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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만 스스로 등불이 되어 갈 뿐 - 내가 받은 학교 교육

1. 스승은 운명이다

불가(佛家)에서는 각자(覺者)가 되는 방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하나는 경전을 익히고 깨닫는 과정을 거쳐 궁극에 이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즉심(卽心)과 돈오(頓悟)를 통해 부처의 마음으로 곧바로 뛰어드는 길이다. ‘교(敎)’와 ‘선(禪)’으로 분화되어 정착한 이런 학제에서도 강사(講師)와 선사(禪師)의 존재는 학인(學人)에게 절대적이다. 부부의 연을 7천생, 부모 자식 간의 연을 8천생으로 여긴 반면, 사제지간을 1만생의 인연으로 간주한 것만 봐도 가르침이 한 운명을 어떤 길로 이끄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새삼 내가 학교에서 받은 문학교육을 돌이켜보니 “스승은 운명이다”라고 말한 알베르 카뮈의 고백이 떠오른다. 청각장애를 가진 어머니 슬하에서 가난하게 성장한 카뮈가 스승인 장 그르니에를 만나지 않았다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로 대성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학교’라는 외연보다는 ‘선생’ 혹은 ‘그들의 지침’ 정도로 요약되는 내연에 대해 기술함으로써 내가 받은 문학교육을 대신하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스승과의 문학적 에피소드를 통해 내가 진일보할 수 있었던 소소한 성장의 기록 정도가 될 것이다.

2. 뇌관을 건드린 불꽃

1992년 내 나이 만 열아홉, 영혼의 렌즈가 가장 투명하던 그 시절 송하섭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대학 1학년 1학기 월요일 3, 4교시 <문장론> 수업이었다. 선생님은 첫 수업부터 강의가 끝날 무렵이면, 백묵을 들어 칠판 한 가운데 단어 하나를 쓰고 나가셨다. ‘여행’, ‘어머니’, ‘여가’…… 이를 소재로 매주 원고지 20장 내외의 글을 한 편씩 지어오는 것이 과제였다.

작문을 위해서는 끝없이 문장을 지우고 다시 써야만 했는데, 나는 그 작업이 더없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연습장 위에서 지저분하게 번져나가던 흑연 가루들이 나를 자유롭게 하고 한 편을 완결할 때마다 내 정신의 키는 한 뼘씩 성장했다. 한 학기가 16주임을 감안하면 지금 생각해도 적지 않은 분량의 과제였다.

다음 주가 되면 선생님께서는 뛰어난 순서대로 대략 다섯 편의 글을 읽어주셨다. 동급생들의 작문 실력은 놀라웠다. 각자 다니던 고교에서 연마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글이 발표될 때마다 학우들은 감탄하며 서로에게 갈채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선생님은 모든 리포트마다 자신의 감상과 부족한 점 등을 친필로 적어 주셨다.

그러나 새로운 월요일이 거듭될수록 예상치 못한 일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지난 주에 발표된 너 댓 명의 글이 다시 읽히는 일이 반복됐던 것이다. 선택된 자들이 일말의 안도와 성취감을 느끼는 동안 나머지 학생들은 입술을 깨물며 치기 싫은 박수를 쳐야만 했다. ‘박수부대원’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오로지 최고의 문장을 쓰는 일 외에 방도가 없었다.

그러자 일주일의 생활이 월요일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문장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은 지대했고, 수업은 그만큼 흡인력이 있었으며, 그것은 혼몽한 봄의 열기와 뭐든지 열심히 하려는 신입생의 저돌성이 기묘하게 맞물려 걷잡을 수 없이 가열됐다. 나머지 요일은 월요일에 제출할 작문 숙제에 바쳐졌다. 월요일 오후에 체육 수업이 있었지만 그 수업에 관심을 갖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문장론> 수업이 끝나면 대부분 술집으로 몰려가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선생님은 우리 너 댓 명을 당신의 연구실로 자주 부르셨다. 그리고 우리의 눈동자를 찬찬히 바라보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글을 쓰면 어떤 기쁨을 느낄 수 있는지 오랫동안 설명해 주셨다. 몇은 겸연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고, 몇은 두려우면서도 그 말씀들을 가슴에 담았다. 특히 선생님께서는 내 글을 읽으신 뒤에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네, 이번 작문 말이야, 아주 좋아요! 아주 좋아!”

3. 위로의 주문(呪文)

곧 나는 과내에 있는 문학회와 동인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월요일과 금요일 주 2회 모이는 문학회에서는 독서토론과 이론을 공부했고, 동인회에서는 수요일마다 합평회가 끊임없이 열렸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공부하며 술을 마셨던 경험은 훗날 단단한 창작의 토대가 되었다. 주말에도 학교에 모여 책을 읽었고 방학 중에는 스터디를 조직해 문학의 끈을 놓지 않았다.

<문장론> 수업이 끝난 후에도 나를 포함한 몇몇 친구들은 습작품을 들고 송하섭 선생님의 연구실에 가끔 드나들었다. 선생님께서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생각만큼 많은 글을 쓸 수는 없었다. 쓰고 나면 어딘가 모자라고 불완전한 느낌에 절망감부터 앞섰다. 작품 평을 듣기 위해 연구실로 향할 때면 까닭 없이 망설여지고 주눅부터 들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빠르고 경쾌한 말투로 이렇게 작품 평을 하시면 다시 활짝 피어나 창작욕이 들끓곤 했다.

“아주 좋아요!”

이 두 마디 외침은 습작의 고통과 두려움을 단번에 불식시키는 위로의 주문(呪文)이었다. 이 칭찬을 듣고 나면 나는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연구실문을 닫고 나오는 그 순간부터 인문대 3층 복도를 전속력으로 뛰어다니다가 그 뜨거움을 감당하지 못해 운동장까지 단숨에 달음박질 치곤 했다.

그 후로 선생님은 나의 ‘뉴스 통보 0순위’가 되었다. 대학 문학상을 받을 때도, 졸업 후 문학 연구원에 입원했을 때도, 등단을 했을 때도, 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했을 때도 나는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나의 ‘주술사(呪術師)’를 떠올렸다. 아니 그 주문을 갈망했다. 선생님은 내게 끝없이 엄지를 내밀어 정진의 탄력적 주술을 걸었던 셈이다.

지금도 나는 소설 쓰기가 무섭거나 집필 중인 글을 과연 끝낼 수 있을지 회의에 빠질 때면 간혹 자기 최면을 건다. 나름대로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을 하는 것이다.

‘너는 지금 문장론 수업의 한 가운데 있다. 두려워 말자. 새로운 월요일이 오면 이 글은 저들 앞에 발표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너의 글은 아주 좋다는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아주 좋다는…….’

4. 꺼칠한 음성의 일갈(一喝)

2000년 시드니로 유학을 떠났을 때였다. 랭귀지 스쿨에서 영어공부를 하던 중에 등단 소식을 들었다. 이후 나는 모국어와 외국어라는 이질적 경계 사이에서 교활한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영어를 공부하다보면 소설이 몹시 쓰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반면에 한국어로 소설을 쓰고 있으면 영어 실력이 떨어질까 두려웠다.

무엇보다 외로웠던 일은 문단 혹은 동료 문인과의 교류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해외에 체류하는 신인 등단자에게 청탁이 자주 올 리가 없었고, 작품을 완성하더라도 잘 쓴 것인지 물어볼 사람이 없었으며, 간혹 발표를 하더라도 반응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남반구의 시드니가 여름일 때, 북반구인 서울의 겨울을 상상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동안 창작에 대한 열의는 점차 시들해져 갔다.

그렇게 2년을 어영부영 보내던 어느 날, 김수복 선생님께 한 통의 이메일이 날아들었다. 선생님은 시를 가르쳤기 때문에 장르가 달라서 학부 과정 동안 그리 많은 접촉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더욱이 말수가 굉장히 적으신 분이고 어쩌다 입을 여시더라도 꺼칠하고 투박한 음성으로 몇 마디 안 하시는 분이어서 짧은 메일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유독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든 건 맨 마지막 문장이었다.

‘쉽게 사그라지고 마는 불꽃이 되어선 안 돼!’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어디선가 그 꺼칠한 고함이 벼락처럼 들리며 둔탁한 뭔가가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 이후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활동하는 중에도 선생님의 외침은 내가 안이해질 때마다 귓전을 때렸다. 어디선가 부리부리한 눈매로 꾸짖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이다. 어느덧 5년이 지나서 무뎌질 법도 한데, 여전히 졸음을 쪼개는 한 줄기의 날선 죽비처럼 호되고 맵다.

5. 다만 스스로 등불이 되어 갈 뿐

문학 작품이 천재의 영감과 광기에 의해 탄생하는 비의적인 산물이라고 믿는 이들은 학교 문학 교육을 신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의 전 세대만 하더라도 전쟁과 가난을 겪으며 공교육을 중퇴한 작가들이 빛나는 작품을 양산하여 한국 문학사를 수놓기도 했다. 그러나 형태가 다를 뿐 그 분들에게는 오늘의 좁은 교실보다 더욱 절절하고 생생한 가르침의 현장이 존재했을 것이다.

어쩌면 학교의 문학교육이란 배경 지식만 제공할 따름이고 실제 이를 종합하고 예술적 결과물로 끌어올리는 작업은 온전한 개인의 몫일지도 모른다. 불가에서도 대장경은 다만 학인을 진리의 문 앞까지만 인도할 수 있을 뿐 직접 눈으로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그 문을 열고 안을 보기 위해서는 결국 본인이 창조적 심지를 돋우어 등불이 되는 수밖에 없다.

올해 신년 인사를 드리러 신종한 선생님을 찾아뵀을 때, 선생님은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등단 8년차인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당부하셨다.

“이런 말 하면 미안하지만, 자네는 여전히 습작생에 불과하다 생각하고 열심히 쓰게. 그 수밖에 없잖은가?”

별반 새로운 말씀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쉽게 잊고 마는 기본에 대해 재일침을 가하는 것이 학교 교육자의 본령이고, 이를 기반으로 뛰어넘기 위해 부단히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욕망이 예술 창작자의 본능일 것이다. 이런 구심력과 원심력 간의 긴장, 갈등과 반목에서 빚어지는 마찰의 경계위에서 창작의 꽃줄기는 솟아오르는 게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