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대산문화
 
세대를 가리지 않는 창작에의 열정
 
지난 5월부터 10월말까지 한국문학의 성과들을 일별해 보고 새삼스럽게 발견한 사실이 있다. 예전처럼 베스트셀러로 부각되거나 화제의 중심이 된 작품은 그리 눈에 띄지 않지만 중견에서부터 신인들까지 모두 고르게 열심히 책을 내고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새삼스럽게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은 한국문학이 쇠퇴하고 있다는 풍문에 지레 작가들마저 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의 베스트셀러 만들기와 독자들의 문학 외면 현상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지난 몇 개월 동안에도 작품들은 꾸준히 쏟아져 나왔다.
  우선 소설부터 보자. 중진그룹에서는 김원일, 조세희, 서정인, 한승원, 박상륭, 박영한, 최인호, 김성동, 문순태, 김원우, 윤정모씨 등이 눈에 띈다. 이중에서도 박영한, 문순태, 김원우씨는 오랜만에 작품을 선보여 여전히 작품활동에 매진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6년 만에 펴낸 박영한의 장편 『카르마』(이룸)는 2백자 원고지 5백장 정도에 불과한 경장편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가볍지 않다. 인간으로 태어난 업이 지상에서 표현할 수 있는 극한대의 고통으로 묘사되는 작품이다. 그 고통과 업은 슬프지만, 읽는 이들은 타인의 고통으로 인해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순태씨가 『시간의 샘물』 이후 5년 만에 펴낸 소설집 『된장』(이룸)에는 우리가 잊고 지냈던, 혹은 외면하려 애썼던 고향의 깊은 정한과 생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메주의 골골에 메주꽃이 피듯 스며들었다. 김원우씨도 7년 만에 눈을 부릅뜨고 관찰한 세태기록 『객수산록』(문학동네)을 펴냈다.

  김원일씨는 중편 「손풍금」으로 황순원문학상까지 거머쥐었고, 서정인씨도 연작소설집 『용병대장』(문학과지성사)으로 이산문학상을 받았다. 조세희씨는 이 기간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의 1백50쇄 기념으로, 좀처럼 나들이를 하지 않다가 기자들과 만나 그동안의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예고돼 온 장편 『하얀 저고리』는 금년 8월 중에 내겠다고 밝혔지만 이번에도 역시 불발로 끝났다. 박상륭의 새 소설집 『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문학동네)는 그의 작품을 고대하던 매니아들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문체로 고도의 형이상학적 관념들을 소설로 풀어내 우리 소설사에 독특한 산맥 하나를 만들어 낸 박상륭의 새 소설집에는 이전의 초월적이고 경전적인 스타일과는 조금 다르게(난해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외로움에 치를 떠는 노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한걸음 더 친근하게 다가서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매년 꾸준히 책을 내놓은 한승원씨는 이번에도 인간과 자연이 뒤엉켜 삶의 아픔을 빚어내는 성장소설 『물보라』(문이당)를 펴냈고, 윤정모씨는 장편소설 『꾸야삼촌』(다리미디어)을 내놓았다.

  이들보다 연배가 아래인 작가들의 활약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소설집이나 장편을 펴낸 작가들을 무순으로 거론하자면 조경란, 성석제, 함정임, 김하기, 공선옥, 전경린, 최인석, 김인숙, 이혜경, 이인화, 정길연, 박정애, 정미경, 김종광, 조선희, 전혜성, 신승철, 신장현, 하창수, 은미희, 이명인, 김윤경, 심윤경 등이 떠오른다. 이중에서도 성석제의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창작과비평사)는 동인문학상을 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극적인 월드컵 역전드라마가 펼쳐지던 시점에 나온 이 작품집은 월드컵 못지 않게 흥미로운 소설들로 채워졌다. 최근 소설들이 보여주는 관념적이고 답답한 서술에서 벗어나 만화책 저리 가라 할 만큼 배꼽을 잡고 웃게도 만들고, 읽고 난 뒤 망치로 뒤통수를 한대 맞은 듯한 깊은 사색으로 유도하기도 한다. 술취해 두만강을 건너 월북한 뒤 오랜만에 소설집 『복사꽃 그 자리』(문학동네)를 펴낸 김하기씨도 이 계절의 반가운 작가다. 80년대 작가로 분류될 법한 김하기는 이번 소설집에서는 보다 숙성된 문학적 감동을 매개로 변해버린 세상의 변하지 않는 진실을 붙들어 내고 있다.

  반가운 신인들도 이 시기에 얼굴을 내밀었다. 오늘의작가상을 수상한 정미경씨는 이화여대 영문과 재학시절 '이화 백주년 기념문학상'을 수상하며 일찍이 문재를 내보였고, 87년 중앙일보 희곡 부문 신춘문예에 당선됐으며, 2001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을 발표해 이미 소설가로 데뷔한 '관록 있는' 신인이다. 정씨의 수상작 『장미빛 인생』(민음사)은 유려한 문체와 섬세한 감수성으로 군더더기 하나 없는 단아한 실내악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조선희씨는 20여년간 언론사에서 일하다 소설을 쓰기 위해 사표를 낸 뒤 첫 장편 『열정과 불안』(생각의나무)을 펴냈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욕망과 그 욕망에 저항하는 인물들의 움직임들을 민첩하게 그려냄으로써 독서의 수고를 충분히 보상해 준다.

  소설가 채영주씨의 작고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지난 6월 15일 부산에서 지병으로 타계했는데, 고인이 자신의 죽음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겨 뒤늦게 문단에 알려졌다. 『문학과사회』 가을호에 고인의 유고시가 발표됐지만, 나중에 친구의 시편들인 것으로 밝혀져 고인에게 누를 끼치는 해프닝이 발생한 것은 유감이다.

  시 쪽에서 눈에 띄는 면면들은 김춘수, 고은, 신경림, 김지하, 마종기, 강은교, 김명인, 김용택, 박태일, 김명리, 강형철, 정철훈 등이다. 고은씨는 시력 40여년의 결실을 전집 38권(김영사)으로 묶어냈다. 팔순의 김춘수 선생은 시론집 『사색 사화집』(현대문학)을 비롯해 새 시집 『쉰한 편의 비가』(현대문학)를 펴내는 왕성한 노익장의 저력을 과시했다. 3∼4년 간격으로 꾸준히 질을 담보한 시집을 펴내온 신경림 시인이 이번에도 시집 『뿔』(창작과비평사)을 펴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김지하씨도 오랜 침묵에서 벗어나 활발하게 활동한 편이다. 『중심의 괴로움』 이후 8년만에 시집 『花開』(실천문학사)를 펴냈다. 이번 시집은 거창한 이념이나 사상과는 거리를 둔 채, 자신의 외롭고 답답한 심경들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서정시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시편들로 채워져 있다. 사상전집도 실천문학사에서 묶어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는 강형철씨도 10년만에 시집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창작과비평사)를 펴냈다. 황동규 시인은 이 기간에 시 「탁족(濯足)」으로 미당 문학상을 받았다.

  이밖에도 언급하지 못한 많은 문인들의 노작들이 있지만 지면의 한계와 필자의 게으름으로 인해 일일이 거론하지 못했다. 가을을 건너뛴 채 겨울로 접어들었다. 일찍 닥친 쌀쌀함을 극복할 뜨거운 작품들이 연이어 쏟아져나와 독자들의 가슴을 덥혀줄 것으로 기대한다.

* 조용호 : 세계일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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