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 -

웹진 대산문화

* 은빛 소리 꺼내기

새벽에 일어난다. 아직 깜깜하다. 깜깜한 어둠 속에 모든 것들은 입술을 굳게 닫고 앉아 있다. 그것들은 내가 입술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눈을 뜨자 마자 나의 눈에 제일 먼저 와 닿는 창문, 어둠이 잔뜩 고개를 숙이고 있는 창문, 흰 격자 무늬가 기하학적으로 그려져 있는 창문의 입술도 딱딱하게 굳어 있다.

  멈칫멈칫 일어나 마루로 걸어나온다.

  거기에도 어둠은 빼곡하다. 딱딱하다. 마루의 창 밖도 그렇고, 그 밖의 밖, 수평선도 그렇다. 창 앞으로 다가선다. 딱딱한 어둠 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연신 깜박거린다. 마치 서 있는 나에게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도 같이. 등대다. 단속적이나 끝없는 그 눈초리의 흔들림, 입술이 딱딱한 자의 염원. 나는 어둠 속의 모든 사물들을 다시 들여다 보기 시작한다.

  천정 : 언제나 무슨 일이 있을까를 생각하며 기대에 차서 바라보고 있는 그것.

  영산홍 : 나는 중얼거린다. 네 속에 있는 꽃을 내보여라, 네 속에 있는 꽃을……

  가로등 : 창 밖 어둠 속, 바다 앞 주차장에 서 있는 그것 ― 그림자를 골똘히 내려다 보며 서있는 그것.

  집안으로 눈을 돌리니 의자들도 그렇고, 흰 벽도 그렇고…… 주전자도 그렇고…… 아, 세 개의 꽃병 ― 나는 꽃병들을 전부 수도 꼭지 앞으로 가지고 온다.

  나는 물주기를 시작한다. 우선 꽃에서 부터.

  나의 비리데기의 꽃이다. 나는 이 꽃들에게 비리데기의 꽃이라고 이름붙였다. 비리데기는 우리의 서사무가(敍事巫歌)의 여주인공이다. 지방마다 약간씩 그 이야기가 다르지만, 대체로 '임금님이 계셨는데, 그 임금님이 딸만 내리 낳고, 그 일곱째 딸 비리데기를 버린다'는 줄거리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 일곱째 딸은 신성한 힘으로 구원되고, 키워질 뿐 아니라, 부모가 병에 걸렸을 때 저승으로 목숨을 살리는 약수(藥水)를 구하러 간다.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비리데기는 약수를 구하는데, 그 과정에서 세가지 꽃도 얻는다. 숨을 살리는 '숨살이 꽃', 피를 살리는 '피살이 꽃', 살을 일어나게 하는 '살살이 꽃', ― 지방에 따라서 말하게 하는 '말하는 꽃'도 있다.

  비리데기는 저승에서 돌아와 마침 상여에 실려 나가는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입에 약수를 흘려넣으며, 숨살이 꽃, 피살이 꽃, 살살이 꽃으로 죽은 부모를 '쓰다듬음'으로써 살려낸다. 우리의 역사는 그렇게 '버려진 딸'들을 얼마나 많이 나았던가. 특히 조선시대는 그렇게 버려진 딸들의 시대였었다. 여자는 재산권도 없었으며 호적도 없었던 시대, 한낱 남자의 소유물이던 시대였었다. ― 그러한 버려진 딸의 이미지와 나의 내면의 이미지와 사회의 이미지가 합쳐져 한편의 시를 이루곤 했던, 70년대의 젊고 가난했던, 유신 독재시절.

  나는 꽃들의 가지를 정성들여 씻어준다. 정성스레 화병의 물도 갈아준다. 스프레이로 물도 뿌려준다. 꽃은 주로 백합과 장미이다. 백합과 장미는 나의 죽어가는 '언어의 살(肉)'을 만져줄 것이다.

'언어의 피'를 흐르게 할 것이다. '언어의 숨'을 일어서게 할 것이다.

  이젠 나에게 물을 줄 차례이다. 나는 싱크대에 세개의 컵, 그리고 녹차 잔을 늘어놓는다. 나는 주전자에 물을 담는다. 물도 입술을 꽉 다물고 있다. 그것은 멈칫거리며 쏟아진다.

  '마중물'이 필요하다. 마중물은 펌프질할 때 맨 처음 붓는 한 바가지의 물을 말한다. 내가 던지고 싶은 물 한 바가지. 그 한 바가지 물에 의해 깊이 숨어있던.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의 물은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물의 가슴 속은 아직 하얗구나. 아직 물의 입술은 딱딱하고 딱딱하구나.

  나는 물을 가득히 담은 주전자를 가스불에 올려놓는다. 가스불을 켠다. 점화하는 순간, 파아란 불꽃이 주전자의 밑둥을 향하여 올라온다. 맹렬한 기세로 올라온다. 내가 꼭지를 틀자마자 저렇게 맹렬히 불붙다니…… 기다리고 있었구나, 무엇인가 점화해주기를.

  이제 종에게로 갈 차례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종을 한번 살짝 두드려 준다. 손가락으로 에밀레종의 쇠살을 살짝 두드려 보다가 두개의 에밀레종의 두꺼운 쇠살을 서로 부딪쳐 보게 하고, 자루가 긴 인도의, 나무로 된 종은 머리 위로 흔들어본다. 나의 경자(磬子)이니까. 경자는 원래 스님들이 책상 위에 놓고, 대중(大衆)을 깨우기 위해 한번, 불도(佛道)를 깨우치기 위해 또 한번 치던 종이었다. 나도 스님처럼 「세상을 깨우고, 나도 깨우소서―」중얼거린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종들의 소리는 깜깜한 어둠 한 가운데로 걸어나간다. 어둠의 입술을 만지면서. 어둠의 어깨를 쓰다듬어 보면서. 어둠의 허리에 팔을 걸쳐 보면서.

  이제 드디어 쓸 차례다. 무엇인가를 써야 한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써야 한다. 나를 감동시키며 세상도 감동시킬 수 있는 이야기…… 이야기를 쓰기 전에는 늘 이렇게 희망에 찬다. 그러다 보니 나는 이번에 새로 낸 시집의 제목을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를 넣고 다녔다』라는 긴 제목이 어느 날 내 입술을 통하여 흐르는 경험을 했다. 하긴 시집을 한권 낼 때마다 나는 그런 경험을 하곤 한다. 그 제목이 나의 입술을 통해 어둠 속을 흐를 뿐 아니라, 꿈 속에서도 흐르는 그런 경험.

  그러니까 내 시는 그런 경험의 시들이다. 초기의 『허무집』에도 그랬고, '사회와 나와의 만남'이 '비리데기의 꿈'과 합쳐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두번째 시집『빈자일기(貧者日記)』에도 그랬다. 80년대, 정치적으로 독재가 우리의 삶을 어렵게 하고 있던, 소위 유신(維新) 독재 시절, 그 시절에 출간되었던 나의 시집의 제목을 『소리집』이라고 붙였던 이유는 한국의 시는 바로 한국의 모든 삶 속에 들어 있는 '억눌린 모든 소리'를 꺼내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내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서울을 떠나 삶의 터전을 한국의 남쪽 끝인 부산으로 옮기면서(현실적으로는 그때 나는 한 대학교에 교수로 임용이 되었었다) 나는 '수많은 얼굴'들을 보게 되었다. 그 많은 얼굴들을 나는 나의 경험 속으로 끌어오려고 하였다. 그 속에 들어있는 소리를 꺼내려고 하였다. 그 결과 나온 『붉은 강』『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낙동강을 형상화했을 뿐 아니라 그 '소리'를 꺼냈다고 그 당시엔 나 나름으로 아주 득의(得意)에 차 있던 『붉은 강』, 그러다가 나는 '잘 꺼내지지 않는 소리'에 회의와 절망을 느끼게 되었고, 그 '절망'은 나로 하여금 90년대에 들어서는 그림 그리듯 대상에 가까이 가는 시를 시험해 보게 했다. 화가 클레의 말, 니체의 말을 내 식으로 변형·혼합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라,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여라,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여라, 들리는 것을 들리지 않게 하여라, 귀로 보아라'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래서 나온 90년대의 시집들은 『어느 별 위에서의 하루』,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였고, 시화(詩話)집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나의 시-언어-대상에의 꿈을 아주 짙게 실은 것이었다.

  그러다 2000년대 벽두에 든 나는 요즘 다시 '비리데기'로 돌아왔다. 그 도화선은 어떤 학회에 가서 비리데기와 유럽의 생명수 신화를 비교한 논문의 토론자가 되었던 일이었다.

  그 논문을 이메일로 받아보면서 비리데기라는 이름을 다시 접했을 때의 그 반가움…… 80년대를 지나면서 현실만이 경험이라고 생각해 왔던 나에게 나의 '옛 여성'은 다시 시적 영감(靈感)을 주기 시작했다.

  그렇다. 현대에서 시인이란 그런 '약수'를 주어야 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숨살이 꽃'을 주어야 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피살이 꽃'을, 그런 '살살이 꽃'을…… 또한 비리데기는 현대의 '여성성' ― '구원(救援)의 여성성'을 대변하는 인물도 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현대가 살 길은 여성성을 되살리는 일일 것이라고 나는 요즘 깊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 역사 속에서 만든 인물은 비리데기이다. 버려진 딸, 그러나 아버지를 구한, 비리데기의 그 용서와 화해와 포용.

  시는 그 '언어의 그릇'을 '오늘의 모든 식탁' 앞에 차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입술을 움짓거리게 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서 '숨어있는 소리, 아무도 일찍이 듣지 못한 - 보지 못한 소리'를 꺼낼 수 있어야 한다.

  숨어 있는 소리를 꺼내는 시, 대상을 보이게 하는 시……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시는 연애와도 같다. 종교와도 같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연애, 구원의 약수를 흐르게 하는 종교, 그 연애, 그 종교는 결코 보이는 것에, 또는 사회의 체제에 편승하지 않는다…… 넓고 깊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최후에 펼쳐질 식탁보는 사랑 뿐이다.

  한국 5천년의 소리가 숨어 있는 식탁보를 위해서 나는 요즘 '가야'를 생각한다. 가야는 한국의 남부에 있던 고대 국가이다. 문헌자료가 거의 없는, '사라진 왕국'이다.

  부산 김해에는 그 가야의, 얼마 없는 유물들을 모아 전시한 '가야 박물관'이 있다. 나는 가끔 그 박물관에 간다. 소리를 들으러, 그래서 그것을 꺼내러, 거기 토기(土器) 속에 들어있는 소리를 꺼내러, 그 소리를 낸 인물을 만나러……

  그런데…… 글쎄…, 그 가야에서 소리를 꺼내 2000년대인 오늘에 울리려고 하는 나의 희망, 가능할까?

  그러고 있자니, 경련이 일어난다. 72년 뇌수술 이후 가끔씩 일어나는 것이다, 춥거나, 배고프거나, 빛이 너무 현란하거나, 스트레스가 너무 과도하거나 하면 일어나는 것. 내가 살과 피의 스파크라고 이름붙인 것, 지금 이 현실의 언덕에서 나는 좀 추운가? 배가 고픈가? '가야의 노래'를 써야 한다는 당위(當爲) 때문에 마음이 급해서? 그것이 스트레스를 가지고 왔나? 아니 너무 고독한가?

하긴 이번에 나는 나의 뇌사진을 다시 찍었다. 아름다왔다. 형광 램프에 비쳐진 나의 뇌사진은 마치 나비들이 엎드려 있는 것 같았다. 내 머리 속에 있는, 날지 못하는 수많은 나비들……

  그 나비들을 꺼내라. 그 펄럭임 소리를 꺼내라.

   나는 오늘 새벽에도 중얼거린다.『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를 넣고 다녔다』 ―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