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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세 번의 데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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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책 뒷면에 들어가는 공공연한 약력에 표시되는 데뷔작이 세 종류가 있다. 모두 주민등록부의 내 이름으로 된 것이 그렇다.
나의 첫 번째 데뷔작은 시이다. 1986년에 「유리 닦는 사람」 외 4편으로 월간 『문학사상』의 ‘신인 발굴’이라는 이름의 데뷔무대를 통해 등단했다. 그건 남들과 비슷하게 투고-심사-당선의 과정을 거친 것이라 특별히 말할 게 없지만 뒷일은 언급해 둘 만하다.
1991년에 그동안 발표한 시를 모아 『낯선 길에 묻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민음사에서 냈는데 그때 내가 다니고 있던 시멘트 회사의 임원 가운데 한 분이 문학과 예술 전반에 관심이 다대했다. 신문의 문화면에 손톱만한 내 얼굴 사진과 함께 시집이 나왔다는 기사가 실린 걸 보고는 회사의 과장급 이상 간부들에게 그 시집을 한 권씩 돌릴 것을 임원회의에서 건의했다. 그리하여 시멘트와 레미콘의 불꽃 튀는 영업전선을 누비고 다녀야 할 회사 차가 출판사로 가서 3백 권인지 6백 권인지의 시집을 실어왔고 내가 하루아침에 전국 각지의 시멘트겥뭐箝?공장장을 포함 과장급 이상의 간부들 사이에 ‘정서 함양’의 탈을 쓴 ‘시 고문’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이었다. 활판으로 인쇄한 그 시집은 그 덕분에 재판(再版)을 찍기까지 했다가 오래도록 재고가 남아 있던 중 활판이 거의 사라짐으로써 자연스럽게 절판되었다.
‘재판 시인’의 영예를 안고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던 1994년 여름, 불쑥 시집에 들어가지도 않을, 운명적이며 숭고한 시업(詩業)에 혹처럼 따라다니는 무겁고 불순하고 잡다한 글감들에 생각이 미쳤다. 너무 더워서 시 원고를 만지고 있기가 힘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무심코 그 글들을 386컴퓨터에 입력하기 시작했는데 날씨가 기록적으로 더운 탓에 오래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얼른 하나를 쓰고 나서 샤워하러 달려가고 또 하나 쓰고 나서 냉면 먹으러 가고 또 하나 쓰고 샤워, 또 하나 쓰고 맥주 마시러 가고 하는 식으로 두어 달을 보내고 나니 개수로 70여 편, 책 한 권 분량이 되어 버렸다. 그것들은 ‘이야기’였다. 그때 내게는 이야기는 말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고 말재주나 말주변이 형편없다는 평을 주변 친구들에게 듣고 있던 차라 그 글을 ‘그냥 이야기를 글로 써본 것뿐이라네’ 하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소설이라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던 것이 소설은 피땀으로 불을 밝힌 수많은 밤 노고의 산물이라는 선입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매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영업부 사원의 조언에 따라 내가 쓴 글의 종류는 ‘소설’이라고 정해졌고 1994년 12월 25일자로 출간되었으며 뛰어난 영업 전략 덕분인지 이듬해 4월 재판을 찍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 소설 청탁을 받았다.
처음 계간 『문학동네』의 강태형 주간의 전화를 받고 청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시를 달라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내게 내가 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낸 책에 관해, 시를 쓰다가 소설로 ‘전향’(시로는 전망이 없을 것 같아서라는 말은 생략한 게 틀림없다)한 사람의 책 치고는 그럭저럭 잘 읽히더라고 웃음소리를 섞어서 말하더니(화상통화가 아니어서 두 눈으로 확인은 하지 못했지만 분명 웃음기가 있었다) 정식으로 단편소설을 한 번 써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시를 쓰면서 ‘프로페셔널’로서 청탁을 받은 글은 쓰고 본다는 원칙을 가지고 살아왔던 터에 뭔가 오기 같은 게 생겨나서 그러겠다고 승낙했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그로부터 얼마 전 후배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 몇 초의 시간에 일어난 사건을 어느 정도의 길이로 쓸 수 있을까에 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내가 난생 처음으로 이건 소설이다, 라고 생각하고 쓴 단편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가 써졌다. 소설에 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으니 시를 쓰듯 호흡과 힘을 응축했다가 단숨에 쓴 소설이었는데 의외로 참신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그 뒤로 소설 청탁이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족 : 책에 들어가는 약력을 쓸 때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가에 따라 데뷔작이 달라진다. 요즘은 등단 연도를 따져서 선후배를 가리자, 좌석배치를 다시 하자는 사람은 보기 어렵지만 그런 사람이 혹 나타난다면 또 데뷔작이 달라질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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