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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교육으로서의 영어교육과 천자문

영어교육이 일세를 풍미하는 화제 거리가 되었다. 전 국민이 6년 동안 영어를 배우고도 영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것을 보면 영어교육에 여러 모로 반성해야 할 점이 있다는 데는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외국어 학습열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멀리 7세기의 서학 풍조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현상이다. 1395년 11월에 예문 춘추관 대학사 정총이 조선왕의 자격을 인정하고 조선왕의 도장을 달라는 글을 가지고 중국에 갔다. 그 글을 본 명나라 태조는 문체가 경박하고 문법에 맞지 않는 글이라고 하면서 정총을 가두고 글을 지은 정도전을 잡아 보내라고 하였다. 1396(태조5)년 2월에 조선 정부는 “가만히 살펴보건대, 저희 나라는 바다 밖 궁벽한 데 거하여 말소리가 중국과 같지 않아 반드시 통역에 의지하여 겨우 말의 뜻을 익힙니다. 어찌 감히 고의로 희롱하고 모욕하여 트집의 실마리를 일으켰겠습니까?”(『태조실록』권10, 장97)라는 글을 올려 사죄하였다. 1397년 3월에 명나라 태조는 “이후로는 중국말을 아는 사람만이 사신으로 와야 하며, 깊이 생각하고 두고두고 염려하여 문사(文詞)로 화를 얽지 말라”(『태조실록』권11, 장102)고 지시하였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영어 학습은 어떤 면에서 우리나라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국가 존립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국 사람들에게 우리말을 배우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은 만큼 우리가 영어를 배우지 않을 수 없다. 영어는 석유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자원인 것이다. 좀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관찰해 보아도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현대사회의 상류계급출신이고,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대체로 특권적인 신분이므로, 이러한 삶들이 여타의 사회 성원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작용할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신분상승의 기회를 균등하게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에 영어교육을 국민교육의 일환으로 강화하겠다는 제안에 반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전 국민에게 영어를 가르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으나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국민교육으로서의 영어교육은 어느 수준까지 영어를 가르치는 것일까?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쏟아 붓는 사교육비를 이대로 방치해야 할 것인가?

서울대학교 영문과의 이성원 교수가 일본에서 10년 동안 영어 회화를 가르친 영국인 교수를 만나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준 적이 있다. 처음에 일본에 와서 영어 회화를 가르치라는 말을 듣고 영어회화라는 교과의 교육내용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서 그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하기 듣기 읽기 짓기 가운데 말하기를 강조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일본에서 다른 교수들이 하는 관례에 따라 학습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가 일본에 와서 살면서 놀란 것은 도처에서 어린 학생들이 그를 보면 무슨 말을 걸려고 애를 쓰는 것이었다. 어디 가나 누가 와서 “어디서 왔느냐” “날씨가 좋다”등의 말을 건네고 나서 말을 받고 이야기를 계속하려고 하면 휑 하니 가버리곤 해서 처음에는 무례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기분 나쁘게 여기기도 했으나 차차 만성이 되어 외국인을 대하는 일본 사람들의 습관이로구나 하고 체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가마쿠라의 어느 절에 가서 특이한 사원 건축 양식에 흥미를 느껴 곁에 있는 젊은 스님에게 말을 걸어 보았는데 그 스님이 서투른 영어로 정성껏 설명을 해주어서 서로 거의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이성원 교수에게 일본 와서 10 년만에 처음으로 영어회화를 해보았다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 국민교육으로서의 영어교육은 말이 통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유창함에는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제학회에 가보면 한국인들은 영어를 꽤 잘 하는데도 자신 없게 발표하고 유럽 학자들은 영어를 잘못 하는데도 자신 있게 발표하는 것을 자주 본다.

교육의 현장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인은 학생과 교사와 교과서이다. 교사가 교과서를 학생에게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고, 학생이 교사에게 교과서를 배우는 것이 학습이다. 그러므로 교육 개혁에는 더 좋은 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며, 더 나은 삶을 향하여 함께 보색하고 실험하는 가르침과 배움의 현상학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교사와 학생이 일체의 독단을 피하면서 더 정직하게 행동하고 더 관대하게 사고하자는 데 교육의 목적이 있다.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를 만드는 돈이 텔레비전의 사극 일회 분을 만드는 데 드는 돈보다 적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학생이 잘 되고 교사가 잘 되는 것이 아니라면 교육 개혁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자는 것인가? 교육 개혁은 교사를 편하게 해주고 학생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교육의 주체는 두말 할 것도 없이 교사와 학생이지만, 이성적인 권위가 요구되는 교육 현장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무게의 중심은 교사의 편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과 기능과 태도의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는 학생이라고 해야 할 것이지만, 일정한 기간 학교에 몸 담았다 떠나는 학생에 비해 평생토록 학교에 몸담고 교육에 대해 오래 고민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교육 개혁의 중심은 교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교육방법을 설계해 놓지 않고 미국인을 선발하여 학교에 들여보내는 것도 내가 보기에는 교육의 직무유기다. 남해의 어느 고등학교에 간 캐나다인 교사가 현지의 영어교사들이 함께 수업을 하려 하지 않아 외톨이로 보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선생을 다 해보았기 때문에 교육 현장을 모르면서 교육 개혁을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한심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교사들이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객체로 전락한 듯한 요즈음의 교육 개혁은 실질의 개선이 아니라 형식의 변화에 치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극언한다면 학생과 교사 잘 되라고 하는 교육 개혁이 아니라 선거에서 학부모의 표 얻으려고 하는 교육 개혁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듯하다. 교육을 비판하는 정치가들의 언동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이 자신을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키워준 선생들을 그토록 모욕해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의문을 누를 수 없다.

영어 학습이란 지식의 학습이 아니라 피아노를 배우는 것과 같은 능력의 학습이다.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는 바이엘을 칠 때 피아노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운다. 그 후에 아이는 체르니로 나아가지만, 그것은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익힌 능력을 확대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흔히 문법이란 말을 쓰지만 영어 교육은 법조문의 체계를 가르치는 법학교육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영어 교육은 법조문이 아니라 준법하는 행동을 습득시키는 교육이다. 지식과 관련된 부분을 가능하면 줄이는 것이 영어 교육에 필요하다. 틀려도 결정적인 비문이 되지 않는 규칙은 가르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국인이 쓴 영어를 미국인이 알아들을 수 있으면 합격으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나는 말과 문화를 함께 가르치는 데도 찬성하지 않는다. 개인과 개인이 깊이 있는 교제를 가질 경우에는 문화와 관습의 차이를 초월하는 보편 도덕―정직과 관대에 의존하면 된다. 인간에게는 보편 문법이 있듯이 보편 도덕도 있다.

6세기에 처음 나와 19세기까지 동아시아의 기초 한문 교과서로 사용되어온 『천자문』은 어쩌면 지금도 영어 교재 편찬에 참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는 네 살에서 다섯 살 사이의 어린이들에게 『천자문』을 외우게 하였는데, 이것이 피아노 교육의 바이엘 구실을 충실하게 해 냈다. 『천자문』을 외움으로써 어린이들은 천 자의 한자를 익혔고 여덟 글자로 된 125 개의 문장을 익혔다. 125 개의 문장은 여덟 개의 운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므로 어린이들은 한시를 짓는 데 도움이 되는 운의 작용에 대해서도 어렴풋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사회에서 『천자문』의 내용은 어린이들이 주위에서 늘 들어온 상식 이상이 아니었다. 현대의 용어로 바꾸어 분류한다면 대충 과학․역사․철학․예술․생활 등의 영역으로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영어, 영어 하고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천 개 정도의 기본 단어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교과서를 잘 만드는 것이 영어 교육의 시급한 과제라는 것이 나의 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