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 -

웹진 대산문화

비루한 세상 속으로 -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생의 첫출발』

『인생의 첫출발』은 제목 그대로 세상에 첫발을 내딛게 된 물정 모르는 한 청년의 이야기이다. 가난한 과부의 외동아들이며,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오스카르 위송은 1825년 7월의 어느 저녁, 난생 처음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 혼자 여행길에 나선다. 발자크는 곧 소멸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장비”로 묘사된 시골 합승마차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하나 둘 손님이 모여들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여행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승객들은 잡담을 나눈다. 맨 먼저 한 청년이 나폴레옹과 함께 워털루에 참전했던 용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터키에서 겪었던 무용담을 꾸며댄다. 실상 그는 별 볼일 없는 2등 법률 서기일 뿐이다. 이에 질세라 또 다른 승객이 유명화가를 사칭하며 그리스 여행 중에 목숨을 걸고 연애를 했다고 너스레를 떤다.

이 두 입심 좋은 승객의 허위의 이야기에 우매하게 몰입한 사춘기 소년은 우쭐대려는 마음에 합승마차에서는 꼭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잊고 만다. 소년은 자신이 드 세리지 백작의 아들과 절친한 사이라며, 그걸 입증할 셈으로 백작부인의 바람기와 백작의 은밀한 치부에 대해 열심히 떠들어댄다. 그것은 그가 어머니의 친구인 백작의 집사에게 얻어들은 것이다. 하필 마차에는 신분을 감추고 여행 중인 드 세리지 백작이 동승하고 있었다. 오스카르의 경솔한 입놀림으로 집사가 파면되자, 집사의 원조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해오던 두 모자의 앞날은 막막하기만 하다.

오스카르는 친척의 도움으로 용케 공증인 사무실의 견습생으로 들어가 혹독한 훈련의 시기를 겪고 인생을 배운다. 드디어 정식 서기가 되려는 시점에서, 청년은 또 한 번 제 발등을 찍고 만다. 처음 구경한 사교계의 화려함에 취해 사무실의 공금까지 노름에서 몽땅 잃어버린 것이다.
오갈 데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오스카르는 입대해 동양원정에 나선다. 그러나 그가 겪은 동양은 과거 합승마차에서 들었던 그대로의 낭만적인 모험의 땅은 아니었다. 알제리 전투에서 그는 한쪽 팔을 잃고, 그 피의 대가로 레종 도뇌르 훈장을 얻어 서른 살에 시골 세리가 된다.

이러한 이야기의 골격은 언뜻 주인공이 정신적 성장과 각성의 과정을 거쳐 성인의 세계에 입문하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오스카르가 열아홉에서 서른네 살까지 겪었던 ‘성장의 고통'이 ‘시련'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할지라도, 과연 오스카르의 ‘모험담'이 자아와 세계 사이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주인공의 각성을 통한 세계와의 화해를 모색하는 교육 소설의 일반적 틀 안에 분류될 수 있을지는 분명치 않다. 애초부터 그에게는 세상과 반목하는 젊은 주인공이 갖추어야할 그 어떤 진정성이나 숭고함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과 닮고, 세상과 통한다는 점에서 그는 철저히 통속적이며, 요컨대 현실과 불화함으로써 현실의 희생양이 되거나 혹은 현실을 조롱하는 위치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 희극』에서는 보기 드문, 자신의 범용함만으로 성공하는 인물의 유형에 속하며, 대혁명과 나폴레옹에 의해 일깨워진 모든 긍정적인 에너지가 소멸된 사회와 모든 것을 비루하게 만들어버리는 사회적 순응주의를 대변하는 하나의 전형이 된다.

발자크는 소설의 초두에서 자신의 작품이 사라져가는 시대를 증명하는 ‘고고학적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라 했지만, 오히려 작품은 미래에 대한 예언자적 안목으로 인하여 더 큰 가치를 부여받는 듯하다. 따라서 『인생의 첫출발』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구체제의 종말, 대혁명, 나폴레옹의 제 1제정, 부르봉 왕가의 왕정 복귀와 같은 과거 속의 사건들이라기보다는, 산업 혁명이 바꿔 놓기 시작한 새로운 프랑스의 모습이다. 새로운 교통수단인 기차의 등장, 강력한 자본의 집중과 경쟁, 기술의 발달과 같은 자본주의의 거침없는 진전은 근대적 시간으로의 편입과 더불어 낭만적 영웅주의 종언을 고하는 것임을 발자크는 탁월한 직관으로 파악해냈다.

그가 어떻게 현대 소설의 핵심적 형상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감정교육』의 프레데픽 모로를 준비하는지 궁금하다면, 일단 작품을 읽어보시라. 원숙기의 작가가 능숙한 솜씨를 발휘하여 만들어낸 탄탄한 중편 소설, 발자크적 소설의 성취를 다시 한 번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과 만나게 될 것이다.

※ 『인생의 첫출발』은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