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세르반테스상 수상자인 멕시코 시인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Jos?Emilio Pacheco)는 시집에 자신이 번역한 다른 시인의 작품도 함께 싣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를 통해, 그는 번역을 포함하여 모든 글쓰기는 다시 읽기―다시 쓰기의 끝없는 순환 과정임을 보여준다. 파체코가 ‘접근(aproximaciones)’이라고 이름붙인 번역작업은 결국 타자와의 끝없는 소통에서 결과하는 창작활동의 일부인 셈이다. ‘접근’이란 용어가 시사하듯, 아무리 뛰어난 번역이라 해도 원작을 완벽하게 재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의미에서 세르반테스는 번역작업을 할 때는 “불타는 양탄자를 뒤집어 들여다보듯 하라”고 조언한다. 이처럼, 번역은 단순히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변환하는 피상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지도제작법으로 원본을 재구성하는”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번역작업의 본질이 잘 구현된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윤흥길 작가의 2004년 대산문학상 수상작 『소라단 가는 길』을 스페인어로 옮긴 El Camino a Soradan (Barataria, 2009)이 그것이다. 특히 윤흥길은 ‘언어의 박람회장’을 연상시키는 풍부한 방언과 생활 속어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작가로 정평이 나있는 만큼, 그의 문학이 지닌 멋과 맛을 외국어로 온전히 살려내기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닐 것이다. 가령, “대관절 요게 말이여, 막걸리여?”, “오랫동안 고대하고 빠마하시던” 같은 해학적 언어유희를 어떻게 외국어로 온전히 전달할 수 있겠는가. 다행히 이번에 나온 스페인어 번역본은 원작의 작품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가독성을 최대한 높이고 표현의 밀도(密度)를 유지한 좋은 번역이다. 이는 출발어인 한국어와 도착어인 스페인어 모두에 대한 완벽한 언어능력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이 점에서 『소라단 가는 길』은 신뢰할 만한 역자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역자 윤선미 씨는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유년기 시절부터 아르헨티나에서 성장해 원어민 수준의 스페인어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동시에 탄탄한 한국어 실력도 겸비하고 있다. 또한 현지 대학에서 그리스·라틴문학 및 스페인문학을 전공하여 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어 최적의 번역자라고 할 수 있다.
윤선미 씨의 번역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방언의 음성적·음운적 특질을 비롯해 도착어인 스페인어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원작의 감흥을 생생하게 전달한다는 데 있다. 원작의 의미가 심각하게 훼손돼서는 안 된다는 대전제에 충실하면서도 축자적 직역을 피하고 한국적인 토양에 깊이 뿌리내린 표현을 자연스러운 스페인어 표현으로 되살려 가독성을 높이고 있다. 문화적 콘텍스트를 세심하게 고려하고 스페인어권 고유의 언어 표현을 잘 살린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가령, “술을 주뎅이가 아니라 똥구녁으로 퍼마시는”은 “코사크인처럼 술을 퍼마시는(empinar el codo como un cosaco)”으로, “떡 먹딧기 쉽고 간단헌”은 “바느질하고 노래하는 것처럼 쉽고 간단한(f놻il y simple como coser y cantar)”으로 적절하게 옮기고 있다. 또 “나무주걱이 쇠주걱으로 뒤바뀌딧기”, “건시나 꽂감이나, 백구두나 흰구두나” 같은 우리식 표현은 각각 “납이 금으로 바뀌듯이(como si juera plomo transmutao en oro)”와 “복숭아나 복상이나, 슬리퍼나 쓰레빠나(Durazno o melocot뾫, chancleta o chancla)”로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원작의 단락 구성이 번역 텍스트에서 확연히 달라진 부분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또 기합의 일종인 원산폭격(元山爆擊)을 ‘원거리폭격(bombardeos a distancia)’으로 옮겨 원산(元山)을 원산(遠山)으로 잘못 이해한 것 등은 옥에 티다. 스페인어권에 번역·소개된 한국 문학 작품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감안할 때,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토착적 성격의 작품이 소개되어 다행스럽다. 한국전쟁의 체험을 어린아이의 시점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은 그 보편적 가치로 인해 전쟁 체험에 익숙한 스페인어권 독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을 것으로 기대된다.
※스페인어역 『소라단 가는 길』은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윤선미, 이강국 공역으로 2009년 스페인 바라타리아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