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거대한 모래재 길섶에 부용화가 아름답게 피어 있던 두 해 전 여름날 바라보았던 임실(任實) 성가마을 뒷산 울창한 솔숲에 조밀하게 앉아 있던 백로 무리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늘이 맑은 높이를 더하고 바람에 국화향기가 묻어나는 추분을 지난 때였으니 철새들이 남쪽을 찾아 떠나고 난 빈자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가운 늦가을 햇살이 비치고 있는 이 마을을 멀리 바라보았을 때 문득 내 가슴속을 흐르는 한 선율을 느꼈다. 그것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에 나오는 아리아의 한 토막이었다. 그 독창 목소리는 서서히 이 시골 마을 풍경과 영남 내륙의 도시 대구(大邱)를 잇는 인연의 실이 되어갔다. 대구의 중심가 향촌동 거리에 ‘르네상스’라는 고전 음악다실을 열었던 박용찬(朴容讚, 1916~1964)이란 사람이 호남의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사실을 나는 근래 알게 되었던 것이다. 생명 못지않게 아끼던 1천여 장의 레코드 원판을 트럭에 싣고 서울에서 피난길에 올랐던(1·4 후퇴) 그는 대구에서 걸음을 멈추고, 중동부 전선에서 부상을 입은 상이의 몸으로 대구에서 어렵게 지나고 있던 젊은 시인 전봉건(1928~1988)을 만나 고전음악 다실 ‘르네상스’를 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것은 1951년의 가을의 일이다. 그것은 그들 개인사의 곡절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의 발자취에서도 기억됨직한 일인데 이 조그마한 사건은 시간에 풍화하여 거의 잊혀지고 없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서른 남짓한 좌석을 가진 르네상스가 문을 여는 첫날 그 아담한 공간을 울렸던 첫 곡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이었다. 백로들이 떠난 임실의 성가리를 지날 때 내 마음에 기억처럼 떠올랐던 선율은 마태수난곡의 한 토막이었던 것이다. 혼란과 고뇌의 시대에 커다란 조화의 정신을 가르쳐 주었던 요한 세바스찬 바흐. 전쟁의 그늘에서 방황하던 1951년 무렵의 지식인들에게 절망을 이겨내는 용기의 원천이 되기도 했던 낯익은 선율. 스무 살에 접어들었던 나도 사실은 내가 바라보고 있던 임실 성가리 출신의 한 분 신세를 졌던 것이다. 전선에서 돌아와 의예과 학생으로 복학하여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으며 자연과학적 세계상이 아닌 새로운 철학을 모색하던 나는 이 음악다실을 찾아 베토벤, 모차르트의 음악을 위시한 다양한 음악의 계보를 사귀며 시를 공부했던 것이다. 신동집, 김요섭 같은 시인은 이 음악다실의 단골이었다. 내가 시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의 하나로 나는 나의 ‘르네상스’ 시대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1951년의 한 여름 무더위 속에서 땀흘리며 음반을 분류하며 간추렸던 전봉건은 한 글에서 그의 이 무렵을 “50년대의 대구시절”이라는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두 해 전 늦가을의 어느 하루, 나는 오랜만에 내 젊은 시절이 숨쉬고 있는 향촌동을 걸어 보았다. 조그마한 이삿짐을 챙겨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대구를 떠났던 것이 1963년의 일이니 거의 40년 만에 밟아 보는 골목길이었다. 옛날처럼 ‘르네상스’가 나를 그의 품안으로 불러 들였던 것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 들었던 골목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네모진 빈 터였다. 그 곳에서 대구 문화의 새로운 물결이 일기 시작했던 터전. ‘르네상스’와 그 둘레의 변모는 철저했다.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는 듯한 그 좁다란 빈터를 부는 바람은 깨어진 화강암 초석들이 뒹굴고 있는 절터에서 억새풀을 흔들고 있는 바람보다 더 쓸쓸하고 허망한 것이었다. 그 때 환영처럼 떠올랐던 것이 사라진 이 음악다실에서 레코드 플레이어로 일하고 있던 키가 훤칠한 젊은 시절의 전봉건 시인의 모습이었다. 그 그늘을 배경에서 떠받치고 있는 사람이 드물게 객석에 모습을 보이던 박용찬 씨의 모습이었다. 오랜 세월의 지평 너머에서 떠오르는 그들 모습은 비가 내리고 있는 유리창 너머 바라보는 풍경처럼 흐린 것이었다. 한동안 그 빈터에 서서 떠나지 못했던 나는 흐린 그 이미지의 주인공들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외국 종군 기자들에 의해 ‘전쟁터에 피어난 장미꽃’이라 소개되었던 ‘르네상스’가 있었던 자리. 그 썰렁한 빈터 한쪽 구석에 누군가 레퀴엠처럼 아주 조그마한 말뚝이라도 하나 세울 만한 공간은 남아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