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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빌렘 플루서의 『사물의 상태에 관하여』

7년여의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내 나이는 마흔이었다. 미술가로서 작업만 하며 살아갈 방법은 없었다. 나는 가장이었고, 학생이라는 이유로 생활인의 의무를 감면받았던 시간은 지나갔다. 슈투트가르트미술학교의 목공실 마이스터였던 슐츠 선생에게서 나무 다루는 기술을 배웠으므로 작은 목공소를 하나 차리면 어떨까도 생각해보았다. 목수로서 동네사람들에게 책꽂이나 문짝 같은 것을 만들어주면서 한쪽에서 내 작업을 계속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 낭만적인 아이디어는 현실성이 전혀 없었다. 가구들은 공장에서 만들어졌고 목공소들은 문을 닫았다.

결국 전에 다니던 신문사 출판국에 전문위원이라는 이름으로 이틀씩 나가게 되었다.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따로 할 일이 없었고 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차들이 살벌하게 내달리는 낯선 8차선 도로들 앞에 서서 나는 종종 방향감각을 잃었고,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혹은 기다리지 않으면서 대낮에도 침침한 다방 같은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가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야 할 때가 많았다. 서울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느낌, 오래전 고향이었던 곳에 돌아와 이방인으로 떠돌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그것은 유학시절 줄곧 나를 따라다녔던 느낌이었다.

  불안하고 고독했던 그 95년에 내가 붙들고 있었던 것이 빌렘 플루서의 책들이었다. 『사물의 상태에 관하여(Vom Stand der Dinge)』, 『제스처(Gesten)』, 『유태인이라는 존재(Jude Sein)』 같은 그의 책들은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독일에서 미술가들에게 인기 있는 저자였다. 미술전문서점에는 그의 코너가 있었다. 귀국해서 언젠가 한가할 때 읽어보겠노라고 구해온 그 책들을 나는 서울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넘치도록 많았고, 나는 그것을 앞날에 대한 걱정이 아닌 무언가로 채워야만 했다. 그의 글들은 경이롭고 매혹적이었다. 숙명적인 이방인으로 살았던 플루서의 생애와, 정통학계의 권위적 관습을 넘어서는 글쓰기에서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나는 그에게서 위로 받았고 용기를 얻었다.

  플루서의 삶은 파란만장한 망명객의 삶이었다. 독일계 유태인으로 1920년 체코 프라하 태생인 그는 18세의 나이로 나치의 학살을 피해 런던을 거쳐 브라질로 망명했다. 그의 일가친척이 모두 수용소에서 죽었다. 상파울루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60년대에 모교의 커뮤니케이션 이론 교수가 되었다. 신문 칼럼니스트로서도 명성을 얻었던 그는 70년대에 브라질 군부독재의 손길을 피해 또 다시 망명길에 오른다. 프랑스 시골마을에 정착해 저술과 강연활동을 하며 미디어 이론가로서 이름을 알리지만, 말년까지 고향 프라하를 방문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1991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프라하를 찾았던 그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플루서를 읽기 시작하면서 곧 나는 짧은 에세이들로 이루어진 문고판인 『사물의 상태에 관하여』를 다방 구석에 앉아 대학 노트에 깨알 같은 글씨로 번역했다. 출판을 할 계획이 있던 것이 아니었다. 이런 책을 내줄 출판사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건 들뢰즈도 라캉도 아니었으니까. 그야말로 그것밖에는 내가 달리 할 일이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러면서 나는 급속히 플루서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현상학과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방대한 지식을 토대로 하는 그의 명철하고 유연한 사유는 그 이후 내가 세상과 미술을 바라보는 방식에 결정적인 각인을 남겼다.

  그 이듬해 말 나는 미술학교에 자리를 얻었다.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서울에 ‘연착륙’을 한 셈이다. 조금 더 여유를 갖고 틈틈이 그의 책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후 몇몇 번역자들에 의해 『사진의 작은 철학을 위하여』, 『디지털시대의 글쓰기』 그리고 『피상성 예찬』 같은 책들이 나왔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도 플루서라는 이름은 소수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만 유효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sein), 어떠해야 하는지(sollen),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wie)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썼다. 나는 이 말을 오늘도 되새긴다. 나의 생각과 글들이 그에게서 많은 것을 빚지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