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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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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 누가 한국에 살면서 이룬 보람있었던 일들을 꼽으라면, 나는 대학의 강단을 통해 많은 한국인들과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이룬 것을 으뜸으로 꼽을 것 같다. 특히, 강의실 밖에서의 대화를 통해 학생들의 개인적인 고민을 듣고, 내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해서 어떤 긍정적인 결과를 낳은 경우에는 내가 가진 교직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요즈음은 덜해졌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한국인이 교수를 대하는 태도는 서구세계의 젊은이들에 비해 확실히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 교수는 여전히 스승의 지위에 있는 존재다. 내게 스페인어로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나를 대화상대로 선택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으리라. 어쩌면 한국인과 흡사한 외모도 한몫 할 것이고, 매주 하루를 운동장에서 자신들과 함께 축구공을 차다 보니, 더욱 더 친근하게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학생들과 같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성심성의껏 대화에 임한다. 그런데, 그런 내 태도로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한 1년쯤 전이다. 그때는 월요일인가 오후에 수업을 끝내고 두어명의 우리 과 학생, 인근에 사는 중학생 두어명, 그리고 같은 과 동료 외국인 교수 이렇게 공을 차며 즐겼는데, 낯선 얼굴의 학생이 다가왔다. 공을 차겠다는데 다른 과 학생이라고 차별할 수 있나? 난감한 표정을 짓는 우리 과 학생들을 설득해서 함께 공을 차기 시작했다. 그런데, 학생의 태도가 묘했다. 끊임없이 뭔가를 말하는데,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목소리로 중얼대는 것이었다. 뭐라고, 라고 물으면, 씩 웃거나 아예 아랑곳하지 않고 공을 쫓아가거나 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가니 딸애가 이상한 전화가 왔다는 것이었다. 아빠를 찾는 사람이었는데, 아무개 교수님이라고 하지 않고 아무개 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었다. 제 아빠만이 유일한(?) 외국인 교수라고 여기는 딸애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아빠, 학생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아빠 이름만 대요?" 딸애는 그날 밤 늦게까지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후, 아내가 전화를 받으며 모든 게 명확해졌다. 역시 이름만 대가며 나를 찾자, 아내가 누구냐고 물었고, 상대방은 '축구 친구'라며 자신을 소개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아내는 그 사람이 정신이상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그 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랬구나! 그래서 우리 과 학생들이 난감해했구나!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친구에게는 시간 관념이 없는지 밤 12시, 1시, 새벽 5시에도 전화를 걸어왔다. 아내는 공연히 친절 베풀다가 잠도 못자게 만드느냐고 불평이었다. 학교에서 알아보니, 정신병력으로 학교를 그만 둔 학생이었다. 다행히 다시 병원에 입원하면서 잠 못자는 기간이 2주로 끝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은 아프다. 누가 중학생들을 상대로 거친 태클을 하면 쫓아가서 항의하던 의분의 청년이었는데 어쩐 일로 정신이상자가 된 걸까?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정신이상자라는데,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구별은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하기는 미치지 않고 세상을 살 수는 없을 거다. 일에 미치건, 황금에 미치건, 권력에 미치건, 사랑에 미치건, 미친 듯한 열정 없이 산다는 것은 무기력하게 산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 미치기는 미쳐야 하는데, 어느 정도로 미쳐야 정상인으로 취급받고 살 수 있는 걸까? 지금의 어수선한 세상살이도 따지고 보면 극도로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벌이는 게임 아닐까? 누구를 반드시 제거해야겠다는 사람들, 내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무고한 이들을 죽이는 사람들, 나만이 옳고 남은 다 그르다는 사람들, 위대한 나를 부각시키기 위해 남을 짓밟는 사람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모두 다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 현실이 더 기막힌 노릇이다. 정상인이 설자리는 점점 더 좁아지는 것 같은 불안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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