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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설국에서 보내는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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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그네가 되어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瑞康成 1899~1972)의 소설 『설국 雪國』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제 손에는 문학소년 시절 읽었던 그 소설책이 들려있고, 소설의 첫 장에는 오래전에 깊게 그은 붉은 밑줄이 추억처럼 남아 있습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저는 지금도 이 문장에서 심장이 마구 뜁니다. 북위 36도 아래, 눈이 귀한 따뜻한 남쪽 항구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저에게 눈은 첫사랑, 첫 키스와 같은 무게의 뜨거운 존재입니다. 눈은 언제나 그립고 그리운 그 사람 같아서 눈의 나라로 가는 초대장을 받고서는 망설이지도 않고 여행 가방을 챙겼습니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무한의 백색으로 펼쳐지는 눈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그 설국에 겨울 나그네가 되어 도착하는 제 모습을 오랫동안 꿈꿔왔기에 떠나올 때 설레는 제 속내를 당신에게 감추지도 못해 미안했습니다.
저녁에 인천공항을 떠나 밤에 니가타(新潟)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니가타 공항에서 설국의 무대인 에치고 유자와(越後湯澤)까지는 버스로 2시간이 걸리는 길입니다. 이번 여행의 동행 중에는 ‘설국’ 속에 살고 있는 여자 주인공 ‘요코 葉子’와 같은 또래의, 나무의 새잎처럼 맑은 나이의 젊은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버스 유리창에 입김을 호호 불며 설국을 기다리는, 그 유리창에 되비치는 그들의 모습을 읽으며 저는 소설 『설국』 속의 첫 장면 속에 이미 들어와 버린 것 같았습니다.
버스가 설국에 가까워질수록 날은 점점 흐려지더니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기다리며 눈은 내리고 있었습니다. 빈 땅에 내리는 눈이 아니라 겨우내 쌓이고 쌓인, 사람의 키를 넘는 2m의 적설량 위로 또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높낮이가 눈(雪)의 높이로 백색수평을 이룬, 세상 모든 색이 눈의 색으로 하나가 된 이곳은, 가와바타가 “발가락 뒤 오목한 곳까지 깨끗할 것” 같다고 말한 그 여자가 살던 그 마을입니다.
눈 내리는 밤에 찾아간 숙소는 가와바타가 여러 차례 머물며 『설국』을 썼다는 다카한(高半) 여관입니다.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문학의 향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고풍스러운 일본식 여관입니다.
또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은 그 여관의 맑고 뜨거운, 유황내음이 나는 섭씨 42도의 자연온천입니다. 밤은 이미 자정을 지나고 있었습니다만, 가와바타가 몸을 담그고 소설을 구상했던 그 온천에 지치고 차가워진 제 몸을 깊숙이 묻었습니다. 온천의 대형 유리창 밖으로 사선을 그으며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소설 ‘설국’에서 시(詩)처럼 빛나는 문장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습니다.
가와바타가 “저녁 어스름의 물결에 떠 있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야광충” 같았다고 표현한 ‘요코’의 눈동자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몸이 뜨거워질수록 제 몸 속에서 바쁘고 아픈 일상의 시간이 스멀스멀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영혼의 시간은 온천의 뜨거움과 눈의 차가움 사이에서 그냥 그대로 멈춰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날 새벽 눈을 떴을 때 발코니 창과 다다미방 사이를 막고 있는 미닫이문의 문종이가 파랗게 젖고 있었습니다. 미닫이문을 열자 눈은 여전히, 쉬지 않고 내리고 있었습니다. 내린 눈은 하얀빛으로 다져지고 다져지다 흰색에서 빠져나오는 푸른빛만을 모아 설국의 푸른 새벽을 만들고, 눈을 제 키 높이만큼 머리에 인 자동차들이 종종걸음으로 새벽길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눈의 나라인 유자와에서는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에는 눈이 쌓이지도 않았습니다. 영하의 추위에도 도로가 빙판으로 변하지도 않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그들은 도로에 촘촘한 간격으로 온천공(孔)을 만들고 24시간 온천물을 흐르게 하여 유자와의 길은 오고가는 사람들을 위해 언제나 따뜻하게 열어 놓고 있었습니다.
다카한 여관에는 ‘설국’을 찾아오는 나그네들을 위해 여러 가지 문학적인 배려를 해놓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머물던 1930년대 여관방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입니다. 작가가 소설을 썼던 방과 함께 작가의 사진과 친필, 저서, 여러 가지 자료들도 빼곡하게 전시하고 있어 여관이 아니라 마치 가와바타의 문학관을 찾아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소설 속의 실제모델이었던 게이샤 ‘마치에’의 사진도 자랑스럽게 모셔두고 있었습니다. 사진 속의 게이샤는 설국의 눈처럼 맑고 아름다운 여자인 것 같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도 소설가도 중요하지만 그 소설을 탄생하게 한 게이샤에 대한 그들의 존경도 깊습니다. 소화 9년경 18살에 찍었다는 마치에의 사진은 지금도 18살의 아름다운 나이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 같습니다.
또 그 방 앞에 작은 응접실을 만들고 영화로 제작된 『설국』을 오후 4시와 저녁 8시 30분, 하루 2회씩 상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카한 여관의 세세한 문학적인 배려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비록 하룻밤일지라도 머무는 동안 ‘동양적 미의 정수를 보여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은 『설국』의 향기에 흠뻑 취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젠 너무 흔한 문학콘텐츠가 되어버린 작금의 문학기행들은 기념사진만 찍고 돌아오는 것 같아 그 끝이 씁쓸했었는데, 우리들의 설국 행은 출발에서부터 설레고 도착해서는 그 작품 속에서 생생하게 함께 호흡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더욱이 이번 설국기행의 안내를 메이지대학 객원교수로 일본에 와 있는 고운기 시인이 맡았고, 『설국』과 그 현장에 대한 마치 시 같은 시인의 주석(註釋)은 우리를 때로는 환호하게 하고 때로는 생각에 잠기게 했습니다.
유자와에는 또 하나의 ‘설국관’이 있습니다. 유자와 역사민속자료관에 설국 시대의 주민들의 생활상을 전시하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사진과 유품, 저서 등을 특별히 모시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한국에서 출판 된 몇 권의 『설국』도 같이 전시되어 있어 반가웠습니다.
소설 속의 그 터널과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친필로 쓴 『설국』의 첫 문장을 합성해 만든 사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놓았고, 가와바타의 서재 또한 실물 크기의 사진으로 재현해 놓고 누구나 자유롭게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외진 한촌이었던 유자와는 터널이 뚫리고 신칸센이 개통되며 이제는 유명한 온천단지로 변했지만 그래도 소설 속의 현장으로 사라지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는 풍경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곳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첫 데이트를 즐겼던 ‘삼나무 숲 속의 신사(神社)’입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찾아간 신사는 이미 눈 속에 묻혔고 ‘이끼 낀 돌사자 상’은 오래전 깊은 눈 속에 파묻혀 버렸지만 “목덜미에 삼나무 숲의 어두운 푸른빛이 감도는” ‘고마코(駒子)’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습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를 타야 눈의 나라에 도착하는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미나카미(水上)역과 에치고 유자와(越後湯澤)역 사이에 11.5km의 긴 시미즈(淸水)터널이 있습니다. 가와바타는 그 터널을 지나 설국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도 그 터널을 지나, 아아, 마침내 눈의 나라에 당도했습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소설 속 첫 장면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습니다. 그 ‘신호소’도 눈을 맞으며 제 자리에서 늙어가고 있습니다.
『설국』은 첫눈이 내릴 쯤 첫 문장이 시작되고 쌓인 눈이 녹을 때 완성되는 현재진행형의 소설 같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제가 찾은 이 길을 다시 찾는다면 반드시 눈 오는 날의 설국 행을 권합니다.
여기는 설국, 눈 내리는 설국, 어디에도 길이 있고 어디에도 길이 없는 눈의 나라. 저는 그 나라에서 하늘을 향해 누워버렸습니다. 문득, 타히티로 이상향을 찾아 떠났던 폴 고갱의 그림 제목이 뚜렷하게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도쿄에서, 우리에게 『일식』으로 알려진 일본의 젊은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와의 만남 등 계속되는 문학기행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저는 주머니 속의 모든 시간과 약속을 꺼내 던져버리고 눈 위에 누워 하염없이 눈을 맞기 시작했습니다.
낡은 비유지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눈 녹듯 사라질 존재지만, 우리들의 『설국』은 늘 이 자리에 그 모습 그 향기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설국에서의 제 시간도 참 향기롭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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