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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종 사회의 매력과 힘

U.C.버클리(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의 캠퍼스는 건물이 넓은 공간에 퍼져있지 않고 한국의 대학 캠퍼스처럼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어 친근감이 든다. 그래도 140년 가까운 전통을 가진 학교답게 울창하고 거대한 나무들 사이에 다양한 모양의 건물들이 있어 저절로 공부하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안정되고 아름답다. 백인, 흑인, 히스패닉, 인도인, 동양인 등 다양한 학생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U.C.버클리는 백인의 비율이 40%도 안 될 정도로 유색인종의 비율이 높다고 하는데 이것이 이 대학교에 활력을 주는 것 같다. U.C.버클리는 특히 동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많은 대학으로 유명하다. 독립 건물을 가진 동아시아 도서관이 있지만, 내가 체류하던 시기에 미국 내에서 세 번째 규모라고 자랑하는 큰 독립건물의 새 도서관이 준공되었다. 동아시아 도서관에는 중국과 일본 자료가 압도적으로 많지만(전체 자료 중 중국이 49%, 일본이 41%인 반면 한국은 10% 정도라고 한다), 남한과 북한 서적이 같은 한국어로 씌어졌다는 이유로 서가에 나란히 꽂혀 있어서 이채로웠다. 주도서관인 도 라이브러리(Doe Library)의 중앙 로비에도 한국을 포함하여 중국, 일본 등의 고지도와 고서가 진열되어 있었다.

다인종의 미국 사회를 실감하게 된 것은 U.C.버클리 일본학연구소(Center for Japanese Studies) 소장인 던컨 윌리엄스(Duncan Ryuken Williams) 교수의 결혼식에서였다. 신랑은 영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둔 혼혈인이고 신부는 한국인이다. 그래서 축사나 피로연 연설에서 영국과 일본, 한국, 미국이 합쳐진 흥미 있는 가정이 탄생했다는 말이 여러 번 나왔다. 3개의 대륙이 만난 인연에 걸맞게 결혼식도 한국인, 일본인, 미국인 스님 7명이 불교식으로 진행하는 국제적인 이벤트였다. 결혼식은 꽤 진지했지만 자유스러우면서도 화기애애하고 흥이 넘치는 분위기였다. 결혼식 장소도 오클랜드의 스시 식당을 겸한 유명한 재즈공연장이었고, 식당 주인은 그날 결혼식 주례를 한 일본인 스님의 부인이었지만, 그런 것이 흠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클랜드의 한국 식당에서 열린 ‘한국 입양인 예술가 공연 Korean Adoptee Artists Showcase’도 다인종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흥미 있는 행사였다. 코미디언, 가수, 시인,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 등 4명의 입양인 아티스트가 출연하였는데, 관객들도 한국인은 물론 백인, 흑인, 히스패닉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도 활동한다는 코미디언 겸 MC인 애미 앤더슨(Amy Anderson)은 한국계 입양인인 자신의 약점을 재치 있고 재미있게 이야기하여 웃음이 끊이지 않게 했으며, 에미상 후보까지 올랐던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 디안 보셰 림(Deann Borshay Liem)은 자신의 입양에 얽힌 스토리를 화면에 담은 다큐멘터리 『일인칭 복수 First Person Plural』 일부를 보여주어 입양인의 사회적인 문제를 부각시켰다. 시인 리 헤릭(Lee Herrick)은 자신의 최근 시집 『욕망으로부터의 긴 거리 This Many Miles from the Desire』에서 입양인의 특별한 체험과 정서를 그린 시를 낭송하였다.

남한에 있는 한 교회 계단에다 / 나를 버리기 전, 나를 기른 5개월 동안 / 내 친어머니는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 아들에게 이별을 고하던 그 깊은 노래는 // 사라장의 바이올린 활처럼 떨리는 소리였을까? / 누가 진정으로 말할 수 있을까? / 때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블루스. / 블루스는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발견하는 노래, // 한밤중, 네 한국 이름이 이광수라는 게 기억날 때, / 갈색의 얼굴 위에 반짝이며 흘러내리는 / 작은 물방울이 된 신, 눈물처럼 / 무언가를 빛나게 해주는, 밝은 빛이라는 뜻을 가진 // 그 이름이 기억날 때 부를 수 있는 노래.

I wonder what songs my birth mother sang in / the five months she fed me before she left me / on the steps of a church on South Korea. / I wonder if they sounded like Sarah Chang's // quivering bow, that deep chant of a mother / saying good bye to her son. Who can really say? / Sometimes all we have is the blues. The blues means / finding a song in the abandonment, one // you can sing in the middle of the night when // you remember that your Korean name, Kwang Soo / Lee, means bright light, something that can illuminate / or shine. like tears, little drops of liquified God, // glistening down your brown face.

「구원 Salvation」의 한 구절이다. 이미 없어진 과거이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근원적인 기억을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추적하고 있는지 느껴진다. 비극적인 한국 역사의 그늘에서 나온 해외 입양아 출신들이 그 부정적인 정서를 예술적인 에너지로 만들어 미국 문화의 새로운 다양성 속에 녹여가고 있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 후에 리 헤릭, 디안 보셰 림 등 입양인 예술가들이 패널로 참석하는 입양인 세미나를 참관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한국이 지난 수십 년간 그렇게 많은 고아들을 미국에 입양시키고 거의 잊어버리고 있는 동안 미국에서는 입양인 문제가 뜨거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현장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입양인들이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연령으로 성장하면서, 또 많은 가정들이 입양아들을 키우면서, 이 문제는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점점 체계화된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버클리에 체류하는 동안 재미 한인 문인들을 볼 기회는 여러 번 있었으나 미국 시인들을 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U.C.버클리에 오면 반드시 만나야 할 시인이 미국에서 계관시인을 역임한 로버트 하스(Robert Hass) 교수이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대학원 시창작 워크숍(Poetry Writing Workshop) 강의에서였다. 그 강의는 사전에 하스 교수가 학생의 작품과 강의신청서를 받아 심사하여 승인을 받은 학생만 수강할 수 있는 강의여서 수강하는 대학원생들의 자긍심은 남달라보였다. 직접 하스 교수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는 한 번만 허락되었다. 수강 학생은 13명이었는데, 1시간 30분 동안 3명의 학생이 창작시를 발표하고 하스 교수와 학생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수강 학생은 대부분 백인이었지만, 동양인과 인도계 학생도 있었다. 하스 교수는 주로 학생들의 의견을 듣는 편이었지만, 간간이 형식(form), 어조(tone), 현실감(reality) 등을 언급하면서 자상하고 화기애애하게 수업을 이끌었다. 클레어유 교수의 소개로 리처드 실버그(Richard Silberg) 시인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허름한 차림에 오래된 고물차를 타고 다니며 하루에 두 끼만 채식으로 먹는 노시인이다. 특히 고은 시인에 대해서 흥미를 갖고 있었다. 반문명적이고 종교적인 풍모, 가난한 생활 자체가 시인으로서의 체취를 몸으로 느끼게 했다. 아쉽게도 네이티브 스피커인 한국 이민 2세대 문인들은 만나지 못했다. 리 헤릭은 그들과는 다른 시인이지만, 그의 시적 에너지도 상실된 한국인의 뿌리에서 온다. 그는 한국어를 말할 줄 모르면서도 한국에 대해 무엇이든 알고 싶어 했으며, 특히 한국 현대시를 읽고 싶어했다.

U.C.버클리를 졸업하고 국내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한 방문학자는 10년 만에 방문한 모교가 많이 바뀌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보니 학교 건물이나 주변의 상가는 물론이고 교수나 식당 주인까지 옛날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어서 놀랐다고 한다. 10년이 지나도 강산은 물론 가게 하나 변하지 않는 미국의 모습은 안정적이고 낙관적인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국 서부는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바로 광활한 원시의 사막과 만난다. 햇빛과 돌과 모래만으로도 너무나 환상적이고 다양한 풍경의 매력은 그것이 전혀 개발되지 않아 원시적인 힘을 잃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늘 들어서 아무렇지도 않았던 ‘우리의 일 년은 세계의 십 년’, ‘다이내믹 코리아’ 같은 말들이 거기서는 아주 이상하게 들렸다. 우리 사회는 누구나 다 젊어지지 못해 안달이 나 있지만, 미국에서는 염색하거나 짙은 화장을 해서 젊게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을 본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백발이나 주름살조차도 그 사람의 매력이고 인격이라는 느낌이 든다. 젊은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보다 전통에 대한 관심이 큰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