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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운 사람들 - 뛰어난 창조적 난봉꾼들

재산과 재능
시인 고티에는 플로베르에 대해서 재산이 그의 창작 재능의 일부라고 말했다고 한다. 외과의사의 아들인 플로베르는 상속받은 유산에 의존해서 평생 생계 걱정 없이 오직 소설 창작에 몰두하였다. 지극한 정성과 애정을 쏟았던 생질녀 때문에 만년에 경제적 곤경에 처한 적이 있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플로베르의 삶은 인류의 대부분이 벗어나지 못하는 경제적 곤궁에서 자유로운 일생이었다. 그의 수도승 같은 창작 전념은 문학사의 전설이 되었고 한때 작가 지망자들의 추종 모형이 되기도 했다. 상속 재산이 없었던들 플로베르의 문학적 업적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청빈을 숭상하는 동양 쪽 선비들이라 할지라도 무항산(無恒産)에 무항심(無恒心)이란 말의 진실됨을 거부하기는 힘들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동양 쪽 속담도 있고 돈이야 말로 세상의 모든 문을 여는 황금 열쇠라는 서양 쪽 속담도 있다. 둘 다 자본주의가 생겨나기 전에 유포된 말이다.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과장이라 하더라도 작가 서머싯 몸이 토로하는 세속 지혜를 통째로 물리치기는 쉽지 않다. “돈은 제육감(第六感)과 같아서 그것이 없다면 다른 오관도 제대로 쓸 수가 없다.”

▲ 귀스타브 플로베르 ©운영자

그러나 막대한 상속재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하는 일 없이 삶을 헛되이 낭비한 이들도 세상에는 많다. 옛날의 난봉꾼이란 사람들이 대체로 그러했다. 상속재산이 없었던들 살기 위한 노력 속에서 무엇인가 보람 있는 일을 할 수도 있었을 사람들에게 재산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재앙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재산이 창작 재능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재산을 가지고 한량생활에 몰두할 수도 있었지만 창작에 정진했다는 점에서 플로베르의 참모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고티에의 말에서 우리는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선망의 감정을 엿보게 된다. 질시로 이어지지 않는 선망은 긍정적인 것이다.
역경을 이겨내고 자기 성취를 이룬 사람들은 쉽게 세상 사람들의 경의와 선망을 받는다. 이에 비해서 유복한 환경 속에서 자기 성취를 이룩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응분의 경의를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티에의 플로베르 논평은 하나의 범례가 되어준다고 할 수 있다. 문인이나 예술가 가운데도 유복한 경제적 여건을 선용해서 자기성취나 자기완성을 도모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 경우 재산이 재능의 일부라고 하기 보다는 재산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자기완성을 도모했다는 측면을 우리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떠오르는 인물들이 많다. 아무라도 좋지만 내가 좋아하고 부러워하는 사람의 경우를 들어본다. 이들은 소모적 난봉꾼이나 한량 되기를 거부하고 삶을 즐기면서 자기 일에 몰두한 절대 탐구의 창조적 난봉꾼이라 할 수 있다.
루키노 비스콘티
루키노 비스콘티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통해서다. 1980년대 말 미국에서 케이블 TV로 보았다. 우리 쪽에서는 생소한 감독 이름이었으나 원작의 명성에 끌리어 보고 나서 참 좋은 영화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근자에 DVD로 다시 보고나서 역시 거장의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문학작품에 기초한 영화가 대개 작품의 의미와는 먼 거리에서 비속화되는 것이 보통인데 비스콘티의 영화는 그렇지 않다. 물론 의식과 사고에 관한 한 어떠한 내면 표현의 연기도 언어를 통한 표현과 인지를 따르지 못한다는 영화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 그러나 영화이기 때문에 더 잘 드러나는 측면도 있다. 가령 천박한 거리 악사들의 연주에 대해서 냉담한 채 귀족적 기품을 보여주는 미소년 타치오의 표정, 일정 거리를 두고 소년이 뒤를 밟는 베니스 골목길에서의 아센바흐의 고통스러운 노력,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타치오와 원경의 선박과 카메라 삼각대의 조합 등은 쉬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명장면들이다. 원작을 읽은 시청자에겐 각별한 감회를 안겨줄 것이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통해서 알게 되어 비스콘티 영화를 찾아보게 된 때문에 그의 작품은 역순으로 보게 된 셈이다. 연극과 오페라 연출가로서도 다채로운 활동을 한 비스콘티의 영화 처녀작은 1942년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강박관념>이다. 그래서 비스콘티의 명성이 확립된 후 뒤늦게 외국에서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미국 작가 제임스 케인이 1934년에 발표한 소설 『포스트맨은 두 번 벨을 울린다』를 극히 자유롭게 각색한 작품이다. 이 소설을 기초로 한 영화는 서너 편이 있고 1940년대에 나온 미국 영화에서는 라나 타나가 여주인공으로 나와 호평을 받았다. 네오리얼리즘이란 말은 비스콘티의 <강박관념>에서 시작된 운동에 이탈리아 영화비평가들이 붙인 이름이다. 로셀리니 감독의 <무방비도시>나 데시카 감독의 <슈샤인> <자전거 도둑> 같은 영화와 함께 알려지고 퍼졌지만 그 기원이 비스콘티인 셈이다. 50년대 초 경제적 조건이 향상되고 새것을 추구하는 관객들의 취향에 따라 퇴조하였지만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한때 전 세계 영화 팬들의 사랑과 갈채를 받았다. 서민들의 구차한 삶의 애환을 그대로 드러낸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이 밀라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부호 아들의 첫 영화작품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하나의 반어(反語)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비스콘티란 성 자체가 자작(子爵)을 뜻하지만 19세기에는 조상이 공작 칭호를 받았다. 루키노의 조부는 상원의원으로서 정치활동을 하는 한편 산업인으로 활동해서 재산가로서의 지위를 튼튼히 했다. 7남매 중 넷째였던 루키노는 조상 전래의 대저택에서 살았고 여름에는 산재한 별장이나 성에서 보냈다. 초등교육은 가정교사에게 배웠고 학교는 가지 않았다. 루키노는 특히 독일어와 음악을 배웠다 한다. 중학은 시립중학을 다녔으나 어머니에게 첼로를 배웠고 영국인 가정교사에게 체육교육을 받았다. 집에서는 틈틈이 콘서트를 열어 어머니는 피아노를 치고 아버지는 바리톤으로 노래했다. 또 집안에 무대를 만들어 아버지가 쓴 대본을 그의 친구들이 상연했다. 집안의 분위기를 따라 루키노는 셰익스피어를 번안해서 동년배들이 상연하기도 했다. 요컨대 집안이 자연발생적 종합 예술학교인 셈이었다.
서른 살 나던 1936년에 거장 장 르누아르를 알게 되어 조수로 일하게 된다. 르누아르의 <밑바닥> <위대한 환상>의 준비에도 관여했다. 이 때 파리와 밀라노를 분주히 오가며 르누아르의 동료나 친구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대개 인민전선파이거나 프랑스 공산당원이었다. 평생 정치적 좌파로 자처한 그의 정치적 입장은 이 때 형성된 것이다. 몇 차례 연극 무대장치를 시도해서 호평을 얻은 그는 42년 6월에 <강박관념>의 촬영에 들어갔고 시사회 때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검열에 걸렸으나 영화잡지의 편집장인 무솔리니의 장남이 손을 써서 약간의 가위질화 함께 공개가 허용되었다. <강박관념>은 결국 43년 5월에 로마에서 공개되었다. 관객 중에는 휘파람으로 항의하는 이들도 있고 각지에서는 상영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수많은 연극을 연출해서 명성을 얻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이어서 그는 『마의 산』의 영화화도 구상했으나 실현하지는 못했다. 72년에 심장병으로 쓰러진 그는 요양 끝에 다시 영화 두 편을 완성하고 76년 로마에서 영면하였다. 세상을 뜨던 날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을 연거푸 들었다는 일화를 남겨놓고 있다.
비스콘티는 영화감독 뿐 아니라 연극, 오페라 연출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세속적 성공을 칭송하자는 것이 아니다. 예술에 대한 기막힌 경도와 쉼 없는 자기교육을 통해서 예술가로서 대성했다는 것이 놀랍다는 것이다. 가령 1965년에 그는 체호프의 「벚꽃동산」을 연출했다. 연극은 대성공이었고 77회의 상연 중 유료관객이 7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비스콘티 자신은 「내 연극의 도정」이란 글에서 이 연극의 상연으로 종래 이탈리아 연극계의 고정관념이 깨졌다고 말하고 있다. 체호프의 「세 자매」「외숙 바니야」「갈매기」는 좋지만 「벚꽃동산」은 그렇지 않다는 괴상한 전설이 이탈리아 연극계에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 이 작품은 이탈리아에서 성공을 거둔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 그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깬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비스콘티는 원작자 체호프로 돌아간 것이다. 체호프의 애독자들은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벚꽃동산」은 희극으로 구상된 것이고 작자는 그것을 되풀이 강조했다. 그러나 유명한 스타니라프스키는 이 작품을 어두운 비극으로 연출했다. 죽기 전에 체호프는 이 문제로 연출가와 격렬한 논쟁까지 벌였다. 비스콘티는 작품의 정독을 통해서 체호프로 돌아가 작품을 연출해서 관객 동원에도 성공하고 이탈리아 연극계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가 연출한 작품이 모두 세계 연극 중의 고전이요 문제작이었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높은 안목을 잘 보여주는 국면이요 좌파 교조주의에서 자유로운 그의 정신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는 폴란드 귀족 가문의 14세 소년 타치오가 나온다. 소설에선 작가지만 영화에서는 음악가로 나오는 중년 예술가를 매혹시켜 그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게 하는 미소년이다. 타치오의 배역을 찾기 위해 비스콘티는 유럽 전역을 돌아다녔고 수천 명의 후보자 중에서 스웨덴 출신의 소년을 찾아내었다. 예술적 완벽성에 대한 집념과 예술가로서의 엄격성을 엿보게 한다. 생전에 그는 자기 묘비명에 “셰익스피어와 체호프와 베르디를 사랑해 마지않았다”고 써주면 좋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카뮈의 『이방인』을 영화화하기도 한 그는 한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영화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스케일이 크면서도 꾸준히 자기 세계를 확대해가며 세련시킨 예술가였다. 그는 최고의 문학과 연극과 음악과의 친숙을 통해서 인류의 보배로운 유산을 마음껏 즐기고 그것을 자기 예술의 자양으로 삼았다. 자기 삶을 모색과 발전의 역사로 만든 걸출한 인물은 그리 흔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 번지고 있는 오해된 평등주의와 엘리트에 대한 경원이 이러한 걸출한 인물에 대한 향심과 경의를 사실상 저해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매체에 종사한 예술가라면 조지 슈타이너는 인문주의 전통에 충실한 고급문학 분야에서 정진한 비평가요 학자이다.
조지 슈타이너
자신의 지적 궤적을 다룬 자전 『정오표 正誤表』에서 조지 슈타이너는 “현재 권력을 쥐고 있는 이론가들은 내 작품을 예스러운 인상주의로 생각한다”고 적고 있다. 자기의 비평적 저작이 하나의 유파도 형성하지 않았다는 것도 적고 있다. 또 교사가 갖게 되는 뚜렷한 보람은 자기를 능가하는 재능과 업적을 약속해주는 학생들과의 교섭이라고 하면서 케임브리지, 제네바, 미국 대학에서 접하게 된 네 사람을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 중의 한 여학생은 나중에 열렬한 모택동주의자가 되어 중국 서부에서 의료 활동을 하겠다며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 이니셜만 적었지만 신역사주의의 이론가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스티븐 그린블랏을 언급하면서 그의 재능은 좀더 깊고 견고한 책을 쓸 수 있을 터라고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자기의 저작에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표시하지 않고 다른 권력자의 것만 언급하며 주석을 붙이는 제자가 한 때 천재 칭호까지 받았으나 그 후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도 적고 있다.

▲ 조지 슈타이너 ©운영자

사실 조지 슈타이너는 추종자나 모방자를 낳을 수 없고 따라서 유파를 형성할 수 없는 유형의 비평가요 문인이다. 종횡무진한 박학과 서구 전통에 대한 투철한 이해 그리고 자기 생각을 명징하고 간곡하게 드러내는 문체가 그대로 그의 비평적 방법의 기초가 되어 있는데 그것을 따라가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구조주의 방법을 요령 있게 습득해서 작품의 구조적 분석을 시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또 근접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적 접근법을 도식적으로 시도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한동안 그것이 크게 유행한 것은 사회적 접근법이 상대적으로 응용하기 쉽다는 사정과 관련된다. 그러나 서구 전통에 대한 깊고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 거기서 나온 인용이나 인유를 단박에 알아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자기 생각을 명징하게 또 각별한 직접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도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방법적 차용과 응용을 염두에 두고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은 절망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책이 주는 즐거움이나 통찰 자체를 기대하면서 읽는 독자들에게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 있는 비평가로 비칠 것이다. 그의 탄력 있고 기민하면서도 파생(派生)적이지 않은 본격적 비평 능력은 가령 『하이데거』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방대한 양의 일차문서와 이차문서를 섭렵하고 나서 그는 하이데거 사상의 어떠한 측면도 그의 산문 스타일이란 현상과 분리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윤리학이 결여되어 있어 비인간적인 잔혹성에 직면하여 자신을 훼손시킨 하이데거의 존재론은(『존재와 시간』이 그렇듯이) 단편(斷片)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독자도 숨이 차면서 그의 해독과 요약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론을 불신하면서 감정적 지적 직업적 문제들을 처리해왔다고 적고 있는 그는 “문학에서의 이론이란 초조해진 직관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적고 있다. 이른바 신비평이 아직도 비평적 정통으로 통하던 1959년에 나온 그의 비평적 처녀작인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가 “구(舊)비평적 에세이”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것도 그의 비주류적인 비평적 성향을 잘 말해주고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부친은 수직적 신분상승을 성취하여 오스트리아 중앙은행의 고위직에 있던 인물이다. 집안 형편으로 법률과 재정 분야에서 일했지만 그는 다방면에 걸쳐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가진 맹렬한 독서가였다. 생활을 위해 지적 열망을 억압했던 그는 아들에게서 지적 갈망의 구현을 기대하여 어려서부터 고전어 교육을 비롯해 엄격한 지적 훈련을 부과하면서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였다. 조지 슈타이너는 자기의 생애가 “호메로스를 접했던 최초의 시간에 부친 각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학자와 교사가 되어주기를 바란 부친의 소망 중에서 교사는 되었으나 학자로서는 부친을 실망시켰다는 대목이 자전에 보인다. 그의 부친이 생각했던 학자는 전통적인 의미의 고전학자 혹은 문헌학자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슈타이너는 자기 딸을 호메로스 전문가로 만들었으니 부친의 소망을 대물림해서 성취시켰다고 할 수 있다.
가정에서 독일어를 쓰고 초등학교를 프랑스에서 다니고 미국에서 대학에서 나온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영겣턿불 3개 현대어가 그대로 모어가 되어 있다. 3개 현대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말하기, 읽기, 듣기, 쓰기에서 차이가 있나 실험해 보았지만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계산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꿈을 무슨 말로 꾸는가 실험해 보았는데 대개 그 전날 낮 동안에 무슨 말을 했느냐에 따라서 달라졌다 한다. 최면술로 제1언어를 가려보려는 실험도 해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즉 3개어가 아무런 차이 없이 그의 모어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벨 이후』란 큰 책에 보이는 삽화지만 유럽을 조국이라 생각하는 유럽 유대인의 심적 성향에 딱 부합하는 현상이다. 3개 국어를 모어를 가지고 있는 이의 지적 정신적 경제의 효율성은 막강하고도 은혜로운 것이었을 것이다. 제1외국어 하나에 숙달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정력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매우 한심스러운 우리의 처지에서 그는 참으로 선망에 값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여기서 얘기하려는 것은 특수 환경에서 유래한 특수한 재능에 대한 탄복이 아니다. 그러한 은혜로운 재능과 환경을 선용해서 그가 수행하고 시범한 지적 탐구와 편력의 넓이와 부피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지적 탐구를 즐겼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지적 탐구의 대상이 얼마나 방대한가 하는 것은 20권에 이르는 저서 색인에 잘 드러나 있다. 서구 지적 전통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최상의 것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그의 감식안은 남달리 날카롭고 하나의 언어문화에 함몰되지 않아 그의 정신적 지평은 시원하게 뚫려 있다. 그 결과 그는 온갖 종류의 허드레를 거부함으로써 지적 위엄을 지키고 있다. 그가 어느 저서의 모두에 인용하고 있는 스피노자의 한 줄은 그의 비평적 실천에서도 하나의 지표가 되었을 것이다. “뛰어난 모든 것은 드물고 또 어렵다.” 흔하디흔하고 쉽게 이루어지는 것에 매달리는 우리의 지적 비평적 풍토에서는 계고가 되어주는 말이다. 뛰어난 것에 대한 경의가 사라지는 것은 동시에 뛰어난 것에 대한 지향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뛰어남에 대한 경의가 없는 풍토에서 뛰어남이 성취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인구밀도는 세계 제일로 조밀하고 이렇다할 천연자원의 은총도 없는 이 땅에서 기대하고 의지할 것은 모든 분야에서 뛰어남의 성취 밖에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산이던 환경이던 그 선용을 통해서 삶을 즐기면서 뛰어남을 성취한 걸출한 인물들은 삶의 한 지표가 되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