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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역설의 언어 -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중단편선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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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더불어 오랫동안 소련 내에서 출판이 금지되었던 많은 작품들이 독자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대개 혁명을 ‘체질적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배경을 갖는 작가들로서 일찌감치 망명의 길을 선택하였거나 국내에 남았더라도 현실 체제와 담을 쌓고 망명지에서와 다를 바 없는 세월을 보낸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번에 초기 작품 모음집으로 우리 독자들을 찾게 될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도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야 주요 작이 풀린 대표적인 해금 작가에 속하지만, 이 계열의 다른 작가들과 달리 누구보다 열렬히 혁명을 환영했고 혁명의 세례 속에 문학의 길로 들어선 작가라는 점에서 문학적 이력이 특이하다.
플라토노프는 19세기가 저물어가던 마지막 해인 1899년 모스크바 남부에 위치한 보로네쥐의 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진 제정 러시아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쇠망의 길을 재촉하고 있을 무렵,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가정에서 유년을 보내야 했던 그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어려운 가계를 돕기 위해 곧장 직업 전선에 뛰어든다. 기관차 조수, 보험회사 사환 등을 전전하던 그의 삶에 뜻밖의 전기를 마련해준 것은 혁명이었다. 10월 혁명이 일어난 후 그는 보로네쥐 공과대학에 입학하여 배움의 기회를 다시 얻고 지역 프롤레타리아 작가 모임에 가담하여 문학에 발을 들여놓는다.
하지만 이 당시 그의 열정에 불을 지핀 것은 오히려 문학보다는 ‘물질을 조직하는 일’이었다. 졸업 후 그는 보로네쥐 토지개발청에 토목기사로 들어가 늪지를 매립하고 댐과 수력발전소를 짓는 등 ‘세계를 물질적으로 개조하는’ 데 힘을 쏟는다. 이 무렵에는 이렇게 문학에 대한 관심이 덜할 수밖에 없었는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전보 발령이 떨어져 모스크바로 자리를 옮긴 1926년부터는 문학이 그의 삶의 중심이 된다.
문제는 이와 더불어 고난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는 쫓겨나다시피 직장을 나와야 했으며 발표된 작품들로 몇 차례 떠들썩한 필화 사건을 겪었고, 심지어 소비에트 공식 비평계로부터 ‘계급의 적’이라는 끔찍한 낙인을 받아야 했다. 그의 이런 고난과 자기 머리 하나 마땅히 누일 데 없던 고단한 삶은 수용소에 끌려갔다온 아들을 돌보다 52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중단편선집』은 작가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코틀로반」 『체벤구르』 『행복한 모스크바』(세 작품 모두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에서 발표됨) 이전에 써진 초기 단편 및 중편 7편을 수록하고 있다.
자연에 맞서 싸우는 초인들의 이야기인 단편 「마르쿤」과 「모래 여선생」은 이성의 힘으로 물질세계를 정복함으로써 인간이 해방과 구원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린 작품들이다. 물론 이 영웅서사시의 행간에는 그러한 계몽주의적 발상에 대한 아이러니가 군데군데 녹아 있어 후기 플라토노프의 다성악적(多聲樂的) 예술세계를 예고하고 있다.
중편 「예피판의 수문(水門)」 「그라도프 시(市)」 「비밀스런 사람」은 저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주제 면에서 보면 모두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의 모순이라는 이전 작품들의 문제의식을 잇고 있다. 다만 극복 대상으로만 여겼던 자연과 물질이 이미 인간 존재의 어떤 선험적 전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인식이 두터워지면서 위의 주제는 존재론적 성찰의 색깔을 입는다.
단편 「국가의 주민」과 「의심하던 마카르」는 소련의 관료 이데올로기 안에서 하나의 기호로 전락해가는 민중들의 문제를 풍자적 터치로 다룬 작품들로써 작가의 역사적 통찰의 깊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플라토노프는 무엇보다 스타일리스트로 독자들에 의해 기억된다. 그의 독특한 문체는 감각의 산란에 초점을 맞추는 인상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의 내밀한 곳에서 길어 올려지는 언어가 역설적이기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중단편선집』은 우리 문학 애호가들에게 모처럼 러시아 문학 특유의 깊은 향취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믿는다.
※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중단편선집』은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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