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대산문화
 
그녀의 향기를 훔치다
 

  오후 네 시. 도서관으로 향하는 계단 어느 즈음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는 도서관에 있고 그 바깥에 내가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기에 도서관 한 귀퉁이는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가. 그녀는 펜을 자근거리며 이국어를 번역하거나 책장들 사이를 걷고 있겠지. 그러다 문득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가로수를 보기도 할까? 나와 다른 각도에서, 내가 본 것을 그녀 또한 보았을까? 나는 저쪽의 그녀가 궁금하다.

  내 쪽 가까이에서는 제초기 소리가 가득하다. 짧게 잘려져 나간 이파리들에서 짙은 풀 냄새가 난다. 썩어가는 과일, 쓰러진 나무, 베어진 풀, 짓이겨진 이파리들. 죽어가는 것은 더욱 강한 향을 품는다. 그리고 하나의 감각은 여러 감각의 문을 연다. 코끝을 자극한 풀 냄새가 내 몸의 모든 감각을 자극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궁금해하고 있는 그녀와, 그녀와의 만남을 향해 펼쳐진 촉수다.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난다.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도 같고 전혀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약속시간까지는 한시간 남았다.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들을 수첩에 적기로 한다. 그러나 몇 줄 적지 못하고 제초기에 잘려진 풀냄새만 맡는다.  

  다섯시 정각. 그녀가 계단을 내려온다. 나는 그녀를 단박에 알아본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과 곧은 입매가 사진 속의 바로 그녀다. 계단을 딛는 그녀의 발걸음은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다. 나는 그녀를 보며 프랑스 영화의 한 장면 같아, 혼자 생각한다. 그녀의 기다란 옷과 짧은 머리칼 때문이었는지, 그녀가 멀리서부터 풍기는 독특한 향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약력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파리지엔이라는 단어도 막연히 떠올랐다.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다. 그녀의 웃음에 긴장된 마음이 조금쯤 누그러진다. 그녀는 도서관 일층에 있는 쉼터로 나를 인도한다. 나는 그녀의 성(城)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제 나는 염탐꾼이 된다. 이 만남은 '대담'이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그녀를 훔치고 싶으니까. 신입사원이 노련한 상사의 노하우를 염탐하듯, 풋내기 소매치기가 능숙한 선배를 따라 현장실습을 나가듯, 나는 알고 싶은 것이 많다. 그녀는 어떻게 소설을 쓰는지, 그녀에게 소설은 무엇인지,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무언지, 어떻게 번역을 하고 소설을 쓰고 가르치는 일을 다 소화할 수 있는지…… 그녀의 세간을 훔치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월담을 하리라.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그녀의 데뷔작이다. 데뷔작은 세상에 대한 작가 고유의 시선과 가위눌림, 장애물과 탈출구가 가장 잘 드러난 일기장과도 같다. 그리하여 작가 자신에게는 이정표이면서 동시에 덫인 첫 작품에는 한 작가에 대한 정보가 비밀스럽게 응축되어 있다. 내가 묻는다. 프랑스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고 불문과 교수로 지내시다가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어떤 부채의식 같은 것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오른다. 어눌하게 묻는데도 그녀는 내가 무엇을 훔쳐가고 싶은지 아는 눈치다.

  '이것을 들고 절벽으로 뛰어내리리라.' 그녀가 말한다. 나는 처음부터 되우 맞은 기분이다. 절벽에서 뛰어내릴 만큼? 80년 광주. 그녀는 거기 없었다. 그녀는 프랑스에 있었다. 그곳에 없었기에 그녀는 광주를 더 잘 알 수 있었다. 마치 지금 우리가 아프카니스탄이나 동티모르의 소식을 외신을 통해 자세히 보듯이, 나중에야 밝혀질 사실들을 그녀는 그곳에서 자세히 전해 들었다. 그녀에게 광주는 언젠가 풀지 않으면 안 되는 숙제처럼 남아 있었으리라. 그녀의 이야기는 70년대 초반 그녀의 대학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닫힌 교문, 책이 만들어지자마자 배포 금지되는 교지편집실, 수많은 비구조적 참여자들. 격양될 만도 한데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그것은 그녀가 견지하고 있는 전략적 무소속 때문이기도 하다. 언저리 의식. 전략적 무소속. 관찰자로서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현실을 더욱 명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녀의 소설 「회색 눈사람」, 「하나코는 없다」의 어조와 비슷하다. 쉽게 동요되지 않는 단단함을 그녀에게서 훔쳐본다.

  그 단단하고 야무진 어조는 그녀의 소설에 나타나는 문체나 일상생활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그녀는 '일상적인 시간의 상실'이 적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생긴 훈련의 결과다. 가족과 협상과정을 거쳐 일주일 정도 무주 어느 곳으로 숨거나 노트북만 들고 도서관을 찾는다. 무너지는 것, 앓게 만드는 것들이 있을 때에는 그것들이 수리될 때까지 기다린다. 하기 싫은 설거지나 빨래들을 먼저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그녀의 습관처럼 삶이 한 궤도에 올라서기까지 소설을 시작하지 않는다. 저도 계획표를 작성해야만 소설을 쓸 수 있어요, 사흘은 작업하고 이틀은 쉬고. 내 고백에 그녀가 좋은 방법이라고 칭찬해준다. 그녀의 칭찬에 나는 조금 으쓱해진다.

  나는 외국어를 두려워한다. 소설 쓰기가 힘들 때면 내가 언어에 대한 감각 자체가 모자라는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감마저 든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나마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는 것이 모국어를 제대로 쓰기 위한 어떤 방어막이라고 위안하곤 한다. 그녀에게 묻는다. 번역을 하는 일이 소설 쓰는 일에 해가 되지는 않는지. 그녀의 대답은 단호하다. 반드시 외국어에 대한 경험은 필요하다. 그것은 자기 언어를 비출 수 있는 귀찮은 거울과도 같다. 외국어에 대한 경험은 오히려 자신의 언어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해준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절망한다. 명명되는 많은 이름들을 자주 잊어버리고 어휘력도 부족한 내게는 질타처럼 들린다. 내 속을 알았는지 그녀가 다시 나를 쓰다듬는다. 그녀도 영화제목이나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해내지 못한다고, 하지만 어떤 정황이나 분위기를 재현해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번역은 그녀에게 참으로 중요한 휴식이다. 부담 없이 언어와 노닐 수 있는 시간이 번역하는 동안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국문학도로서 느꼈던 프랑스에서의 충격. 그녀는 스스로 10년을 부과했다. 10년 동안 그녀는 우리 소설들을 불어로 옮기는 데 전념했다. 그리고 나서야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소설 『꽃잎』도 번역했다. 그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번역하는 일은 만족스러웠을까? 모든 작품은 미완성이 아니겠느냐고. 소설에는 늘 허점이 있으며 번역을 하다보면 그 허점이 보이기 마련이고 고치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기에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고 고백한다.

  최근의 그녀 소설에 대해 묻는다. 나는 그녀의 소설에서 독특한 환상을 본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 지점에 대해서 요즈음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살다보면 환상 이상으로 환상적인 어떤 지점이 있다. 모든 종류의 인상의 계산들, 구조들이 무화되는 어떤 부분. 그것은 '여성성'이 포착하고 있다. 우리 문학 속에서 아직 건져지지 않은 그 어떤 부분을 환상과 여성성에서 본다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고민해야겠다고 마치 새로운 과제를 받은 아이처럼 눈빛을 밝힌다.

  해가 뉘엿뉘엿 질 즈음 우리는 자리를 옮겨 저녁식사를 했다. 그녀는 소식(小食)을 한다. 어디에서든 그녀의 절제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녀의 소설은 직접적으로 드러내놓고 소리치지 않는다. 그녀 역시 좀처럼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사라지고 높낮이가 다채로운 그녀의 목소리와 목소리 끝에 향기만 묻어난다. 그녀의 향기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동시에 완숙의 미를 담은 바람꽃의 향기이다. 애초부터 내가 그녀를 훔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아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를 붙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다. 맵기도 하고 보드랍기도 한 손, 단호하면서도 너그러운, 습작시절 그렇게 닮고 싶었던 소설을 쓴 그 손. 그 손을 붙들고 있으면 그녀의 향기가 내 손으로 전해질 것 같았다. 아니면 그녀가 가진 것을 손을 통하여 전이되기를 꿈꾸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녀를 만나는 내내 내가 얼마나 부풀어올랐는지. 다음에 만나면 그녀의 손을 잡아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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