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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자가 쓴 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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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십년 전의 일인 것만 같다, 『상처가 나를 살린다』라는 시집에 실린 시들을 썼던 시절이.
어쩌면 아직까지 살아온 날들 중 가장 참혹하게 기억되는 때인지라,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그 시절을 먼 데로 밀쳐놓았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지하실에서 2년여를 보냈다. 습기가 많은 조그만 지하실. 나는 그곳에 찻집을 열고 희망을 투자했었다. 하지만 내가 투자한 희망과 시간은 지하의 눅눅함 속에 녹아 들어갔다. 폭우가 쏟아지면 물이 새는 가게. 침수된 것은 가게만이 아니었다. 빛을 보기 힘든 생활 속에서 나는 물 젖은 솜처럼 무거워졌고, 내 머리 속에서는 곰팡이가 자라는 것 같았다. 구토라도 하였다면 입 속에서 거미줄과 회색의 곰팡이가 쏟아졌을 것이다.
소득이 없이 바쁘기만 한 생활, 최선을 다했지만 세월은 썩은 물을 내게 퍼부었다. 오물을 뒤집어쓰고도 씻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전에는 모든 일에 자신감이 넘친 나였지만, 지하 생활 2년여는 나를 바꾸어 놓았다. 나는 햇빛이 들지 않는 눅눅한 지하실에 갇힌 한 마리 짐승에 불과하였다. 아― 하고 비명을 질러보기도 하였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묶인 야수처럼 속울음을 우는 날들이 많았다.
물에 대한 생각들을 참 많이 하였다. 물장사를 하면서 물의 침범을 두려워했던 나. 나는 마치 물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섬이 보이지 않는 바다 가운데 풍덩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공사를 하기도 하였고 끊임없이 쑥불을 피우기도 하였지만, 사방이 허술한 벽에서는 어김없이 물이 새어들어 왔다.
일이 끝난 새벽이면 컴컴한 지하실에서 종이를 꺼내어 시를 적었다. 생활이 가닥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도 그러하였다. 머리에 꽉 차 있는 어떤 것이 있었는데, 정리가 되지 않았다. '물'에 대해서, 여성성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였지만, 그런 것들은 쉽게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단지 막연한 상징으로써 나를 감쌀 뿐이었다. 세계는 물과 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내 오랜 생각이다. 물과 불은 음양론과도 닿아 있고, 남성성과 여성성을 나타내는 오랜 상징이기도 하다. 무언가가 퍼뜩 뇌리를 스쳤다. 나는 나를 괴롭히는 물과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자문자답을 하였다. 내게 있어서 물은 여성성에 다름 아닌데, 나는 물을 건너편에 있는 존재로 보았지, 그들과 함께 그들로 살아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여성을 살아본다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그리고 그 생각을 바닥에 깔고 쓴 시들이 『상처가 나를 살린다』라는 시집에 실렸다. 물, 여성, 음, 그늘, 카오스…… 그런 단어들을 오래 만지며 썼던 시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머리 긴 나의 뒷모습 같은 것들이다. 내 안의 여자가 써내려 간 글들이라는 말이다.
내게는 두 권의 시집이 있다. 첫 시집은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라는 제목의 시집인데, 그 시집을 본 대개의 사람들은 '역동성' 내지는 '남성적인 어투'에 대해 말들을 하였다. 하지만 두번째의 시집인 『상처가 나를 살린다』에 대해서는 다르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평자들의 말이 한두마디로 압축이 되는 것은 아니어서, 어떻게 평을 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내 생각을 말한다면 두번째 시집에 실린 시들은 내 언어의 그늘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다. 혹은 남성인 내 안의 여성이 쓴 것들이다. 그래서일까? 두번째 시집의 표지에 실린 사진은 첫 시집에 실린 사진을 뒤집은 것이다(이것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여러장의 사진을 출판사 쪽에 보냈는데, 그들이 이 사진을 선택한 것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내가 찻집을 열기 이전에 발표를 했던 시중에 「카페 이대흠」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내가 그 작품에 나온 내용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카페 이대흠」이라는 시는 1997년 6월에 발표되었고, 내가 카페을 시작한 것은 1998년 3월의 일이다. 그런데 그 시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오래 전에 이 카페는 / 문을 닫을 뻔하였다 지독한 누수가 있었고 / 몇몇이 달려들어 막아보려 했지만 / 어림없었다 그때 이대흠은 / 절반쯤 썩었다"라는 것인데, 내가 운영했던 카페는 2000년 8월에 있었던 폭우로 인해 전체가 잠기고 말았다. 빌어먹을 시의 예언성이라니! 시와 내 삶이 같은 점은 폭우가 있었다는 것이고, 이대흠이 그때 절반쯤 썩었다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에서의 카페는 다시 운영되었지만, 현실의 카페는 그 지독한 누수로 인해 문을 닫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침수로 인해 가게문을 닫게 된 나는 한달쯤 후에 내 안의 여자가 쓴 시들 덕분에 대산문화재단에서 주는 창작기금을 받게 되었다. 문 닫게 된 가게로 인해 입은 손실에 비하면 턱없는 액수였지만, 나는 그것으로 인해 숨을 쉬게 되었다. 그것은 물에 빠진 자의 손에 쥐어진 작은 나무토막 같은 것이었다.
※ 시집 『상처가 나를 살린다』는 2000년 재단의 대산창작기금을 받아 현대문학북스에서 출간되었다.
* 이대흠 : 시인. 1968년생. 시집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상처가 나를 살린다』 등
붉은 시월
남들은 허리 구부러진다는 일흔 문턱에
어머니
무릎까지 뻣뻣하지요
높은 산 조상들 무덤 끝에서
걸어 내려온 단풍들
함께 먼길 가자고 떠나가자고
손을 내미는 시월
관절염 신경통에 다리 굽히지 못하는 어머니
하늘 몹시 찌푸린 날이면
어기적어기적 측간에 가서
반쯤 서서 똥 누지요
두 개의 무덤
1
어머니의 젖무덤은
오래된 무덤이다
봉분이 다 가라앉아
평지와 구별되지 않는다
결혼 생활 오십여 년에
희망이나 바람 따위
모두 그 무덤에 묻혔다
2
이 땅의 여자들
두 개의
무덤을 가지고 다닌다
(하나는
사랑을 잠재우기 위해
다른 하나는 자신을
묻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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