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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온 '몽실 언니'

  "제가 꼭 몽실이처럼 생겼습니다."

  지지난해 1월 일본 고베에서 만난 변기자 선생은 세미나에서 발표하던 중 웃으면서 자신의 모습이 몽실이를 꼭 닮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새삼 바라보니, 복스런 얼굴에 좀 펑퍼짐한 스타일의 아줌마인 변기자 선생은 과연 '몽실 언니' 같기도 했지만, 몽실 언니를 아무도 직접 본 사람은 없으니 얼마나 근사할지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현대의 고전이 된 권정생 선생의 소년소설 『몽실 언니』의 눈물겨운 주인공 몽실이의 모습은 아마 키가 크지는 않고, '몽실이'라는 어감으로 보아 좀 몽실몽실 둥그스름하게 생겼을 것이라 연상이 되기는 한다. 그런데 몽실이를 닮았음을 자처하는 이분의 말에서 나는 문득 그런 '물리적인 닮음'보다 훨씬 깊게 몽실이를 껴안고 동질성을 느끼고 있음을 토로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변기자 선생은 2000년 『몽실 언니』를 일본에 번역, 소개한 재일동포 번역가이자 동화작가다. 요즘이야 일본 출판계에서도 계속된 불황을 겪으면서, 오히려 더 활성화된 한국의 어린이책에 눈을 돌려서 대형 베스트셀러나 작품성으로 성가가 높은 화제작 중심으로 번역, 출판에 나서고 있지만, 이삼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황이 달랐다. 대중출판 혹은 상업출판의 관심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소개된 양도 미미했다. 그런 가운데 다소나마 주요작품이 번역, 출판될 수 있었던 것은 몇몇 '별스런' 분들이 한국 아동문학을 착실하게 연구하고 소개하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고 돈도 안 되는 일을 변함없이 지속해 온 덕분이었다. 당시 고베에서 열린 한일 아동문학 교류모임의 세미나도 그런 분들이 주선한 행사로, 변기자 선생 등은 멀리 도쿄에서 달려오고, 일본의 '어린이회', '어린이번역회' 회원들과 한국의 겨레아동문학연구회 회원들이 함께 만나서 서로 힘을 북돋울 수 있었다.

  지난 9월 말 변기자 선생을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함께 온 이경자 선생(동화작가)도 고베에서 만났던 분이다. 두 사람은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인사말을 하면서, 몹시 상기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한국 땅을 밟은 벅찬 감격을 표했다. 비행기를 타면 두 시간 만에 날아오는 지척의 땅인데, 무엇이 그다지도 감격스러울까? 내가 이 분들을 알고 만나게 된 것은 아동문학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는 점 때문이었지, 재일동포로서 어떤 처지에 있고 어떤 고민을 갖고 있는지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그동안 한국땅을 한번도 밟아보지 못했고, 오려 해도 올 수 없었다는 것도 이번에야 알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우리 아동문학을 연구하는 일본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휭하니 한국으로 날아와 자료도 찾고 어울려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데!

  "저희 아버지는 1940년 3월 스물일곱살 때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쉰두살로 별세하실 때까지 다시는 이 땅을 찾아올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대신에 제가 이 땅을 찾아오게 된 것은 감개무량한 일입니다." 이경자 선생의 이 말처럼 부모 세대가 식민지 시절에 일본땅을 밟아, 변기자 선생 같은 분은 환갑을 넘겨서야 겨우 아버지의 고향땅을 찾게 된 것이다. 부모 세대는 그예 고향땅을 다시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고.

  이분들이 한국(남한)에 올 수 없었던 것은 일본 패전 직후 조선인으로 국적이 회복된 뒤 북한으로도 남한으로도 국적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식민 지배를 벗어나 비로소 조국을 찾은 뒤, 그 조국이 두 개로 갈라진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처지는 한반도 남북에 거주하여 자의든 타의든 남이나 북에 분명하게 소속된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들에게 조국은 얼마나 배타적이고 이기적이고 잔혹했던 것인지. 이제라도 아버지의 고향을 밟아볼 수 있게 된 것이 그나마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고 세상은 참으로 냉정하다. 아직도 이 땅엔 이런 장벽이 많고, 가고 싶은 곳을 못가게 하고 만나야 할 사람을 못만나게 만드는 그 장벽을 우리는 쉽사리 허물지 않는다. 변기자 선생은 이번 첫 한국 방문에 아버지의 고향 대구와 『몽실 언니』의 작가 권정생 선생이 계신 안동, 그리고 '종군위안부' 김학순 할머니의 무덤이 있는 '망향의 동산'을 다녀왔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일본에서 날아온 '몽실 언니'가 마음껏 우리 아동문학을 사랑할 수 있고, 갈라진 조국의 틈바구니에서 더이상 가슴 아파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믿어도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