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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인간에 대한 통찰이 담긴 손바닥 안의 작은 이야기”― 히라노 게이치로(平野啓一郞)와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들과의 좌담

* 히라노 게이치로(平野啓一郞)

소설가. 1975년 일본 아이치 현에서 태어났다. 명문 교토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 1998년 문예지 『신조』에 투고한 소설 『일식』이 권두소설로 전재되고, 이듬해 이 작품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최연소로 수상하며 화려하게 일본문단에 부상했다. 해박한 지식과 화려한 의고체 문장으로 중세 유럽의 한 수도사가 겪는 신비한 체험을 그린 『일식』은 '미시마 유키오의 재래(再來)'라는 평과 함께 40만 부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9년 메이지 시대를 무대로 젊은 시인의 탐미적인 환상을 그려낸 두번째 소설 『달』을, 2002년 19세기 중반 파리를 배경으로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 대작 『장송』을 발표했다. 젊은 남녀의 성(性)을 세심한 심리주의적 기법으로 파헤친 단편집 『센티멘털』(원제 다카세가와, 2003)부터는 현대 일본으로 작품의 배경을 옮겨왔다. 이후 전쟁, 가족, 죽음, 근대화, 테크놀로지 등 현대사회의 여러 테마를 심화된 의식으로 다룬 단편집 『방울져 떨어지는 시계들의 파문』(2004)과 인터넷 성인 사이트를 소재로 삼아 현대인의 정체성을 파헤친 『얼굴 없는 나체들』(2006)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섬세하고 날카로운 시각과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기법을 구사하는 대표적인 젊은 작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산문집과 재즈 대담집을 내고 건축잡지의 편집을 맡는 등으로 회제를 모으고 있다.

교토대 재학 중에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 『일식』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최연소로 수상하고 '미시마 유키오의 재림'이라는 찬탄을 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일본의 대표적인 젊은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33). 문학기행에 나선 제6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들이 그를 지난 22일 도쿄에서 만났다. 의고체 문장으로 중세유럽의 한 수도사의 신비한 체험을 그린 『일식』에서부터 인터넷 성인사이트를 소재로 현대인의 정체성을 천착한 『얼굴 없는 나체들』에 이르기까지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기법으로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해온 히라노의 작품세계와 오늘날 젊은이의 글쓰기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채림(시 부문 당선자), 오성용(소설), 이주영(희곡), 정상현(시나리오), 노대원(평론), 김해등(동화) 씨 등 6명의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가들이 함께 했다.

- 막 문학의 길을 시작한 입장에서 젊은 나이에 독특하고 탁월한 문학세계를 구축한 선배 작가와 이야기 나눌 기회를 얻게 되어 기쁘다. 1998년 발표한 『일식』은 대학 시절 처음으로 낸 소설인데도, 매우 심오한 주제를 담고 있다. 어떤 경험과 사유가 중세 시대 유럽에 관심을 두게 한 것인가?

  "아버지가 한 살에 돌아가셔서 어릴 적부터 사람의 삶과 죽음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가톨릭 재단의 중학교를 다니면서부터 기독교에 대해 사유할 기회가 많았다. 중세에는 마녀 재판이 있어 신앙을 심판하고 처형하기도 했다. 바꿔 말하자면, 악인을 만들어내 자신들의 신앙을 확인했던 것이다. 90년대 후반 이래로는 일본 사회가 적대시하고 있는 옴진리교와 살인하는 십대 청소년들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일본 사회에서는 타자를 이해하자고 하면서 그들을 적대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자신을 공격하는 타자에 대해서 그렇다. 이는 중세 유럽과 현대 일본의 유사점이다. 이것을 소설로 써보고자 했다."

- 『일식』은 장중한 의고체 문장으로 화제와 논란이 되었다. 소설의 문체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후 일본 소설의 문체는 가볍고 자유로워졌다. 하루키는 미국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일본 문학에 새로운 문체를 도입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 문학 전체가 가벼워지고 언어의 가능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어려운 한자를 쓰지 말라고 교육한다. 하지만 나는 풍부한 표현이 가능한 한자로 새로운 문체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밝은 문장으로는 무거운 죽음에 대해 쓸 수 없고, 연애를 그리는데 무거운 문체를 쓸 수는 없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면성을 모노톤의 단조로운 문체로는 표현해내기 어렵다. 현대인의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여러 문체의 사용이 필요하다."

- 세 번째 소설 『장송』 이후의 소설들은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젊은이들의 생활과 고뇌가 담긴 이 소설들에는 당신의 삶과 가까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소설의 배경으로 과거를 택하는 경우와 현대를 택하는 경우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현대작가이므로 현대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이 깊다. 그런데 옛날 문제들을 보면 지금도 계속되는 것도 있고 달라진 것도 있다. 결국 과거 일을 돌아보면 지금 일이 훨씬 더 잘 보이게 된다. 그래서 과거와 현대의 문제를 항상 같이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현대의 문제를 다루는 소설을 쓰는 게 더 즐겁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것도 있고(웃음)."

- 젊은 남녀의 성문제를 세심한 심리주의적 기법으로 기술한 단편집 『센티멘털』의 전위적이며 독특한 형식이 인상적이었다.

  "남녀 간의 연애는 열 명이 쓰면 열 가지 방식으로 쓸 수 있다. 그러나 기존 소설에서는 현존하는 패턴 안에서만 그리려고 하는 게 아닌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형식으로 그려보면 더 효과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예를 들어, 「다카세가와」에서는 두 가지 서사가 동시에 교차되어 서술된다. 독자들이 더 자유롭게 읽을 수 있으리라 본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동일한 페이지를 읽는 네티즌들이 링크와 링크를 따라 서로 다른 지점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듯이, 앞으로는 더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 나오리라고 본다."

-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고, 작가는 그 이야기를 시나 소설, 영화처럼 특정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당신은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소설은 당신이 '이야기'를 만드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는 시 보다는 소설이 적성에 맞는다. 소설은 말 그대로 작은 이야기이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세계 각국의 정보를 볼 수 있고, 여행도 자유로워서 세상이 얼마나 큰지 실감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작인 『죄와 벌』 역시 손바닥에 들어가는 작은 이야기이다. 그 안에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고, 그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당신은 ‘작가는 사회와의 이질감, 모순, 문제점을 표출하는 존재’이며 작가란 이질감으로 인해 '고독'을 느끼는 독자에게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동지를 만들어준다고 했다. 그 마음, 그 고독을 느끼는 지점에서부터 글로 옮겨지는 과정이 궁금하다.

  "누가 '네 마음을 잘 안다'고 말해주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다 알까'하고 느낄 때가 있다. 이럴 때, 소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글쓰기의 출발점이다. 19세기 근대 문학은 신문 연재를 통해 발달하였다. 그 당시 특정 신문의 독자는 비슷한 신분과 지위, 교양, 사상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독자는 신분과 지위, 교양이 매우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 그래서 난해하게 소설을 쓰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말로 써야 잘 전달할 수 있을 지 고민하고 있다.

- 많은 독자들을 끌어안고 싶다는 말로 이해된다. 하지만 자신이 쓰고 싶은 것과의 괴리가 생길 수 있을 텐데.

  "소수의 독자만이 찾는 소설가가 되고 싶지는 않다. 예전에는 1년에 100만 부가 팔리고 그 후엔 아무도 안 읽는 소설보다는 1년에 10만 부가 팔려도 지속적으로 독자들이 찾는 소설가가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1년 안에 10만 부가 팔리는 소설을 쓰지 못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소설가가 되고 만다. 오락적인 소설은 많이 나가는데, 본격문학 작가는 금방 사라져버린다. 많은 독자들이 찾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고심하고 있다."

- 요즘 일본에서는 엄지소설, 이른바 휴대폰 소설이 폭발적인 인기라고 들었다.

  "그렇다. 1천500만 명이 읽은 휴대폰 소설이 나올 정도다. 그 전까지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독자층은 주로 여고생들이고, 주제 역시 이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내용이다. 이들이 나중에는 문학을 읽게 될 테니 괜찮다는 의견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런 소설만 읽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그렇지만 반드시 종이로 된 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널리 퍼지고 있다. 앞으로는 문학을 종이가 아닌 휴대폰이나 닌텐도 DS와 같은 휴대용 멀티미디어기기로 읽는 경향이 더 늘어날 것이다."

- 올 가을 서울에서 한국, 일본, 중국의 문인들이 함께 하는 ‘한일중 동아시아문학포럼’이 처음으로 열린다. 당신은 일본 측 조직위원으로 참여한다고 들었다. 이밖에도 다양한 국제문학교류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데,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가?

  "예전에 파리에 1년 거주한 적이 있고,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등과의 해외문학교류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과거를 보면 현대의 문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외국을 보면 일본의 문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한국의 젊은이들은 지금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면서 취직난과 비정규직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김애란과 정한아 같은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이런 문제를 소설로 쓰고 있다. 일본 젊은이들의 고민은 무엇이며, 작가들은 어떻게 소설로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졸업한 2000년 당시에도 일본 경제가 어려웠고 취직 역시 힘들었다. 우리 세대는 개성 있는 직업을 가지라고 배워왔고 그런 직업을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젊은이들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전후(戰後)에는 국가 재건이라는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본 사회가 그런 대로 풍요롭고 복잡하니까 어떤 사회적 문제가 있어도 내가 그 문제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어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당시에 등단했던 작가들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 문학의 종언'을 선언했다. 그 징후의 하나로 든 예가 작가 지망생들이 작가적 경험이나 통찰보다는 창작코스를 이수해서 작가가 되는 것이고 이는 전세계적 경향이다. 우리들 역시 모두 예술대학이나 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당신은 대학에서 문학이 아닌 법학을 전공했는데, 이러한 경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오늘의 마지막 질문이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시대부터 대학이 아닌 소설가의 집에 살면서 창작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은 개인지도에서 대학 교육으로 옮겨가는 중인데 일본의 문예창작학과 설립은 최근의 일이다. 그래서 교육 시스템으로서의 문창과가 어느 정도 창작에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문창과에서는 문학의 역사를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문학 교육이 아닌 다른 경험으로부터 글을 써나가는 사람들을 흥미있게 여기고 있다. 내가 다닌 교토대학교 법학부에는 법학과 정치학 전공이 있었는데 나는 소크라테스에서 자크 데리다에 이르는 정치사상사를 공부했다. 그래서 문학 공부를 병행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고 작가적 성찰에 도움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