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 -

웹진 대산문화

“나는 시를 썼고 그 뒤론 그 시들을 살았다” - 황금의 종족을 일으킬 영원한 어린이 랭보

극히 조숙한 천재로서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은 초기의 습작까지 포함해 모두가 15세부터 20세 사이에 쓴 것들이다. 시인 베를렌과 연인 사이였으나 관계를 청산한 이후 차차 문학에 관심을 잃고 유럽 곳곳을 유랑하였다. 아프리카에서 무기와 마약 밀매 등의 밑바닥 생활을 하던 그는 오른쪽 다리에 종양이 생겨 다리를 절단하고 마르세유에서 3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작품은 『보는 사람의 편지』『명정선』『일뤼미나시옹』『지옥의 계절』 등이 있다.

▲ 랭보 © 운영자

나는 봉크 역에서 기다렸다. 봉크 역은 새로 지은 작은 역으로, 랭보가 어린시절을 보낸 로슈에서 약 3km 떨어진 엔 강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작은 역의 대합실 의자에 앉아 새 운하에 걸쳐진 다리를 바라보았다. 1891년 8월 23일, 랭보는 로슈에 도착한 지 딱 한 달 만에 다시 떠나는 길이었다. 첫 기차는 6시 30분에 오기로 되어 있었고, 나는 랭보와 파리까지 동행하며 인터뷰를 할 참이었다. 하지만 랭보가 역에 도착한 시각은 6시 32분이었다. 여행하기에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기온은 8도로 추웠고 하늘은 구름에 덮여 있었다. 랭보의 막내 여동생 이자벨에 따르면, 랭보는 새벽 3시부터 흥분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기차가 오려면 무려 3시간의 시간이 남았음에도 랭보는 여행 준비를 서둘렀고, 너무 이른 시각이라서 그를 역으로 데려갈 말이 달리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채찍이 없어서 랭보는 자신의 가죽 허리띠를 빼들었지만 헛수고였고 봉크역에 도착한 것은 기차가 떠난 지 2분 후였다.
다음 열차는 12시 40분에 있었다. 그는 내게 미안하다며 집에서 좀 쉬고 다음 열차 시각에 만나자고 했다. 추위가 매서웠다. 8월인데도 밤에는 과수들이 얼어붙는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랭보와 로슈까지 돌아갔다가 다시 올까 하다가 그냥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가족 농장이 있는 로슈를 “슬픈 감옥”이라고 불렀다. 농부의 딸로서 검소하고 차가운 성격인 어머니 밑에서 프랑스 주입식의 초등학교겵峠閨?교육을 받은 랭보가 가정과 학교에 대해서 반발적이었다는 것은 이 지역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오전 열 시가 될 무렵 랭보가 다시 역전에 나타났다. 기차를 놓치고 집에 도착한 랭보는, 그의 막내누이에 따르면 ‘어찌됐든 빨리빨리 떠나고 싶어’ 어떤 음식도 먹기를 거부하고 혼자서 거의 완전하게 옷을 입은 채 오전 9시 30분이 되자 출발을 명령했다고 한다. 얼마 전에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여 앉은뱅이나 다름없이 된 환자임에도, 그는 여전히 미래를 향해 출항하는 뱃머리에서 첫 파도를 맞고자하는 파수병인 것이다. 그와 나는 작은 역의 대합실에서 기차를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화를 낼 것 같았고, 역장이 관리하는 화단에 대해서까지 빈정거렸다. 마로니에 아래에 달리아와 과꽃이 나란히 심어져 있었다. 나는 랭보를 기다리는 동안 여행가방에서 챙겨온 두 권짜리 책을 읽고 있었다. 랭보는 진정하기 위해 신경안정제 엘릭시르를 몇 방울 마셨다. 기차가 오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므로, 이 인터뷰는 파리행 기차 안에서가 아니라 결국 그가 그렇게 떠나고 싶어 했던 로슈에서 멀지 않은 작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졌다. 인터뷰가 끝나고 어디로 갈 것인지 정하지 않았지만, 나는 랭보와 동행하지도, 결코 그를 동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앞으로 세달 후, 그러니까 1891년 11월 10일 오전 10시 마르세유의 병원에서 누이 이자벨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할 것이라는 사실도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그나 나나 결국 지상의 여행은 집에서 끝날 테니까…….
⊙ 랭보 _ 마르세유에 있을 걸 그랬습니다. 그래도 그곳에 있었으면 따뜻하고 치료도 더 잘 받았을 텐데 말입니다.
⊙ 박형준 _ 다 나으면 다시 아프리카로 떠날 건가요?
⊙ 랭보 _ 네 그럴 겁니다. 원래 봄에 이곳에 올 예정이었습니다. 어머니께 결혼하러 가도 괜찮겠느냐고 편지를 보냈거든요. 결혼한다고 해서 아프리카에서의 일을 포기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나와 방랑생활을 같이할 사람이 필요해서 말이지요. 나는 결혼 지원자가 된 셈이지요. 편지에 작은 구혼광고에 요약해 적듯이 신부를 유혹할 만한 모든 설득 수단을 제시하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구매자 참고 사항”이라는 표현까지 썼는데, 그것은 마치 허름한 집에 ‘팔 집’이라고 써 붙여놓은 꼴이었지요.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금, 사향, 상아, 커피 등 아프리카의 산물들을 대상을 통해 보내는 것이다. 신원은? 아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잘 알고 있으며, 또 프랑스 영사인 가스파리에게서도 그의 정보를 알 수 있다. 사고방식은? 극히 토속적이다” 따위 등……. 그런데 결국 이렇게 다리를 자른 채로 어머니의 고향에 돌아왔군요. 내 방랑의 피를 물려받은 멋진 아들을 낳아줄 신부가 아니라 지금 나는 내 머리를 기댈 비석이나 내 죽은 몸을 누일 묘지를 등에 지고 이곳을 떠나게 된 셈입니다.
⊙ 박형준 _ 참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랭보 씨의 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베를렌의 손에 있던 『채색판화집』의 50여 편의 산문시가 몇 사람의 손을 거쳐 문학잡지 『르 보그Le Vogue』에 소개된 것을 알고 있나요? 1886년 6월 말의 제 10호에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더군요. “끝났다. 결국 끝났지만 안타깝다! 정체 미상의 이 영광스러운 고인의 작품은 이로써 모두 소개되었다.” 그들은 당신이 어디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 랭보 _ 시는 빌어먹을 짓이에요. 내가 아프리카에서 무기 암거래를 하고 있을 때인 1890년에는 『현대 프랑스La France moderne』지의 편집장이라는 사람이 편지를 보냈더군요. 나를 일컬어 “데카당적이고 상징주의적인 이 학파의 수장”이라고 일컫더군요. 최고의 찬사와 함께 원고를 보내달라는 그의 편지를 보자 먼 옛날에 잊었던 시에 대한 쓰라림과 즐거움과 슬픔이 뒤섞인 마음이 되살아난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답장을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그 전에도 잘 안 알려진 젊은 시인들을 주축으로 내 시에 대한 열기가 드높다는 친구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어요. 나는 시인들이라는 작자들이 써대는, 시라는 작은 그릇에 담긴 예쁜 꽃들에 진절머리가 난 사람입니다. 화병에 잘 다듬은 꽃을 꽂는 새색시의 꽃꽂이 같은 것이 아니라 시인이라면 적어도, 이 세상에 한번도 존재하지 않은,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다듬어진 것이 아닌 야생의 에너지가 철철 넘치는 그런 꽃과 별과 우주를 창조하려는 야심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는 얌전한, 새색시의 그런 빌어먹을 짓이 아니라 행동 그 자체입니다. 한 마디로 욕망, 야심인 겁니다.
막상 시 얘기가 나오자 랭보는 다리를 절단한 환자답지 않게 활력이 넘쳤다. 그는 자신의 첫 시집인 『지옥에서 보낸 한철』의 한 귀퉁이에 “미(美)를 무릎에 올려놓”았다고 표현한 바가 있었다. 나는 그 ‘미’가 좀 궁금했었는데, 갓 스무 살에 시단을 ‘쓸어버린’ 그 패기와 열정이 거의 죽어가는 환자의 얼굴에 다시 떠오르는 모습을 보자 젊은 시절 선배 문인들을 ‘바보 멍청이’ 취급했다는 그의 이력이 저절로 수긍이 갔다.
⊙ 박형준 _ 당신이 『지옥에서 보낸 한철』에서 “무릎에 올려놓았다는 미”는 혹시 ‘고답파’를 지칭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낭만주의적인 시나 그 전의 시를 가리키는 것인가요?
⊙ 랭보 _ 절단된 곳이 아픕니다. 마차를 타고 올 때도 불규칙한 진동 때문에 신경이 자극되어서 절단 부분을 두 손으로 감싸야 했습니다. 이 지방의 안개와 추위가 상처를 찌르고 있어요. 당신은 내게 그런 잊고 싶은 부분을 다시 자극하는군요. 여기 강과 맞닿아 있는 늪 위 기체들이 만들어내는 도깨비불처럼 당신은 잊고 싶은 전설을 되살려내려고 하고 있어요. 시 얘기는 이제 그만 둡시다.
⊙ 박형준 _ 미안하게 됐습니다. 당신은 15세 때 쓴 시 「유구르타」에서 발자크의 『서한』을 인용한 적이 있지요? “섭리는 때로 몇 세기에 걸치는 동안 같은 인물이 다시 나타나게 하는 법이다.” 당신은 시의 영웅이고, 따라서 어느 세기이든 다시 그 모습을 보이겠지만 말입니다. 제가 어느 나라, 어느 시간에서 왔든, 그리고 당신이 경멸해마지 않는 아주 예쁜 꽃을 따는 시인이든, 제 스스로가 다른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당신에게 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의 모습으로 당신이 잊고 싶어 하는 과거를 향해 망령처럼 찌르듯 나타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미래주의자라 하더라도 내게 당신 과거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 랭보 _ 뭔 말씀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 박형준 _ 그러니까 제 얘긴, 시가 아니더라도 유년시절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것입니다. 당신과 나는 완전히 다른 부류일 수는 있지만,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서로 영혼의 유사성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 랭보 _ 흠! 영혼의 유사성이라……. 나는 1854년 10월 20일에 샤를빌에서 태어났지요. 프랑스의 북서, 벨기에의 국경에 가깝지요. 이곳 로슈는 샤를빌에서 멀지 않은 농사일을 하는 모계 쪽의 농장이고요. 아버지는 군인으로 보병 대위였는데, 거의 집에 오지 않았지요. 아버지는 어머니가 자식을 출산할 때가 되면 샤를빌에 왔는데, 한곳에 머무르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어요. 그래서 아이를 품에 안아보기도 전에 조급증 때문에 떠나버렸어요. 그 사이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붙잡아두려고 다시 자식을 잉태하는 식이었고……. 어린시절 아버지는 신비 그 자체였어요. 나는 어머니 때문에 공부를 놀이처럼 즐기는 아이 같았지만, 그건 겉모습에 불과했어요. 나는 편모슬하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의 세상으로 탈출하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근무하는 알제리와 아랍의 강한 색깔, 불타는 대지, 태양, 무한함을 동경했지요.
⊙ 박형준 _ 당신은 아버지와 지낸 적이 거의 없을 텐데, 어떻게 아버지를 느꼈나요?
⊙ 랭보 _ 어머니는 아버지와 대판싸움 끝에 아버지가 영원히 곁을 떠나버리자 자신을 미망인이라 부르며 아버지의 흔적을 다 치워버렸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만 광에 남겨두었더군요. 어머니는 글이나 책, 작품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아버지가 알제리에서 직업과 관련해 기록한 문서들이 들어 있는 여행용 가방은 남겨두었어요. 나는 그 가방에서 프랑스어 문법책을 꺼내 읽곤 했습니다. 그 책의 간지엔 아버지가 쓴 “문법은 인간의 모든 지식의 기본이자 기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지요. 나는 어느 날 그 간지에 “자신이 원하는 것은 갖고, 자신이 말하는 것은 곰곰이 생각해보라”라는 견해를 덧붙였습니다. 나름으로 자식을 버린 아버지에게 복수를 한 것이지요.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아버지가 탐구한 아랍의 연구서에서 발견한 ‘물-사’의 이야기였습니다. 아랍인들은 그들이 물-사라고 부르는 하늘의 사자(使者)가 내려 올까봐 두려워하면서 삽니다. 물-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뒤엎고 인류를 대혼란 속에 내던지고 나서, 자신이 행한 모든 재앙과 자신이 흐르게 한 피의 파도에 대한 보상으로서 한동안 천복을 받은 군중을 다시 세웁니다. 물-사는 가장 편파적인 행위도 저지를 수 있으며, 법과 종교적 계율을 위반하고 물질적인 질서와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질서도 모두 전복시켜 바꾸어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이나 신적인 계시에 의해 행동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바꾸고 새로 만들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 게다가 법과 종교를 어기는 것 자체가 그의 신성한 임무의 보조적 증거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에 따르면 그의 도래가 임박했다는 것인데, 그 시기가 회교 기원 13세기 70년 또는 서기 1854년이라는 겁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쾌재를 불렀는데 그것은 내가 태어난 해이기 때문입니다. 물-사는 이마에 특이한 표식이 있는데, 그것은 렌즈와 유사합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서둘러 거울을 보았죠. 물-사의 생김새를 묘사한 얇은 입술과 약간 들린 코, 계란형의 멋있는 얼굴은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내게는 신적인 사명을 나타내는 표식이 없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좀더 노력하고 집중하면 그것이 보이리라 생각했습니다.
⊙ 박형준 _ 당신은 지금, 당신이 유년시절에 꿈꾸었던 그 물-사와 같은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찍이 그러한 유년기의 꿈을 당신은 십대 중반 때 ‘견자시론’으로 표명한 바가 있지 않습니까.
⊙ 랭보 _ 내가 파리로 올라올 무렵이 생각납니다. 나는 두 차례 파리로 가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베를렌에게 편지를 보내 파리로 올라옵니다. 그 무렵 나는 베를렌과 나를 연결시켜줄 다리로 시인 드메니를 지목하고 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일급 시인이 못되는 드메니에게 편지를 보내어 제 견자시론을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그 편지에서 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구리가 나팔로 변신하더라도 구리에게는 절대로 잘못한 바가 없고, 그건 나무가 바이올린이 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왜냐면 ‘나’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 박형준 _ 결국 시인의 재능은 의지나 선택의 영역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겠죠. 시인은 우선 자신의 영혼을 알기 위해 정신적인 훈련에, 그러니까 거의 신비적인 고행에 전념해야 된다는 그런…….
⊙ 랭보 _ 맞아요. 자기 영혼을 알게 되면 시인은 그것을 가꿔야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괴한 영혼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얼굴에 사마귀를 심어놓고 소중하게 기르는 그런 사람을 한번 상상해보세요. 시인은 모든 감각의 길고 거대하고 논리적인 착란에 의해 견자가 되는 것입니다. 착란을 통해, 즉 뒤틀림을 통해 사물을 다시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사실은 정말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어떤 모델을 따르는 일 없이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착란, 곧 뒤틀림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전복할 때 시인은 진정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타자이다’라는 선언은, 그러니까 그 사상의 개화에 입회하는 투시력을 의미합니다.
⊙ 박형준 _ 아쉽습니다. 당신이 어렵게 시에 대해 말문을 열었는데, 곧 기차가 올 시간입니다. 나는 기차가 선지자인, 견자시인인 당신을 무사히 파리까지 데려가기를 희망합니다. 당신이 얼른 쾌유되어서 다시 아프리카로 갈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나는 랭보에게 내 직업이 시인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건강한 마흔 둘이고 랭보는 죽어가는 서른일곱이었다. 문단 후배 뻘이긴 해도, 이 선지자에게 “시 쓰는 아무개”라고 굳이 소개해서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멀지않아 시의 영웅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결코 그의 후광 따위에 구걸하는 시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최후까지 그에게 베를렌에 대해서 물을까 망설였지만, 묻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랭보가 내게 동류(同類)를 느꼈다면, 베를렌이 나 자신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가 다리 한쪽을 잃고 남겨둔 구두 한 짝을 망연히 손에 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 랭보 _ 나는 스무 살에 시를 다 썼어요. 앞으로 나는 온 나라를 다 방랑할 것입니다. 시를 작파했던 스무 살 이후 내 방랑은 어쩌면 내가 상상으로 쓴 시의 참혹하고 기괴한 풍경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한 기나긴 행동의 여정이었습니다. 나는 시를 썼고, 그 뒤 단 한번 안주하지 않고 그 시들을 살았습니다. 나를 버린 내 아버지와 달리 나는 아들을 낳아 내가 탐험한 세계를 다 보여줄 것입니다. 나는 모든 욕망이 실현되는 땅을 내 아들에게 보여줄 것이고, 그래서 아들과 함께 빛의 대지를 향해 떠날 것입니다. 나는 더 살고 싶습니다. 당신이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인지, 어느 시간에서 온 사람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당신에게도 모험과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랭보가 기차에 오른 뒤 나는 한참동안 작은 역사에 머물러 있었다. 기적이 멀어져가자 나는 천천히 1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두 권짜리 평전의, 제 2권의 마지막 장을 읽어나갔다. 이윽고 판권란에 이르렀을 때, 거기엔 『랭보-바람구두를 신은 천재 시인』이라는 제목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서 1백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철시대를 봉해버리고/황금의 종족을 일으킬 한 어린이”의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 그리고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Jean-Nicolas Arthur Rimbaud)는 시의 역사에서 황금의 종족을 일으킬 아이로 거듭 도래하고 있었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그 아이의 외침이 페이지 속에서 울려나왔다. “시인이여! 뱃머리 끝에서 첫 파도를 맞는 파수병이 되어라!” “자신을 벗어나고 자신이 가진 시야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는 그 통찰력을 믿어라!” “아, 만약 정말로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