며 함께 밥을 먹는다. 난 안 사지. 0유로는 한화로 6,800원이나 하는 셈. 괘씸하지. 0유로인데. 그렇게 생각해본다.
4. 완전히 이해하기를 포기하기: 오페라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 무대 위에 설치된 두 개의 스크린에서 독일어와 영어 자막이 나온다. 영어 자막을 쫓으면서 극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이 바빠진다. 그러다 포기하고는 결국 무대만 본다. 인물의 감정과 이야기는 대사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에서다. 프랑스의 공포정치가 극 안에서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주저하던 블랑쉐가 끝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목격하는 순간 또다시 공연예술에 반하고 만다.
5. 내 안의 것을 복원하기: 엘베 강을 걷는다. 크로이츠 교회에서 시간을 보낸다. 하염없이 앉아 있는 일이다. 팬데믹 전, 내가 봤던 유럽의 풍경을 떠올린다. 오늘처럼 비수기인 것을 과시하듯 우중충한 하늘과 당장이라도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도 이상할 것 없는 쌀쌀한 기온을 품고 있던 때. 내 안에서 한 시절이 끝났다는 걸 감각한다. 또 모르는 이야기라는 걸 안다.
6. 우산 쓰지 않기: 베를린은 드레스덴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높은 건물들이 주는 해방감처럼 출퇴근 시간대에 대중교통을 타도 붐비지 않는 곳. 24시간 동안 영업하는 대형 서점이 있고, 맛있는 쌀국수, 케밥, 중국요리가 있는 곳. 예고도 없이 비가 잦다. 거리의 누구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 슬쩍 손을 내린다. 빗방울이 떨어지면 바로 우산을 펼쳐들던 나도 우산을 챙기지 않은 것처럼 비를 맞으며 걸어본다. 찜찜한 걸음을 걷다보면 이내 완전히 자연스러워지는 때가 온다.
7. 의도를 넘겨짚기: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안내문을 봐도 이상하게 길을 잃는 것 같다. 출구가 어디지. 표시는 되어 있는데 찾기가 쉽지 않다. 몇 번이나 헤매는 와중 초록색 불빛을 띈 비상구가 눈 닿는 곳마다 있다. 지하에서부터 관람을 시작하게 되는 구조, 아무것도 없는 벽면까지 나 있는 계단, 이곳이 전시실인가 싶어 문을 밀고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홀로코스트 타워가 내 숨을 잡아먹었을 때. 건물의 높은 층고와 좁은 벽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8. 사이(pause)를 짐작하기: 작가 예니 에르펜베크와의 대담. 답하기 위해 뜸을 들이는 사람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었나. 아주 감정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를 마모시켜 꺼내놓기 시작한 사람의 눈빛을 본다. 책을 선물해준 다정한 예니가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동네를 통하며 그가 해주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듣고, 서재 속 빼곡하게 저장된 기억들을 본다. 잠시 그의 삶을 엿본다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긴장이 슬슬 풀리고 준비해간 책에 욕심내서 사인을 받는다. 다음날이 된다. 아, 그의 집에 보조배터리를 두고 왔다..
9. 모르는 걸 보기, 듣기, 감각하기: 김리윤, 하미나, 한국화 시인들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 스스로 시와 거리가 있다고 여기고 있던 나에게 낭독은 불쑥 튀어나온 손 같다. 어떤 말을 놓쳤고, 어떤 건 내 안에서 중첩된 기억이 솟는다. 슬쩍 잡아본다. 그려지고 들리는 시라는 게 있구나. 더 세게 쥔다.
10. 관광 상품에 대해 고민 않고 구매하기: 마지막 날. 베를린 장벽 앞 기념품 상점에서 0유로를 만난다. 빳빳한 새 지폐들이 다발로 있다. 지폐 한 장을 집어 계산한다. 0유로는 구겨지지 않게 책 사이에 끼워 보관한다. 독일의 0유로가 한국에서는 6,800원이라는 사실 같은 건, 이해타산 같은 건 이제 아무렴 상관없다.
0. 다시 영(0): 난데없었던 독일에서의 날들을 세며 행위의 순간들을 찾는다. 낯선 독일은 시간이 묻은 장소다. 사건과 사람의 시간들이 묻은 채로 켜켜이 쌓여 있다. 직면하게 하고 응시하게 만든다. 시선이 곧 질문이 되는 곳에는 숨을 데가 없다. 마지막으로 독일에서 함께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아쉬움을 달래던 우리들. 훗날 독일에 다시 오더라도 이런 조합으로 올 일은 없을 것이라 떠들었던 게 실감난다. 항상 배려를 잊지 않고 인솔해주신 장근명, 이규철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하다. 쓰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정주, 승혁, 준서, 서희와 함께 만든 기억에 웃음 지을 수 있어 기쁘다. 0유로 같은 이 시간들이 각자의 삶에 있어 작은 답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 번호 | 기 행 문 | 글쓴이 | 조회 |
|---|---|---|---|
| 5 | 빠른 걸음 | 정서희 | 613 |
| 4 | 습지에 세워진 도시 | 곽준서 | 624 |
| 3 | 모르는 곳에서 낯선 돈을 만난다면 | 반은지 | 598 |
| 2 | 소시지를 낯설게 보기 | 박승혁 | 748 |
| 1 | 아름답고 기쁜 것을 나에게 줘 | 오정주 | 10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