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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에서 3백년을 호젓이 피어있던 꽃― 나고야의 호사문고에 소장된 『삼국유사』를 찾아

  극적인 운명을 타고 난 한 권의 책이 있다. 나는 이 책을 보러 지금 일본의 나고야로 가고 있다.

  집필이 끝나고 제 주인의 손을 떠나기로는 13세기 후반, 어느 눈 밝은이가 경주 관아의 작은 창고에 묻어둔 판본을 꺼내 손질하고 새로 인쇄하기는 16세기 중반, 그 중 한 권이 임진왜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제 땅을 떠나 이역만리 바다 건너가 새 집에 들기는 17세기 초반, 그곳에서 근대식 활자로 다시 태어나기는 20세기 초반.

  제 땅을 떠난 뒤로 제 땅에서 까마득히 잊혔고, 이국땅에서 다시 태어난 20세기 이후에야 제 땅의 사람들에게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한 책.

  이 극적인 운명의 책은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이다.

  정녕 우리 역사를 지식인의 역사에서 민중의 역사로, 사대의 역사에서 자주의 역사로 바꿔놓은 것이 『삼국유사』이다. 우리 문학을 지식인의 문학에서 민중의 문학으로, 사대의 문학에서 자주의 문학으로 바꿔놓은 것이 『삼국유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땅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 또한 『삼국유사』이다.

  평가는 20세기에 들어서서야 내려지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1904년, 도쿄제국대학의 ‘문과대학 사지총서’의 하나로 출판되면서이다. 나는 이를 ‘1904년 삼국유사’라 부른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저들은 『삼국유사』를 출판했단 말인가.

  이제 그 까닭의 실마리를 찾아 떠난다. 나고야시립 호사문고(蓬左文庫)가 바로 그 곳이다.

▲ 나고야에 있는 호사고문의 정문. 도쿠가와 미술관과 함께 있다. © 운영자

1904년 도쿄제국대학의 삼국유사

  도쿄제국대학은 근대 일본의 고급관료와 학자를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본디 도쿄대학이었다가, 제국대학이라 불린 것은 1886년 ‘제국대학령’이 만들어지면서이다. 서양의 근대가 곧 대학이 가져다 준 선물이기도 했음을 그들은 잘 알았다. 도쿄제대야말로 근대 일본을 이끌어갈 대학으로 그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물론 대학의 이름에 붙여진 ‘제국’이라는 단어가 못내 걸린다.

  근대 일본은 다만 일본에 그치지 않고, 근대가 곧 제국을 만들어 줄 것이며, 동아시아의 패권을 자신의 손에 넣을 것이라는 야망 속에 자라나고 있었다. 역사는 그것을 ‘후발제국주의 일본’이라 부른다.

  이런 도쿄제대에 국사학과가 설치된 것은 1889년의 일이었다.

  제국대학이 설립된 이듬해, 곧 1887년 독일의 역사가 루드비히 리스(Ludwig Riess)를 초청하여 사학과를 설치하였고, 이듬해에는 메이지 정부의 수사국(修史局)을 대학으로 이관하여 놓는다. 여기서 그들은 ‘대일본사’라는 이름의 통사를 쓰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이듬해에 일본사만 독립시켜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국사학과를 설치한 것이었다.

  국사학과가 만들어진 2년 뒤, 곧 1891년 쓰보이 구메조(坪井九馬三)가 교수로 취임한다. 쓰보이는 자신의 스승 리스의 영향으로 유럽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신진기예였다.

  그러나 대학에는 학생들을 가르칠만한 변변한 교재 하나 없었다. 이제 겨우 발걸음을 뗀 처지이니 당연했다. 독일풍의 역사교육을 받고 온 쓰보이는 무엇보다 강독 교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것은 철저히 실증적 사학을 중시하던 독일 사학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쓰보이는 한문의 대가 구사카 히로시(日下寬)를 강사로 불러들였다. 그들은 이제 막 끝난 도쿠가와 막부의 에도시대를 정리할 사료를 총서로 간행하기로 하고, 도쿠가와 집안의 협조를 얻어 『마쓰히라기(松平記)』와 『이에타다일기(家忠日記)』를 먼저 낸다. 두 책이 모두 에도시대 초기 역사를 보여주는 사료이다. 1897년, 쓰보이가 교수로 취임한 지 6년만의 일이었다.

  이 ‘도쿄제대 사지총서’는 매년 한 권씩 간행을 계속하는데, 시작한 지 7년만인 1904년, 총서의 아홉 번째 책으로 『삼국유사』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바로 ‘20세기 삼국유사 재발견’의 도화선이 된 책이다.

  이 총서는 1913년까지 16권으로 이어지는데, 특히 『삼국유사』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은 각별하였다. 거기에는 그들 나름의 고민이 있었다. 이미 조야(朝野)에서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 같은 주장이 나와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 정책을 세워나가는 판에, 『삼국유사』가 보여주는, 자기네 조상보다 앞선 단군조선의 존재를 어떻게든 ‘처치’해줘야 할 게 아닌가. 관심의 속내는 분명 여기까지 닿아 있었으리라.



두 세트의 총서와 삼국유사

  그렇다면 쓰보이와 구사카는 『삼국유사』를 어떻게 알고 이 총서에 집어넣었던 것일까. 한국에서조차 종적을 감추어버린 책이었는데 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잠시 돌아가야 할 길이 있다.

  여기 또 다른 세트의 총서가 있다. ‘황실에 빌려드린 서적’이 바로 그것이다. 1624년 도쿠가와 막부 아래의 오와리번(尾張藩)에서 궁중의 고미즈노(1611-1629) 천황에게 빌려준 32종 한 세트이다.

  오와리번은 지금의 나고야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그의 아홉 번째 아들 요시나오에게 나고야의 번주를 시키고, 죽으면서 책을 비롯한 중요한 유품을 물려주었다. 1616년의 일이었다. 이것이 나고야 시립 호사문고의 모태인데, 일찍이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중 조선에서 가져온 책을 도쿠가와에게 바쳤던 바, 『삼국유사』도 여기에 들어 있었다.

  문고가 생긴 8년 뒤, 황실에 빌려준 서적 세트 32권의 목록을 살펴보면, 조선의 책이 무려 3분의 1 넘게 차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 열 번째가 『삼국유사』이다.

  이상, 위에서 소개한 두 세트의 총서에 공통되는 점이 두 가지이다. 하나는 ‘황실에 빌려드린 서적’은 말할 나위 없지만, ‘사지총서’ 또한 도쿠가와 집안에서 나온 일기 자료가 중심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두 총서에서 유일하게 겹치는 책이 하나 있는데, 바로 『삼국유사』라는 점이 그것이다.

  『삼국유사』는 어쩌다 두 세트에 모두 들게 되었을까? 일본에서 이 두 세트는 각각 에도시대와 유신시대를 상징할만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 총서를 조사해나가면 나갈수록 나는 이들이야말로 『삼국유사』의 전승과정과 재발견의 계기를 설명해 줄 중요한 고리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둘을 함께 놓고 보면 거기서 분명한 이유가 밝혀진다는 것이다.

  도쿄제대 사지총서 『삼국유사』의 서문에서 편찬자는 간다본(神田本)과 도쿠가와본(德川本)이 그 저본이라 밝히고 있는데, 이후 간다본은 행방불명되었으나, 정체가 확실한 도쿠가와본은 다름 아닌 지금 나고야의 호사문고에 보관된 그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책은 황실에 보내져서 천황도 읽었다.

  꺼져가던 생명을 다시 피운 책 ‘1904년 삼국유사’.

  이로 인해 『삼국유사』는 일거에 한국의 고대사와 고대문화를 이해하는 거의 유일한 책으로 돌출했다.

나고야에서 만난 삼국유사

  황실에 보내진 책, 그리고 제국대학 역사교재로 만들어진 책 『삼국유사』.

  둘 사이에는 뭔가 떼려야 뗄 수없는 관련이 있어 보인다. 나는 호사문고에서 『삼국유사』와 그 관련 자료를 살펴보고 이런 생각을 놓칠 수 없었다.

  내가 처음 나고야에 가본 것은 2006년 10월이었다. 대구 KBS와 함께, 일연 탄생 80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우리는 나고야에 가서 꼭 찍어야 할 장면이 하나 있었다.

  호사문고의 『삼국유사』 원본――.

  원본이라고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일연 스님이 살아있을 때가 아닌 조선조 중종 임금 때 와서 찍은 책이고, 같은 종의 원본이 국내외에도 십여 군데 남아 있기는 하다. 그런데도 호사문고의 『삼국유사』가 매력적인 것은 단 한 가지. 앞서 밝힌 것처럼, 언제 어떻게 얻어 어떤 경로로 전승되었는가를 확실히 안다는 점이다.

  호사문고의 담당 학예사는 고개를 몇 차례 숙이며 인사를 나눈 다음, 귀중서고에서 『삼국유사』를 받들고 나왔다.

  나에게는 작은 떨림이 일었다. 400여 년 전, 포로 아닌 포로로 끌려온 우리 책, 『삼국유사』를 내 눈으로 처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왜 아니 떨리겠는가.

  책은 너무나 잘 보관되어 있었다. 좀 하나 슬지 않았다.

  기실 패전의 퇴로에 정신없이 챙겨 넣었을 것이다. 어떤 책인지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조선 것이면 무엇이든 귀중하니 쓸어 담으라는 명령에 따라 우연히 『삼국유사』도 끼였을 뿐, 비바람 맞으며 지친 걸음 속에, 권력이 무엇인지 전쟁이 무엇인지, 애꿎게 끌려나와 겨우 목숨이나 부지하고 돌아가는 원망 섞인 어느 병사의 등짐 속에 섞였을 것이다. 아니, 거꾸로 생각해 보자. 보쌈 당해 가는 여자의 심정이 그랬을까, 『삼국유사』 또한 제 운명의 앞날이 어떨지도 모르는 먼 길, 영문 없이 실려 갔을 것이다.

  그리고 400년, 나는 보쌈 당해 간 옛 우리 마을 아가씨를 만나는 심정이었다. 비록 세월에 바랜 색깔일지언정, 그것이 도리어 아련해 보이는, 곱게 늙은 아가씨였다.

  그래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고운 얼굴이 옛 모습을 고스란히 전해 주고 있었으므로.

  나는 시계를 풀었다. 자칫 시곗줄에 걸려 책이 손상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손목에서 시계가 풀려나가는 순간, 나는 현실의 시간이 아닌 아득한 세월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400년이라면 그럴 만도 하겠다. 같이 온 카메라맨은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나를 찍었다. 나는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삼국유사가 소중히 다뤄진 이유

  촬영을 마치고 나오는데 학예사가 자료를 몇 가지 챙겨주었다. 주로 호사문고를 소개하는 팸플릿이었다. 나는 이때까지도 물 건너온 『삼국유사』를 다시 본 것만으로 감격에 젖어 다른 생각을 미처 못 하였다.

  일행은 교토로 향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나는 무심코 학예사가 건네주었던 팸플릿 하나를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었다. 『호사문고 ―역사와 장서』였다. 조선에서 가져온 다른 책들, 이를테면 『악학궤범』『고려사』 등이 선명한 컬러사진으로 찍혀 소개되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삼국유사』는 없었다. “왜 빼놓은 거야, 더 중요한 책인데….”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다, 문득 38쪽에서 눈길이 멎었다.

  거기에는 ‘황실에 빌려준 서적의 메모’라는 제목을 단 사진이 실려 있었다. 1624년, 호사문고가 궁중에 32종의 책을 빌려주었을 때의 목록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 때 처음 알았다. 궁중에 책을 빌려주기도 했었구나, 그러면서 나중에 돌려받자고 목록까지 만들었군, 대단한 친구들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적힌 책 제목들을 하나하나 읽다보니, 뜻밖에도 열 번째에 ‘삼국유사’가 보였다.

  어라, 『삼국유사』를 궁중에 빌려주었단 말이지. 나에게는 순간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 과정을 철저히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그 후 1년 남짓, 관련된 자료를 샅샅이 뒤진 다음, 아직은 조심스럽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궁중으로 간 32종 한 세트는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망하는 날까지 나고야의 호사문고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천황이 본 책이니 더 말해 무엇 하랴. 호사문고는 300여 년간 부정기적으로 소장도서 목록집을 만들어 지금 20여 종이 남아 있는데, 『삼국유사』 밑에는 반드시 “궁중에 빌려드렸다가 돌려받은 책”이라는 메모를 빼놓지 않고 적어 넣었다. 에도시대의 사료를 찾아 헤매던 도쿄제대 국사학과의 교수 쓰보이 구메조도 이 때문에 쉬 눈길이 머물렀으리라. 『삼국유사』라는 낯선, 그러나 한국의 역사를 매우 특이하게 전해 주는 이 책을 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겠다.

  서고에서 소중히 취급되던 책이 근대적 안목을 지닌 학자의 눈에 띄어 햇빛을 보게 된 과정을 지켜보자면 놀라움과 아쉬움이 겹쳐진다. 오늘날 우리가 민족 최고의 고전이라 떠받들어마지 않는 『삼국유사』의 ‘생환’에 깔린 그림자는 우리 것이 아닌 까닭이다.

  혼자 300년을 호젓이 피어있었을 꽃의 그 향기만이 우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