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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에 대한 매혹
 


위험에 대한 매혹

‘위험에 대한 매혹’이라는 말은 루이스 브뉘엘의 영화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 나온다. 테러리스트들의 행동 동기에 대해 영화 속의 인물이 한 분석이지만, 사실은 사랑에 빠지는 일이 그와 같다는 암시가 곳곳에 배어 있다. 모든 사랑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치명적인 어떤 사랑은, 치명적인만큼 더, 위험에 대한 매혹에 이끌리는 경향을 띈다. 위험이 클수록 매혹도 커진다고 해야 할까.

나는 그런 여자를 한 명 알고 있는데, 지금 아내와 자녀가 있는 직장 상사와 연애중이다. 그 전에는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친구의 애인을 유혹해서 사귀었다. 그녀에게 반한 남자가 이른바 ‘양다리 걸치는’ 행동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원래 사귀던 애인과 헤어졌을 때 그녀는 냉정하게 남자로부터 돌아섰다. 그 순간 그 남자에게서 위험과 함께 매력이 급격히 사라지는 걸 느꼈고, 친구의 애인이 아닌 그 남자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이 이유였다. 그 남자의 매력은 오로지 가장 친한 친구의 애인이라는 데 있었던 것이다. 왜 자기를 버리느냐고 매달리는, 영문을 알 리 없는 불쌍한 남자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싱겁고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어. 하품이 나와.”

키가 1미터 20센티인 어린아이에게는 위험한 냇물이 1미터 70센티미터인 어른에게는 위험하지 않게 된다. 숙련된 자에게 익숙해진 장애물 역시 위험할 리 없다. 위험하지 않다는 건 매혹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중독된 자가 매혹이 없는 무미건조한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테러리스트가 평화를, 사기꾼이 봉급생활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중독은 더 큰 자극을 향해 내달린다. 그녀의 사랑도 더 큰 위험을 필요로 한다.

놀랍게도 지금 그녀가 연애하는 직장 상사의 아내는 그녀의 대학 선배이다. 나중에 알게 된 그 학연을 앞세워 전화를 걸고 받는 사이로 발전시키더니 급기야 남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끔 그 집으로 찾아가기까지 한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어색하고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은 남자뿐이다. 그녀는 남자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짜릿한 쾌감과 함께 뜨거운 욕망을 느낀다. 실제로 남자의 아내가 부엌에 있는 동안 남자의 품안에 파고들어 키스를 하기도 하고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남자의 다리 사이에 손을 올려놓기도 한다.

왜 일부러 어려운 사랑을 하는가? 하고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고,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사랑을 하지,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대답은 그다지 진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왜 어려운 상대를 향해서만 사랑을 느끼는가? 하고 나는 다시 물었다. 이번에도 내 질문은 진지했다. 나야 모르지, 하고 그녀는 역시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나는 조금 마음이 언짢았고,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너는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험을 즐기는 것뿐이라고 말해줬다. 그녀는 조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의외로 선선하게 그럴지 모른다고 인정했다. 곧 이어서, 하품 나오는 연애를 어떻게 해? 하고 모험가답게 덧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에게 하품 나오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바 있는, 모험가가 될 조건을 도무지 갖추지 못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마 그날 루이스 브뉘엘의 영화를 한 번 더 보았을 것이다.

합리화 혹은 속임수

몇 년간 사귄 여자와 헤어지고 난 후 그는, 내가 사랑했던가? 아니, 내가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 하고 자신을 향해 질문했다. 사랑이 끝난 후,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랑은 교묘한 심리 게임인 까닭이다. 예컨대 사랑을 하기 위해서든 사랑을 끝내기 위해서든 자기의 마음을 달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달래는 데에는 합리화와 속임수가 효과적이다. 합리화를 위해 속임수를 쓰기도 하고, 속임수를 쓰기 위해 합리화를 부르기도 한다.

위의 질문은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려고 할 때 심리적 방어술로 제법 유용하다. 그런데 만일 사랑을 끝낸 경우라고 한다면, 사랑을 했던가? 하고 묻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지 않은 사랑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끝내려면 사랑을 했어야 하고, 사랑을 했다면 사랑한다는 말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 하고 질문하는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심리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다. 합리화된 속임수든, 속임수를 쓴 합리화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의무감으로 한 것이다.”

‘연인들은 의무감에 사로잡힌 자들’이라는 정의가 옳기 때문에 이 변명은 받아들여질 만하다. 연인들이 의무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서로를 불신하기 때문이다. 연인들이야말로 서로를 가장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보고 싶다는 감정은 불신에서 나온다. 데이트를 하고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서 곧바로 보고 싶어진다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믿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녀를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모두들 그렇게 착각한다. 혹은 오해한다. 혹은 그런 척한다), 실은 그녀를 가장 믿지 못하는 시기였다. 그럴 때 상대방의 불신을 해소시켜 주거나 혹은 자신의 불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 효과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의무감이다. 그는 말한다.

“강요당하지 않고는 누구도 사랑해, 라고 말하지 않는다.”

맞다. 가장 자발적인 것 같은 사랑의 고백이야말로 강요와 의무의 산물이다. 연인들은 상대방에 의해 강요당하거나 자기 자신에 의해 끊임없이 강요당한다. 상대방의 불신을 해소시켜주기 위해서거나 자신의 불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거나 둘 중 하나이다. 더 이상 강요당하지 않게 될 때, 즉 의무로부터 풀려날 때, 사랑도 자연스럽게 풀려난다.

그는 새로운 대상을 향해 사랑해, 라고 말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자기의 사랑이 강요된 의무감이었음을 고백했다. 이제 그는, 강요당하지 않고는 누구도 사랑해, 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자기를 설득했고, 따라서 사랑해, 라고 고백할 새로운 의무를 지게 되었다.

몇 년간 사귀었던 남자와 헤어지고 난 후 그녀는, 지우고 싶지는 않다, 다만 지워지고 싶을 뿐이다, 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랑이 끝난 후,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랑은 교묘한 심리 게임인 까닭이다. 예컨대 사랑을 하기 위해서든 사랑을 끝내기 위해서든 자기의 마음을 달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 역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려고 준비할 때 심리적 방어술로 제법 유용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난 가해자가 되는 걸 원치 않아. 차라리 피해자가 되는 편이 나아.”

그녀는 자신에 대한 연민을 쌓음으로써 그 슬픔으로 자기를 인정하고 새로운 사랑을 추구하기 위한 명분을 마련하려고 한다. 그러나 가해와 피해, 지우기와 지워지기에 대한 그녀의 생각에는 수상한 데가 있다. 가해자는 나쁘고 피해자는 착하다는 생각은 너무 단순해서 불순하다. 지운 자는 가해자이고 지워진 자는 피해자라는 공식도 수상하다. 교묘한 사람은 가해자가 갖게 마련인 죄책감을 상대에게 떠넘기고 피해자의 역할을 기꺼이 떠맡는 방식으로 가해한다. 가령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고 상대에게 먼저 말하도록 상황을 이끄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사람의 심리적 동기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다만 손에 흙 묻히는 것을 피하려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지운 것이 아니라 지워졌으므로 피해자고 잊은 것이 아니라 잊혀졌으므로 희생자라고 자처하는 것은 기만일 수 있다. 사랑이 끝나도 기억은 남는다. 기억이 사라지길 바라는 것은 사랑이 끝나서가 아니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고 할 때 지난 사랑의 기억이 거추장스럽고, 그럴 때에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 상대방의 기억에서 지워지기를 바라는 그녀의 바람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히 적극적인 것이다. 즉, 그녀는 그에게 자기를 잊어 달라고, 지워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요청은 매우 공격적이다.

피해자와 희생자는 그녀가 쓰고 있는 공교한 가면이다. 그러나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다. 이 심리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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