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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걸으면 걸을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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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역학을 공부하던 선배가 갑자기 생년월일을 물 었다. 내 사주에는 말씀 언(言)이 세 개나 들어서 직업을 아주 잘 골랐다고 했다. 스무 해가 넘도록 아나운서라는 직업으로 시청자들 앞에 서고 있어 운명인가 싶다가 고개 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친구나 직장동료와의 대화는 차치 하더라도, 나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딸과의 대화는 얼마 나 힘겨운가. 어르고 달래보아도 벽처럼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조곤조곤 타일렀던 목소리가 이내 날카롭게 변하고 결국 모진 말들을 쏟아내고야 만다.
조지아 오키프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항상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란 마지막 인사말을 덧붙였 다고 한다.1)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가까이 있 다는 뜻이다.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너의 얼굴을 어루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데 우리의 마음은 서로 를 등지고 얼마나 멀리 가버린 걸까?
간서치 이덕무 선생은 지독한 가난과 지극한 슬픔도 책만 읽으면 모두 잊을 수 있다던데 어림도 없구나! 분명 눈동자는 글자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지만 한자리 만을 맴돌 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책을 덮 고, 음악의 볼륨을 있는 대로 키우고, 팔을 휙휙 내저으 며 앞서 가는 사람들을 모두 따라잡겠다는 기세로 걷는 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어도, 집밖에서 두 다리를 움직여 야만 터질 것 같은 심장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한참을 걷다 집으로 돌아가고 주말에는 더 먼 곳으로 갔다. 나무가 많고 한적한 길을 찾았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걸었다. 걸으면 걸 을수록. 끝도 없이 멀어지던 내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그 아이에게로 되돌아간다. 바위틈에 자리 잡은 초록빛 이끼도, 수줍게 피어있는 작은 꽃들도 기특하기 짝이 없구나. 이렇게 작은 모습으로도 살아가는 존재가 또 있지.
처음 내 품에 안겼을 때, 천천히 움직이던 너의 까만 눈동자와 꼭 쥔 두 손을 기억한다. 다섯 살 즈음이었을까? 야근을 끝내고 집에 들어왔을 때, 눈이 펑펑 내려 엄마가 집에 오지 못할까봐 걱정 했다며 와락 안기며 재잘대던 목소리가 생생하다. 감기 몸살로 누워있던 내게 잘 먹어야 한다며 우 유 한 잔과 치즈를 쟁반에 담아 침대 옆에 놓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아주던 너의 뒷모습과 국어시 험을 망쳤다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내 가슴에 묻고 흐느끼던 떨림이 명치끝을 툭툭 건드린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말한다. 듣는 이는 자신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불특정 다 수일 수도 있다. 말이 상대에게 전달되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고 서로의 이야기를 확장하기 위해 서 리베카 솔닛은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질문을 던지고, 잠시 멈추고, 침묵에 귀 기울이라 고. 그동안 질문은 던졌으나 잠시 멈추지 못했고 침묵에 귀 기울이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말들은 그 아이의 귓가에 닿기 전에 흩어졌을 것이다. 사전에서 言을 찾아본다. ‘말씀 언’ 외에 ‘화기애애할 은’으로도 쓰인다. 나의 말이 온기를 담아 너의 귓가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기를,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힘든 시기를 그럭저럭 잘 지내왔다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1)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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