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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화신인 고행자 예수를 닮은 여자 이야기

1990년대는 정치적으로는 이념적 투쟁을 마감하고 민주화로 나아가는 지표를 마련한 전환기였고 국제 사회적으로는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끝내면서 코리아라는 브랜드를 세계에 선양하는 계기를 이룬 시대였다. 문화계에서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물결을 타고 페미니즘과 대중화가 진행되었다. 우리의 소설작단도 1980년대 극성기를 보였던 운동권의 이념적 순치를 거치면서 이른바 회고담소설이 한때 유행하더니 미시담론 또는 사소설적 경향을 보인 시기이기도 했다.
1990년에 나온 신달자의 장편소설 『물위를 걷는 여자』(자유문학사)는 이러한 전환기 벽두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면서 이후 3, 4년에 걸쳐 1백만 부 이상을 발행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원래 감각적이고도 심미적인 시를 발표해온 시인으로서 뜻밖에도 1989년 『백치애인』이라는 수필집을 내 그해 베스트셀러 목록 11위에 오르고 이듬해 첫 장편소설 『물위를 걷는 여자』를 써 당해 연도에 17위에 오르는가 하면 다시 이듬해 수필집 『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가 13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당대 시대정신과 시인의 감추어져 있던 산문 감성이 맞아떨어져 상승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물위를 걷는 여자’라니, 역사상 그런 여성이 있었던가. 대부분의 복음서에서는 ‘바다 위를 걷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자 그를 선지자라 부르며 따르는 무리를 피해 산으로 갔다가 이미 앞서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간 제자들을 뒤늦게 좇아갈 때 바다 위를 십리 이상 걸어서 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제목은 기적과 같은 일을 해내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일 것인데 그 기적이 어떤 것일까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굳은 의지로 역경을 이겨내며 1980년대 후반 패션업계에서 꿈을 이루는 한 여성의 성취감을 다루고 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작품의 소재는 전화상담을 해온, 그리고 작가가 만나지 않을 수 없었던 여자, 하지만 마침내는 ‘죄의식을 스스로 책임진 여자’에게서 얻은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이 모델은 죄의식 때문에 죽고 말았으나 작품에서 살려냄으로써 작가의 깊은 윤리의식을 드러낸다.
한편, 이 작품이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결혼과 독신 사이의 갈등이다. 젊은 여성이 택해야 할 길은 두 가지뿐이다. 오래 전에 세웠던 장래의 꿈을 접고, 돈 많고 유능하고 잘 생긴 남자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두엇 낳으며 현모양처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현모양처의 길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오로지 젊은 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의지 하나에 매달린 끝에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삶을 택할 것인가. 어느 것이 존재이유인가, 또는 행복한 삶인가.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 『물위를 걷는 여자』는 연애소설의 전형적인 삼각관계의 구조를 활용한다. 소설은 대체로 화자인 난희의 서술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녀는 대학시절부터 일종의 계율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 “남자를 가까이 하지 말 것, 흔들리지 말 것, 남자로 인해 단 1초도 낭비하지 말 것, 남자를 사랑하지 말 것, 결혼하지 말 것, 오직 목적을 달성할 것.” 난희의 목적은 대학 의상과를 함께 다니고 있는 단짝친구 민희와 함께 장차 모델라인 센터를 열고 패션쇼까지 주관하는 대형업체를 만들 뿐만 아니라 명실상부 우리나라 현대패션을 대표하는 매장을 각 지방에 두는 것이다. 그 업체명과 브랜드는 두 여인의 이름에서 ‘희’자를 따 <두희패션>이라 명명할 것까지 약속한 상태다. 하지만 그런 약속이 민희 쪽에서 허물어지는 조짐이 나타나고 마침내는 우리나라 섬유업계의 절반을 움직이고 있는 동우그룹 회장의 막내아들이자 계열회사인 신성방직의 사장인 현재민과 결혼을 해 <두희패션>은 난희 혼자의 몫으로 남는다.
단짝이면서도 갈라지게 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난희는 집안이 가난하지만 민희는 부유하다는 데 있었을 것이다. 원래 재민과 먼저 사귈 수 있는 기회는 난희에게 있었으나 난희 자신이 만든 그 계율 때문에 민희에게 양보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계율은 왜 만들었을까. 애초에 세운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비관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 식으로 말하면, 의지란 고요한 만족을 모르는 불운한 그 무엇이다. 그것은 동요, 열망, 궁핍, 갈망, 탐욕, 욕구, 고뇌와 동격이다. 혹시 궁핍이 가까스로 추방되었다 하더라도 성적욕구나 사랑의 번뇌, 질투, 시기, 미움, 명예욕 같은 것이 끝없이 진행된다.
난희는 프랑스에서 에스모드 패션스쿨 3년과 국립 장식미술학교 2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일취월장하여 마침내 어린시절에 품었던 꿈을 성취한다. <두희패션>이 유명 브랜드로 크게 성공하자 그녀는 파리의 패션계의 동향을 살펴보기 위해 파리로 가게 되고 그곳 한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다가 사소한 실수로 수모를 당한 후 분노와 서러움에 처해 있을 때 그 자리에 영국을 거쳐 파리로 출장 온 현재민을 만나게 된다. 이 우연한 만남은 두 사람을 사나흘 파리에서 동침하는 계기가 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궁핍에서 벗어나 물질적으로 성공한 난희의 의지가 재민에 대한 사랑의 번뇌로, 민희에 대한 질투와 미움으로, 세상에 대한 명예욕으로 나타난 하나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두 사람은 자주 만나게 되고 그 과정을 겪으면서 난희는 민희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게 되며 마침내 양평 쪽 강가에서 음독하고 강물 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나는 강 위를 걸어야 한다. 아니 걸어서 날아야 한다”고 외치면서 손에 쥐고 있던 알약을 강물에 던지고 다시 태어날 것을 다짐한다. 이 마지막 대목에서 난희는 다시금 의지를 불태운다. 그리고 의지의 화신인 고행자, 즉 예수를 닮은 여자가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이와 같은 삼각관계의 구도 외에도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 하나가 패션에 관한 성실한 자료 수집을 들 수 있다. 제아무리 상상력이 탁월하다 해도 자료 수집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소설은 현실성이 뒷받침되지 않아 공허하다. 그런데 작가는 서구 패션의 역사와 1980년대 패션의 동향뿐만 아니라 의상에 관한 디테일한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어 작품에 대한 깊은 신뢰감을 갖게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비유적 표현들이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난희가 재민의 포옹 속에서 느끼는 다음과 같은 구절. “나는 내 몸의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한조각 구름, 아니 달빛 한주먹 가을 꽃나무에서 거둔 씨앗 하나…… 나는 풀리고 풀려서 하나의 맑은 이슬방울로 남아있는 듯했다”라든가 “먼 하늘에 첫별이 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내 사랑은 별빛이나 달빛 같은 건지 모른다. 밤에는 신비하게 아름다웠다가 아침이면 자체도 없이 사라지고 없는 달빛 그리고 별빛같이……”와 같은 표현들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원래 작가가 시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물위를 걷는 여자』는 1980년대 후반, 격동기의 길목에서 의지와 사랑으로 번뇌하며 여성사업가로 꿈을 이루는 한 여성상을 제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1990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순위 / 도서명 / 저자명 / 출판사명 / 분야
1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 김우중 / 김영사 / 비소설
2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 박완서 / 삼진기획 / 소설
3 자본주의, 공산주의 / 이원복 외/ 동아출판사 / 사회
4 내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 필립 체스터필드 / 을유문화사 / 비소설
5 사랑과 비즈니스에는 국경이 없더라 / 김영철 / 청림 / 비소설
6 오싹 오싹 공포체험 / 편집부 편/ 대교출판 / 아동
7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 칼릴 지브란 / 진선 / 시
8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 로버트 풀검 / 김영사 / 비소설
9 빵장수 야곱 / 노아벤샤 / 김영사 / 비소설
10 죽은 시인의 사회 / N.H.클라인바움 / 성현출판사 / 소설
11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 이문열 / 자유문학사 / 소설
12 성자가 된 청소부 / 바바하리다스 / 정신세계사 / 소설
13 빠빠라기 / 에리히 쇼일만 편 / 정신세계사 / 비소설
14 사랑한다는 것은 작은 웃음이다 마음절이는 것은 작은 웃음이다 / 서영은 편 / 박우사 / 시
15 숙제왕 그룹 / 이영준 / 아동교육문화연구회 / 아동
16 내인생 내가 선택하며 산다 / 웨인 다이어 / 을유문화사 / 비소설
17 물위를 걷는 여자 / 신달자 / 자유문학사 / 소설
18 하얀전쟁 / 안정효 / 고려원 / 소설
19 만남에서 동반까지 / 박렬 / 명선사 / 시
20 나 홀로 되어 남으리 / 김윤희 / 서연 /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