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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소설과 대중소설의 융화에 대한 모색

『문장(紋章)』은 지금은 몰락했지만 유명한 명문 출신으로 바나나주, 생선간장 등의 발명에 열심인 행동가 가리가네 하치로와 양조학의 권위자인 야마시타 세이치로 박사의 아들로 가리가네와 맺어질 뻔 했던 아쓰코를 부인으로 맞이한 자의식 과잉가 야마시타 히사우치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가리가네가 갖가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자랑스런 조상을 상기하면서 재기해 나가는 모습이 이 작품의 주축을 이룬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이 가문(家門)을 상징하는 '문장'이 되었다. '문장'은 가문이나 단체를 나타내는 표시로 천지문이나 동식물 또는 기물 등을 본떠서 만든 도안이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을 정장인 검은 기모노 깃이나 행렬시 사용하는 등이나 깃발에 새겼다. 유명한 가문의 '문장' 중에는 대부분의 일본인이 알고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것도 많다.
  주인공 중에 한 사람인 가리가네는 초등학교밖에는 안 나왔지만 발명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 간장, 된장, 술 등을 차례차례 발명한다. 발명에 거의 병적으로 집착하는 그는 발명으로 생기는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계획한다. 그러나 발명에 성공하여 특허를 받고 정작 이익을 남기는 사업으로 전환하는 단계에 이르면 방해가 나타나 실패하고 만다. 그의 발명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사이에 우연히 성공하게 되는데 그 발명에 얽힌 사람들의 사리사욕이 그의 성공을 방해한다. 그런데 그 방해는 가리가네의 계획에는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문장』에는 또 한명의 주인공이 있다. 세상물정 모르고 발명에만 전념하는 행동가 가리가네와는 대조적인 야마시타 히사우라는 인물로 일정한 직업없이 부모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남자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요코미쓰는 이렇게 두 주인공의 성격을 확실히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의 성격을 그렇게 확실히 구분지을 수는 없다. 분명하게 구분지을 수 없는 사람의 성격을 이렇게 구분지어 표현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주인공 두 사람의 성격이 확실히 달라야 한다는 자세로 작품을 쓴 것처럼 느껴진다.

  히사우치는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내심 아내 아쓰코가 가리가네를 좋아하고 있지는 않을까 의심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제자들이 모두 합심하여 부당하게 가리가네를 곤경에 빠뜨리자 가리가네에게 패배감을 느낀다. 그런 히사우치의 마음을 아쓰코는 눈치채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 직업을 구해 집에서 나와 아내와 별거에 들어간다. 그리고 가리가네와 혼담이 있었던, 아쓰코와는 달리 조용한 성격의 하쓰코와 만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그렇다고 이렇게 엇갈린 사람들 사이에 이렇다 할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쓰코는 별거하고 있는 남편의 거처를 찾아가 재출발을 꾀한다. 그런데 여기에 화합의 매개체로 등장하는 것이 일본의 전통적인 차모임이다.

  히사우치는 딱히 차모임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야마시타씨 댁에서 열리는 차모임에 하쓰코, 아쓰코, 그리고 조카뻘 되는 젠사쿠와 함께 출석한다. 그런데 이 차모임 장면이 아주 재미있다고는 할 수 없어도 대단히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자세히 설명하는 데는 작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이 차모임을 통해 등장인물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고 하는 점, 다시 말해서 일본정신의 우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근대 일본문학의 모든 유파가 성숙하여 안정된 형태로 번영하던 1920년대에 문단에 등장한 작가 요코미쓰 리이치(橫光利一)는 이차대전 전후의 일본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작가로 항상 일선에 서서 문학의 흐름을 일으키고 주도해 나가며 변모를 거듭했다. 간소한 선에 의한 심리묘사, 군더더기가 없는 문체, 정교한 렌즈가 장착된 문장법, 지드적 소설작법을 갖은 작가로 표현되는 일본문단의 예술파 대표작가 요코미쓰의 대표작 『문장』은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문단적인 구별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우연성이란 요소를 소설에 도입하여 예술소설과 대중소설의 융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실험적으로 쓴 작품으로 그의 일본 정신과 미의 전통에 대한 신념, 서양과 동양의 대결 그리고 일본 정신 우위에 대한 신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 『문장』은 재단의 2000년도 외국문학 번역지원 대상작으로 선정되어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 세계문학총서'로 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