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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재다능한 태일원(台一園)의 귀공자
- 나의 아버지 최재서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차남 최낙, 3남 최달, 4남 최승언, 필자 최양희, 어머니 이태원, 필자의 딸 김미경, 아버지 최재서 씨. 1962년이나 1963년 쯤의 사진.

나는 우리 집안 6남매 중 넷째이다. 어렸을 때는 황해도 해주에 있는 외갓집에서 자랐다. 내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은 거의 한 해 거리로 탄생하는 자식들에 시달려 지쳤을 것이다. 4, 5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외갓집에서 서울에 있는 집으로 살러 왔는데, 코스모스와 다알리아 꽃들이 만발한 정원의 등나무 꽃이 주렁주렁 매달린 툇마루에서 애기를 안고 계신 어머니와 2층 서재에서 책을 읽고 계신 아버지를 만난 것이 아버지에 대한 첫 기억이다.
이따금 아버지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을까 상상해보았다. 물론 단편적으로 들은 이야기를 한데 모아 나름대로 꾸며냈지만. 그래서인지 사촌 고순자가 돌아가신 고모의 자서전을 보내왔을 때 그날 밤으로 그 책을 다 읽어버렸다. 다음은 그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최재서(崔載瑞) 오빠에 관한 생각>
“존 골즈워디(John Galsworthy)의 소설 The Apple Tree에 ‘(Man’s) Character is (his) fate.’(?)라는 구절이 있는데，나는 오빠(재서)를 추억할 때 늘 이 구절이 머리에 떠오르곤 한다. 오빠의 성격과 그가 걸어온 기구한 운명.
어머님의 말씀에 오빠의 태몽은 ‘움터 나오는 매화나무’였다고 몇 번이고 나에게 일러주셨다. 이른 봄의 따스한 햇볕과 요동을 시작한 땅의 기를 받아 매화는 움트기 시작하고 꽃을 피우게 된다. 과연 오빠는 수양산의 정기와, 위로 할머니를 위시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극하신 사랑을 받는 태일원(台一園 과수원)의 유일한 귀공자였다. 5남매 중의 외아들! 흔히 해주에서 네 번째라고 말들을 했던 아버지의 부와 타고난 그의 다재다능한 소질과 두뇌, 오빠에게는 막힐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언변 또한 대단해서，연세대 강의에는 강당에서 마이크가 필요하도록 초만원이었다고 들었다. 취미로 바이올린, 스케이트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경성제대(현 서울대) 웅변대회에서 메달을 탔고,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스스로 연출했다고 들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지도하던 사토 기요시(佐藤淸) 교수가 그의 실력을 인정하여 경성제대 영문과 교수에 임명하였으나, ‘조선인을 기용했다’하여 타 교수들의 반대로 1년 후에는 법전(法專, 현 서울대 법대)으로 자리를 옮겨야했던 그 시절의 그 좌절과 울분. 그 격분을 술로 달래며, 밤늦게 귀가하여 울부짖던 그의 피를 토하는 절규! “I have no country, no father, and no money…….”
식민지가 아닌 지금의 조국의 품에 안겨졌드라면 그의 소질은 순조롭고 바르게 꽃피고 열매를 거두었을 것을….”*

* 최보경(1933-2006) 저, 고순자 편,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현대문화출판, 2011, pp.194~195

▲ 왼쪽부터 최낙, 필자, 어머니, 아버지, 최승언, 최달, 전 사위 김형만 씨

아버지는 여름이면 풀 먹여 반듯하게 다린 흰 모시 바지저고리를 입고 서재에서 책에 둘러싸여 계셨고, 겨울이면 입은 옷이 솜 든 바지저고리와 마고자로 바뀐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똑같은 모습으로, 대학에 강의를 나가지 않는 한 항상 똑같은 자리에 앉아 연구하고 글을 쓰셨다. 어머니는 2시간마다 차 쟁반에 주전자와 찻잔을 담아, 긴 낭하를 부엌에서부터 아버지의 서재로 동동거리며 나르셨다. 아버지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뒷산(우리는 남산 밑에 살았다)에 산보하고 약수를 드시고 오셨는데 산보 중에 항상 그날의 강의 준비를 하셨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늘 고전음악을 배경으로 들으면서 공부를 하셨는데 덕분에 우리들도 항상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다. 아버지는 몸매가 늘씬하고 양복 입은 품이 참 보기 좋았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가 집에 계실 때는 항상 소곤소곤 이야기를 해야 했고 소리 내 웃고 우는 일은 아주 흥분하지 않은 한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아버지가 집에 계시지 않을 땐 크게 소리 지르면서 웃고 다투며 요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아이들이 부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자라, 그 울분이 아버지 계시지 않을 때 터져 나왔을 것이다.

식사 때가 아니면 아버지와 같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일은 생각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꽤 유머러스해서 가족을 웃기곤 하셨는데, 그런데도 아버지를 무척 어려워했던 생각만 난다.

생활환경을 아름답게 하시느라고 노력하신 데 비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태평양전쟁(2차 대전)중에 자라고, 6·25 동란 등 2차례의 큰 난을 겪느라고 항상 배고프던 생각에 지금도 음식을 필요 이상 중요시한다. 학교에서 월사금을 제때 내지 않는다고 야단맞고 집에 와서 빨리 내달라고 조르던 일, 또 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던 일, 여학교에 입학했을 때 구두를 사지 못해, 고모들이 신다가 시집갈 때 버리고 간 뾰족 구두의 뒤꿈치를 잘라 신고 학교에 갔다 다른 아이들이 잔인하게 놀리던 일들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1985년도에 출판된 Memoir of a Korean Queen 의 책 표지에 실린 필자 최양희 씨의 사진

아버지에 대한 비상한 존경심과 과로에 시달려 지쳐하는 아버지를 동정하는 심정이 늘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앞섰다.

우리들이 자란 집 중 제일 기억에 남는 집은 남산 밑에 있던 집이었다. 집 앞은 동산이어서(남산이 여기서 끝났다) 봄이면 진달래와 개나리꽃이 동산을 감쌌다. 그 동산 밑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방학때 해주 외갓집에서 즐기던 옥수 같이 맑고 깊은 광석천(廣石川溪谷) 같지는 않았지만, 부모님도 아마 그 풍경을 연상하고 거기에 사는 것을 즐기시는 것 같았다. 뜰에는 하늘을 쏟듯이 큰, 한 쌍의 살구나무가 이른 봄이면 만발한 꽃으로 하늘을 가렸다. 아버지는 이 집을 남계숙(南溪塾)이라고 이름 지었다. 방이 많았는데 방의 벽마다 있던 책장에 영문학 서적이 꽉꽉 차 있어, 우리 형제는 늘 영어 공부하는 일을 먹고 자는 것 같이 보통사로 생각했다. 날이 흐름에 따라 책이 차차 늘어서 뒤뜰에 있는 별채를 도서관으로 하고 한때는 사서관이 도서를 정리했던 일이 기억난다.

적어도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낭만적 환경에서의 생활이 1950년 6월 25일, 하루 아침에 끝이 났다. 인민군이 침입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가 납치되었고, 하루는 2층 집 높은 처마에 숨었던 작은오빠를 밤중에 인민군이 찾아내어 총을 대고 귀청이 터질듯 큰소리 지르며 끌고 갔다. 형용치 못할 엄청난 공포심에 눌려 극도로 예민한 나이의 내가 어찌 이 일을 감당했는지. 아마 그 후 수두룩하게 일어나는 인생의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싸워나가듯이 이때도 그 난관을 제 나름대로 극복했을 것이다. 그때 집안에는 나와 두 동생만이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

납치된 젊은이들은 이북으로 강행시키는데, 그 전날 잡힌 젊은이들은 서울에 흩어져있는 각 국민학교에 주둔시킨다는 소문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다음 날 하루 종일 서울 장안을 헤매다가, 해가 질 무렵 한 국민학교에 이르니 오빠가 담에 등을 대고 서 있지 않는가! 우리가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며, “어머니, 저희들은 내일 새벽에 북진을 시작하니, 형님 조심하라고 일러 주세요” 했다. 이미 해가 저문 어두운 서울 길을 걸어가시는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가슴을 찔렀다.

다음 날 문득 아버지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처음에는 혼을 만나는 것 같이 가슴이 싸늘했다. 어떻게 석방이 되셨는지를 물을 경황도 없었고 물어보아야 대답도 안 하셨을 것이다. 허둥지둥 필수품을 챙겨서 짊어지고 누상동에 사시던 고모 댁에 피신 가려고 하는데, 잡혀갔던 오빠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며 하는 말이 “북으로 강행진 중 미군의 폭격을 맞아 흩어지는 판에 길가에서 음식을 팔던 장사들과 섞여서 도망했다”고 했다. 가슴이 철렁 내렸다. 허둥지둥 오빠에게 여자 옷을 입히고 머리에 스카프를 씌워 온 집안이 같이 서대문 밖 누상동 고모 댁으로 떠났다. 서울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곱슬머리에 키는 껑충하게 크고, 절망에 찬 굽은 등에 쌀 보따리를 짊어진 아버지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너무 목이 말라서 어떤 골목을 지나다 한 집 대문을 두드리니 한 여인이 창문을 열고 내다보기에, 물을 좀 얻어먹을 수 있는가, 하니 다행히 물 한 사발을 내밀고 문을 꽉 닫아버렸다. 시민들이 모두 겁에 질려있었다.

▲ 현재의 최양희 씨

누상동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밤낮으로 폭격하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격전이였다. 집이 계곡에 있어 산에서 내리는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크고 튼튼하게 돌벽으로 싼 지하 수로가 집 뒤에 있었는데 여기에 피신하고 밤낮으로 폭격을 견뎠다. 독실한 신자였던 고모가 밤새 큰소리로 성경을 읽으셔서 우리들은 그것을 들으며 정신을 간수했다. 인민군이 폭탄에 맞아 피를 토하며 수구로 떨어지곤 했다. 막내 동생인 고 최승언 교수(파리 7대학)가 겨우 다섯 살이었을 때다.

그 후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여 UN군과 국군이 다시 후퇴하게 되니 어머니와 난 두 동생을 데리고 눈보라가 치는 1950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서울역으로 가 천장이 없는 부산행 화물차를 얻어 타고 피난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의 장서를 다 버리고 갈 수 없다하여 출판사에서 그의 장서와 아버지를 우선 데리고 떠났고, 작은오빠는 국군에 지원했으며 큰오빠(미국 인디애나주립대 수학 교수)는 항상 혼자서 도망 다니기 바빴다. 그리하여 나는 어린 동생 둘을 막내는 등에 업고 어머니를 모시고, 그 무겁던 옷 고리를 큰동생과 번갈아 끌고 가면서 기막힌 피난길을 나섰다. 이것이 1950년 말이었다. 한없이 쓸 수 없으니 여기서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