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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에 대한 불순한 상상

올 한해 우리 극단의 대표로 일하게 되었다. 대학 때 놀고먹던 친구들과 이름부터 걸어놓고 시작한 극단이지만 근래 본격적인 일들을 벌여 논 터라 괜히 어깨가 무겁다. 새로 받은 명함엔 대표 직함이 찍혀 있다. 명함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딱히 빼고 싶다는 생각도 박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는데,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할 연극쟁이 팔자인가… 하는 노인네 같은 생각에 웃음이 났다. 아무튼, 어찌어찌하다보니 극작을 공부하였고, 공부하는 사이 어른이 되어서 나는 어느새 공연 만드는 사람, 대본 작가, 그리고 극단 대표가 되어 있다.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이 여전히 낯설지만, 시집이나 확 가버리지 않는 한, 이제 다른 꿈을 꾸기에는 인생의 모양이 꽤 정해져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하게도, 이 세상 무엇이든 될 수 있었지만 오로지 연극 만드는 사람이 되지 못할까봐 조바심 내면서 공부를 시작했던 때가 너무 먼 일인 것만 같다.

그때, 가장 중요했던 건 좋은 희곡을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공연을 만들 수 있는지, 과연 누가 좋은 연출이고, 뭐가 좋은 연기인지 떠들어댔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재능이 있는가 없는가 같은 문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도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다. 모든 것이 결국은 ‘진짜 좋은 공연'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공연을 만들기만 하면 당연히 극장에 올려지고 관객들은 몰려올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재능의 문제는 ‘버티는 것이 재능!'이라는 뻔뻔한 철학으로 대체했지만, 좋은 공연을 만들고 싶은 열망과 좋은 공연을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은 실제로 극단 활동을 시작한 후 더욱 분명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요즘, 좋은 공연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그것'에 대해서도 새로 배우는 중이다. ‘좋은', 희곡과 연출, 배우, 무대효과와 함께 좋은 공연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그것'은… 바로 ‘돈'이다. 좋은 공연을 만들고 싶은 우리에게는 밥값과 차비와 무대 제작비와 의상 제작비, 소품 제작비, 배우와 스태프들의 개런티, 그리고 어마어마한 대관료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것을 하고 있다. 곗돈을 붓듯 회비를 모으고, 제작비 마련을 위한 후원 파티를 열고, 각종 기금사업에 신청서를 내고, 대기업 홍보 담당자를 만나서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만들기 위해 극단에서 주최하는 연극 프로그램을 짜보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 아직은 쉽지 않고 여전히 확실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관극 수입만으로 다음 공연을 제작할 수 있게 되면 얼마나 속이 후련할지 상상하는 것은 습관적인 일이지만 그러기에는 극단의 경력이 짧고 실제로 대학로에서 그런 일이 흔치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까 급기야 이런 상상을 해 보는 것이다. 나에게 우라질 나게 돈이 많다면… 그래서 내 소유의 극장이 하나 있다면 공연 만드는 게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하고… 극장뿐인가, 기왕이면 건물을 하나 사들인다. 지하는 활용도가 높은 스튜디오형 극장, 1층은 관객들이 공연을 기다리며 차를 마시는 예쁜 카페, 2층은 햇빛이 잘 드는 연습실-바닥엔 결 고른 마루가 깔려있고 전면거울은 기본이다-, 3층은 작업실 겸 극단 사무실이다. 기왕 시작한 거, 여기서 멈출쏘냐, 공연 끝날 때마다 처치 곤란인 무대 세트들을 척 들여다 놓을 수 있는 창고가 딸린 제작소도, 녹음실도 한켠에 들여놔 본다. 하하하… 가만, 공연을 만들기만 하면 뭐 하나, 관객이 있어야지! 좋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 잡지나 신문에 광고도 한 두 페이지 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돈이 우라질 나게 많은데 광고 내는 게 대수인가? 아예 잡지를 창간하는 건 어떨까? 그냥 방송국을 사서 공연 전문 채널로 만들고 우리 공연만 열광적으로 칭찬해줄까? 윽…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누군가 옆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바보야! 차라리 우리 공연을 보면 돈을 준다고 하지 그래?'

… 상상은 여기까지.
나는 다만, 제작비 마련을 위한 극단 회의를 잡으며 이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은행가들이 모이면 예술에 대해 논하고 예술가들이 모이면 돈에 대해 논한다.' 했다더니, 나는 정말 예술가인가 보다… 하고.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