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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의 관리인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즐겁게 대화를 하다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된 적이 있다. 이른바 ‘장르문학'이라고 불리는, SF와 판타지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구하기 힘든 책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독자들로부터 충분히 사랑받기 전에 절판되는 책들이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장르문학 쪽에서는 몇몇 베스트셀러들을 제외하면 심하게는 출간 1년도 지나지 않아 절판되는 책들이 허다하다.

막 출간된 순간에는 딱히 마음이 끌리지 않더라도 멀지않아 희귀본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니 일단 사두는 게 현명한 처사라고 할까. 물론 공공도서관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긴 하지만, 좋아하는 책이라면 누구나 제 책장에 두고 침을 발라가며 읽고 싶어하기 마련이니까. 내게도 몇 년 전부터 인터넷 헌책방을 찾아 헤매다 포기한 책들이 꽤 된다, 꽤 가까운 친구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히 빌려달라고 부탁하지 못한 오래된 책들도 있다, 그것들이 이미 ‘희귀본'의 반열에 올라버린 사실을 아는 이상 읽고 싶어 애를 태우면서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반대로 내게 귀한 책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을 보면 좀 얄밉다는 생각도 든다……. 뭐 그런 이야기를 침 튀기며 하고 있는데, 역시 SF 팬이라는 어느 분이 한 마디 던졌다. “그래요? 전 가능하면 기꺼이 빌려주려고 하는 편인데. 서로서로 열심히 빌려주고,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가르쳐주고, 그래야 이 판이 넓어지죠. 터널 안에 자기 보물만 쌓아둔다고 장르문학 팬 층이 두터워질까요? 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취향을 나눠야 작가들도 더 힘을 얻지 않을까요?” 가시 없는 말투였지만, 그의 말 행간엔 어쩐지 이런 따끔한 충고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순간, 나보다 한참 어린 그에게서 대가의 페이소스라고 할까, 아우라라고 할까, 뭐 그런 것을 본 것 같았고, 그래서 꽤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아무리 부인하려 애써도 이제 세상은 수많은 문화적 바벨탑들 위주로 돌아간다. 무료한 일상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우리는 저마다 취향이라는 시멘트와 언어라는 벽돌을 가지고 각자의 영혼에 의미 있는 탑을 쌓아올리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살아간다. 자신만의 취향을 개발하는 건 건설적인 일이다. 같은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끼리 뭉쳤을 때의 유대감과 정신적 에너지란 거의 은하계의 빅뱅에 맞먹는다. 하지만 취향이 다르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너무 피곤한 나머지 그만 말문을 닫고 만다. 배타적인 감정까지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끔씩 내가 보지 않는 미국 드라마에 대해 세 시간씩 이야기하는 친구들 틈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끼여 커피만 마시다 돌아오거나,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이어가다 “저는 그 분야는 전혀 모릅니다. (그러니 뭔 소린지 도통 알 수 없는 그딴 얘기는 이제 그만 하시지!)” 하는 말로 대화가 뚝 끊어지는 걸 목도하다 보면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서로 대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어만 같다면, 취향만 조금 비슷하다면 살붙이들처럼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생산적인 일들이 이뤄질 수 있을까? 재미없을 거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그러니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딴 세계 얘기라는 선입견만 버린다면 말이다.

소통하기 위해 취향의 탑을 허물자는 건 아니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너무도 비경제적인 일이니까. 바벨탑의 머릿돌을 세운 사람들도 처음부터 단절과 혼돈을 상상하며 그 중노동을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각자의 탑을 그대로 견고하고 탄탄하게 유지하되, 1층에 조금씩만 친절한 관리인을 두는 건 어떨까. 이를테면 “그 분야를 잘 모르지만 관심이 있다면 이것들부터 한 번 읽어보세요. 이것들이 재미있다면 더 재미있는 걸 추천해드릴게요” 하고 말해줄 수 있는 겸손하고 친절한 사람 말이다.

50대 문학평론가와 10대 호러영화 마니아가 소설과 영화를 화제로 유쾌하게 담소를 나누는 사회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그런 관리인들이 늘어나면 사상 최대의 문화적 풍요 속에서 사상 최악의 문화적 단절과 괴리를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가 조금은 더 즐거운 곳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다음번에 누군가가 내게 책을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야 나도 누군가에게서 더 재미있는 책을 빌려 읽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