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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거룩해지는 순간 - 김정환 시인과의 만남
 


 

선생을 만나러 가려면 반가운 마음 한구석에 살짝 편치 않은 게 있음을 고백해야겠다. 선생처럼 시대정신을 고민하며 진득하게 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을 대할 때, 낯설음과 함께 왠지 내가 부족한 기분이 든다. 내 인생은 징검돌을 이리저리 건너뛰듯 해 직업은 물론이고 시 쓰기든 인간관계든 일관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고, 그게 내 성격인데 뭐, 이런 변명을 중얼거리게 된다. 선생은 시인으로서 또 문화운동가로서 철길을 달리는 기차처럼 변혁의 시대를 쉬지 않고 관통해 왔다. 이래저래 여러 사람들을 심기불편하게 할 만하다.
 

▲  김정환 시인의 자택에서 만난 두 사람. 뒤 쪽으로 CD가 빼곡하다.    © 운영자
 

음악의 탄생
지난 가을 선생은 시집 『드러남과 드러냄』(2007)으로 제9회 백석문학상을 받았다. 생애 처음 받는 상이라고 한다. 1980년 시 「마포, 강변동네에서」로 문단에 나왔으니 27년 만이고 출간된 시집들도 그 햇수만큼 된다. 나는 마음도 기쁘지만, 시집을 찬찬히 읽고 나니 그간 편치 않았던 뭔가가 없어지고 숙연해진다. 이시영 시인의 심사평을 들어보자.


이 시집은 우리에게 이상한 활력과 음악의 탄생을 선사한다. 김정환에게서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이 도저한 시적 활력과 음악은 어디로부터 기원하며, 도대체 앞행이 뒷행을 물고 달리는, 혹은 말들이 미끄러지면서 서슴없이 다른 차원의 말들을 낳는 이 눈부신 광경의 김정환식 정언명제들의 ‘연쇄적인 흐름’(「해설」 335면)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 『창작과비평』, 2007년 겨울호

“이 시집을 살려준 게 이시영 형이야. 다들 너무 길어서 지겹다고 읽지도 않는 걸 그 양반은 세 번을 읽었대.”


그런 이시영 시인도 이 시집은 ‘쉽게 읽히지 않고’, ‘방대하고’, ‘난해하다’고 했다. 동감이다. 그런데도 이상한 매력과 감동이 있다. 책을 덮고 나면 시를 읽은 게 아니라 찬란하고 슬픈 음악을 들은 느낌이다.


선생의 댁을 방문하면 늘 음악이 틀어져 있다. 글을 쓰실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뭘 듣냐, 그냥 틀어놓는 거지.”


선생의 음악 듣기는 고등학생 때 시작되어 대학 초반에는 동숭동 학림다방 구석에 진을 치고 영문학 원서를 읽고 있었다고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클래식은 내 친구』, 『내 영혼의 음악』이라는 교양서를 낼 만큼 한 클래식 하는데, 기독교방송에서 두 시간짜리 아침 클래식 방송 진행을 1년간 한 적도 있다. 음악을 좋아하는 후배들은 선생에게 귀한 CD를 받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의 시에서 ‘음악’이란 시어는 하나의 예술장르를 지칭하지 않고 포괄적인 상징어로 쓰인다. ‘음악=죽음’으로 쓰이기도 하고 ‘흐르는 죽음’이라는 시어도 보인다. 잘 모르겠어서 촌스럽게 물었더니 “시인이 그걸 말해주면 안 되지”로 마무리. 죽음이 음악으로 느껴지고, 음악이 또 죽음으로 느껴지는 경지가 있나 보다 생각할 뿐이다. 다시 이시영 시인의 심사평을 빌려, 김수영 시인이 최고의 시를 만났을 때 ‘죽음의 음악’이 들린다고 했다는 말을 옮겨볼 뿐이다.
 

▲     © 운영자

 

늙음, 치매, 만년작
선생의 첫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1982)를 나는 1987년에 1,800원을 주고 사서 읽었는데, 이성복 시인, 황지우 시인과는 또 다른 개성과 에너지와 신선함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 책이 아직 집에 있다. 펼쳐보니 선생의 이십대 사진이 있다. 머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헝클어진 느낌이지만(머릿결이 힘이 있다), 얼굴이 뽀얗고 풋풋하고 예쁘기까지 하다.


집회나 행사장에서 시 낭송이나 강연을 하는 선생을 멀리서 본 적은 있지만, 선생을 처음 대면한 건 1990년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이라는 단체에서 내가 일하게 되면서였다. 그때 선생은 의장이었고 굉장히 어르신 같은 느낌으로 기억하는데 계산해보니 삼십대밖에 안 된다. 시간이 꽤 흘렀다. 이번 시집에 유난히 늙음, 치매, 죽음 등의 시어가 많아 맘에 걸려 물어본다. 선생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음악에 만년작이라는 게 있어. 이전 작품이 기교가 드러나는 반면에, 치매 비슷하게 생활화되어 기교가 두드러지지 않지만 훨씬 원숙하지.”


이를테면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베르디가 은퇴했다가 이십 년 후 칠십대에 만들었다는 희극 오페라가 만년작이다.


“늙은 희극이지. 비극은 젊은 거거든. 만년작은 어느 나이가 돼서 쓰는 게 아니야.”


베토벤이 귀가 완전히 먼 후에 작곡했다는 현악 4중주는 만년작의 최고로 친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서른다섯에 죽었지만 죽기 3~4년 전에 만든 곡들은 이전 것과 다른데, 그걸 모차르트 만년작이라고 칭한다고.


“동굴벽화를 그리던 때부터 치면 예술의 나이가 수만 년이잖아. 그런데 예술이 예술의 나이를 먹지 않고 인생의 나이만 먹잖아. 예술이 인생의 나이를 벗어나서 예술 자체의 나이를 먹는 것, 그걸 만년작이라고 그러는 게 아닌가 싶어.”


“만년작이라는 게 치매 속이거든. 치매라는 게 다른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정작 본인은 시간 개념도 별로 없고 옛날 사람도 되었다가 정신이 멀쩡하게 돌아왔다가 그러잖아. 만년작이 그런 거 비슷한 거지. 베토벤 만년작 한 번 들어볼래?”


선생이 베토벤의 만년 현악 4중주로 음악을 바꾼다. 첫 소절부터 심상치 않다. 단순하고 간결한 듯하지만, 깊다.


“베토벤이 저걸 안 썼으면 모차르트에게 할 말이 없었을 거야. 그 뛰어난 모차르트가 안 가본 데가 저기거든.”


여리고 아름답고 맑은 슬픔이랄까? 얼핏 생의 끝자락도 보이는 듯하다.


“음악을 아는 사람은 어렵다고 하지만, 어렵긴 뭐가 어려워. 치매라는 게 그렇잖아. 보통하고 다른 거지 난해할 것까지야 있나. 또 다른 생을 사는 거지.”


선생은 우리 문단에 만년작을 쓸 만한 작가들이 많다고 본다. 몇 년 전 일부러 소설가들을 만나 만년작을 써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버릇대로 남 꼬시다가 물들어서 내가 써봐야겠네’하고 쓴 게 시집 『드러남과 드러냄』이다. 시행들의 미끄러지는 듯한 흐름은 음악일 수도, 음악=죽음일 수도, 치매 속 같은 만년작일 수도 있겠다. 평론가 황현산을 비롯, 여러 사람이 명편으로 꼽는 시 「실업의 잡무」는 이런 음악적, 치매적(?), 늙은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어 일독을 권한다.

…아내가 밥상을 가져온다. 벽 뒤에 욕실도 보인다. 아내는 살아서 죽음을 보고 있는 것처럼 밥상을 건넨다. 나는 모처럼 손을 내밀며 죽어서 삶을 보고 있는 것처럼 상을 받는다. 된장국 냄새가 구수하다.… (시 「실업의 잡무」 부분)


 

▲     © 운영자


 

시란 일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


이번 시집에서 처음 눈에 띄는 시어가 “소리글자”이다. 음악 또는 시어 ‘음악’과 관련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음악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소리잖아. 『드러남과 드러냄』을 쓰다가 소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 인터넷에 옛날 소리글자 자료가 많더라구. 소리글자는 문법이 중요한 게 아니더라. 문법 없는 뭔가를 찾아내야지. 그래야 대선 패배도 이겨낼 것 아니냐.”


소리글자가 처음 나타난 것은 엑서더스 때로 추정된다. 모세가 유대 군인, 상인, 노예를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해 가나안으로 가면서 이들에게 상형문자가 너무 어려우니까 소리글자를 만든 게 기원이라는 것이다. 선생의 관심은, 그렇다면 문자라는 게 ‘거룩함’의 실종이냐 아니면 은둔이냐, 아니면 발현이냐 하는 문제에 있다. 소리를 거룩함의 발현으로 보기도 하고 너무나 일상적인 것으로 보기도 하는 건 현재에도 계속되는데, 그 가운데 있는 것이 음악이고, 미술이고, 문법이고, 언어라는 것이다.


선생이 말하는 ‘거룩함’이라는 게 종교나 신화와는 다른 걸까?


“신화 시대 사람들이 종교로 제도화 되었을 때보다 좀더 거룩했을 것 같긴 해. 한데 그렇게만 봐서 우리 역사를 설명할 수 있을까?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는 거고. 다만 동물의 언어, 식물의 언어에 대해 생각해봄으로써 우리가 놓친 게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거지. 아니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아직도 갖고 있는 게 무엇인가겠지. 문자란 뭘까? 사실 시라는 게 일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거 아니겠냐? 쓸모없음의 핵심이 거룩함이잖아. 거룩함이란 걸 어디다 쓰냐? 하지만 거룩함이라는 건, 자기와 다르거나 낯설거나 보다 우월한 존재에 대한 지향 같은 거잖아. 시의 역할이란 게 그런 게 아닐까. 그렇다면 소리부터 시작해야겠다 싶은 거지.”


다음에 나올 시집은 ‘소리와 거룩함 사이’에 대한 것으로 1만3천행에 이른다고 한다(이번 시집의 두 배쯤 되는 분량). 제목은 『거룩한 줄넘기』. 이미 출판사에 원고가 넘어가 있다.


음악에 대해 질문을 해도 소리에 대해 질문을 해도 선생의 답은 늘 시로 끝난다. 얼핏 전방위적 작업으로 보이는 저술활동에 대해서도 선생은 시를 알기 위해서 다른 예술을 공부하는 것이라며 “내 시작도 시고 마지막도 시”라고 한다.

공공의 비용
『김정환 1980-1999』는 첫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부터 『순금의 기억』(1999)까지 이십년 동안 출간된 스무 권쯤 되는 시집(오페라 대본도 하나 있다)을 모아놓은 전집이다. 단행본 한 권으로 묶은 대신 글자는 전 본문이 그림 캡션 크기로 깨알만하다. 어지간히 눈이 좋거나 의지가 굳지 않고서는 20쪽 이상을 읽기 힘들다(20쪽에 시집 한 권이 들어간다). 이 괴물을 이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다행히 나는 눈도 좋다.


이 전집은 마치 우리 문화운동사이자 이념의 변천사이자, 선생의 20년 생애의 기록 같다. 우리가 이런 암울하고 억압적인 시대를 지나왔다는 걸 나도 잠시 잊고 있었던 듯하다. 황지우 시인이 선생과 대담(『신동아』 1999년 3월호)하는 자리에서 말했듯 ‘그때는 시대가 우리를 건드린’ 때였고, 시인이 시에만 집중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약칭, 자실) 시절부터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이후 민중문화운동연합,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으로 변천) 의장, 한국문학학교 교장 등 공무가 많은 와중에 선생의 시 작업과 저술 활동은 계속되었다. 직장을 다니는 시인들만큼 시간이 부족했을 터이고 전업작가만큼 돈이 부족했으리라. 당시 단체 일이라는 게 긴장과 격무는 기본이고, 월급이 전혀 없으니 차비와 밥값은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하며 단체의 재정도 어려움이 많았다. 선생은 책을 쓰고 번역을 하면서 단체의 부족한 재정까지 메웠다.


2006년 선생은 12년 동안 운영하던 한국문학학교를 민족문학작가회의에 이관했다. 1980년에 결혼한 후 공무와 공공의 비용에서 벗어난 것은 이때가 처음. “어찌나 한가롭고 마음이 편한지 내가 갈 때가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니까.”


한가한데 시집이나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한 작업이 전작 시집 『드러남과 드러냄』. 이 시집은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권 ‘졸업앨범’, 2권 ‘오래된 나들이.’ 1권 졸업앨범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앨범 형식을 그대로 따랐다. 중고교 시절을 돌아보게 된 계기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보성고가 창립 100주년이 되어 동창회에서 찾아 왔길래 심심해서 졸업앨범을 펼쳐보았다고 한다. 사람이 생을 살면서 운명적으로 놓칠 수밖에 없게 되는 것과 놓치지 않았던 것과의 관계를 재정립해보고 싶었다고. “문학이 그런 지점에 있는 거 아니겠냐? 현실과 연관된, 현실일탈 같은 거.”


선생의 왕성한 창작 에너지가 신기하기도 하고 부러울 때도 있다. 누구는 ‘다산성의 상징’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공포감을 줄 정도의 생산성’이라고도 한다. 창작과정 상의 특징이 있나? 선생은 “글쟁이가 글로 먹고 살라니 그런 거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이 글을 쓰다 보니 드는 생각이 있다. 비밀은 선생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정에 있는 게 아닐까? 내 경험상 뭔가를 싫어하는 일은 힘이 많이 들지만,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데는 그리 몸이 힘들지 않다.


시 창작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이제야 선생에게 주어진 듯하다. 불도저처럼 현실을 일구면서 살아오신 선생 같은 선배가 있었기에 우리가 시인이라는 온전한 이름을 누리고 있는 지금이 있다. 『드러남과 드러냄』 뒤표지에 고형렬 시인이 쓴 글이 멋지다.


“급기야 친구는 커다란 구두를 벗어던지고, 슬리퍼에 맨발을 건 채 서울을 보행하는 한 편의 음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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