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 교수인 김영석 시인의 시집 『나는 거기에 없었다』에 실려 있는 시 「말을 배우러 세상에 왔네」의 앞부분이다. 욕심 같아서는 온 마디 다 인용하고 싶지만 시를 감상하는 자리가 아니라서 꾹 참기로 한다. 그렇다. 말을 배우러 이 세상에 온 것, 맞다. 나는 그렇게 배운 말을 다루기 위해 날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책상 앞에 앉는다.
20년 전에는 말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도 했다. 영어 글말 살림살이는 어찌어찌해서 웬만큼 되고 있었는데 입말은 바닥 수준이었다. 영어 입말과 전혀 인연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40년 전, 베트남에서 군대살이 할 때는 자주 영어로 말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20년 전 미국에 도착했을 때의 내 영어 입말 실력은, 베트남 시절부터 2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다시 바닥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내가 공부하던 도시에는 한국인이 참 많았다. 거의가 도미한 지 20년, 30년씩 된 의사들, 우리 땅에 내렸던 뿌리를 끊고 미국 땅에다 다시 뿌리를 박은 맹렬한 사람들이었다. 모두 영어를 잘 했다. 하지만 한국인들끼리 모이는 자리에서는 한국어를 썼다. 한국어를 쓰기는 하는데 토씨만 썼다. 좀 징그러웠다.
“‘웨이러미닛, 웨이러미닛’, ‘웨더 빌리브 인 오어 낫’, 그건 ‘토를리 퍼스널 프리덤 오브 릴리전’에 속하죠. ‘벗, 크리스천’ 앞에서 ‘갓’의 ‘익지스텐스 잇셀프’를 놓고 ‘아규’하자는 건, ‘ 슈드 아이 세이……’ ‘아암……’, ‘하우 임배러싱’”
이건 어떤 기독교인이 한 말을 기억했다가 정확하게 되살려 본 문장이다. “잠깐만, 잠깐만요, 믿든 안 믿든 그건 전적으로 개인이 누리는 신앙의 자유에 속하죠. 하지만 기독교인 앞에서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놓고 토론하자는 건, 뭐랄까요, 상당히 당혹스럽군요.”
이런 뜻인데, 참으로 절묘한 기술이다 싶었다. ‘아암……’은 미국인들이 적당한 단어를 고르느라고 망설일 때 쓰는, 우리말의 ‘저어……’, 일본 말의 ‘아노……’에 해당한다. 우리말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학살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낫 뱃’이라카이(맛이 괜찮다니까).” “‘ 더 헬 아 유 토킹 어바웃’이여, 시방(뭐라고 지껄이는 것이여, 지금?)” 교민들이 쓰는 영어에는 경상도 영어도 있고 전라도 영어도 있었다. 처음에는 배를 잡고 웃었는데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서글펐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그다지 원망하지는 않았다. 미국 땅이라서 그러려니 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영어 노랫말이 후렴구처럼 따라 붙었던 것 같다. 예감이 매우 불길했다. 몇몇 가수의 노래에서 끝났으면 했는데 이게 확산되기 시작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지금은 거의 일반화되다시피 했다. 나는 TV를 보다가도 영어 후렴구가 화면에 뜨면 다른 데로 돌려 버린다.그런데 문제는 영어 후렴구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통령이 영어를 좋아하고 또 잘 해서 그런지 방송 언어는 영어로 범벅이 된 채로 방치되어 있다. 외국어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영어로 밥을 벌어먹은 세월이 40년, 영어 입말만 해온 세월이 10년 가까이 된다. 그런데도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 단어가 요즘 들어 마구 나타난다. 그래서 요즘 들어서는 아들딸에게 묻는 일이 잦다.
‘제원(諸元)’을 뜻하는 영어 ‘스페시피케이션’이라는 말을 나는 알고 있다. 군대에서 자주 썼다. 가령 ‘M1 소총의 제원’이라면 무게, 길이, 사거리 등의 여러 인자(因子)를 뜻한다. 그런데 ‘스펙’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아들딸에게 물어본 다음에야 ‘스페시피케이션’의 줄임말로 ‘경력’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TV나 인터넷에서 ‘쉬크하다’는 말이 등장했을 때도 나는 알아먹지 못했다. 아들딸한테 배우고 나서야 ‘멋지다’, ‘세련되다’를 뜻한다는 것을 알았다. ‘엣지’라는 말도 나는 무슨 뜻인지 확실히는 알지 못한다. ‘모서리’ 혹은 ‘날이 서다’를 뜻하는 ‘엣지(edge)’일 것으로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개그맨이나 가수들이 떼를 지어 잡담을 일삼는 이른바 ‘토크 쇼’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들이 왜 찜질방에서 목욕 가운 걸치고, 맨 다리에 수건 한 장씩 덮고 오구구 모여앉아 잡담을 일삼는지 까닭을 모르겠다. 적나라(赤裸裸)하게 보여주기 위함인가? 일삼아 그들이 쓰는 영어를 메모해 보았다. ‘임무’를 뜻하는 ‘미션’이라는 말은 왜 그렇게 자주 쓰는지. ‘전투’, ‘겨루기’를 뜻하는 ‘배틀’은 또 왜 그렇게 자주 쓰는지, 그러고도 지겹지 않은지 퍽 궁금했다. 한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아이템(항목)’, ‘리액션(반응)’이라는 말이 다섯 번씩이나 나와서 퍽 울적했다. 미국의 수도가 뉴욕인지 워싱턴DC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쓰는 영어, 피곤했다. ‘리얼 버라이어티 쇼’ 같은 말은 약과에 속한다. ‘캡사이신 토크’라는 말이 자막으로 뜨는 것을 보고는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캡사이신이 매운 맛 나는 고추의 주성분이니 아마 ‘톡 쏘는 토크 쇼’를 말하는 모양이지만, 이 말의 뜻을 누가 아는가? 고추 생산하는 농부들이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웬만큼 외국어에 익숙한 사람들도 잘 모른다. 왜 이런 말들이 기승을 부리도록 방치되는 것일까? 외국에서 10여년을 떠돌다
귀국한 직후 ‘IC’가 무슨 뜻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인터체인지’를 그렇게 말하고 쓰는 모양이지만 정작 미국 사람들은 약자 쓰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전담반’을 뜻하는 ‘태스크 포스’를 ‘TF’라고 잘 줄여 쓰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어째서 ‘지배구조’보다는 ‘거버넌스’, ‘일정’보다는 ‘아젠다’를 선호하는지 까닭을 모르겠다. 경제인들도 그렇다.
그들 역시 ‘하부구조’라는 말보다는 ‘인프라스트럭처’를, ‘액면 금액 조정’보다 ‘리디노미네이션’이라는 말을 선호하는데, 시원찮은 사람이 이런 단어 발음하는 걸 듣고 있으면 혀 깨물까봐 아슬아슬하다. 이런 투의 말 사치, 가방 끈 짧은 사람들을 소외시킨다는 것을 알면 좋을 텐데. 시골 노인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TV 자막에 뜨는 말, 다 아세요? 절반은 알아먹고 절반은 알아먹지 못한다고 했다. 그걸 무슨 수로 다 알고 봐요? 이렇게 되묻는 분도 있었다.
환갑 지내고 나서야 나는 ‘마중물’이라는 멋진 말을 배웠다. 수동 펌프나 전기 양수기로 물을 끌어올릴 때 미리 부어주는 물이 ‘마중물’이란다. 얼음낚시나 견지낚시 하자면 낚싯줄을 가볍게 끊임없이 채주어야 한다. 이것을 ‘고패질’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국밥집에 가면 주인이 찬밥에다 뜨거운 국물을 끼얹었다 따라내기를 몇 차례 되풀이한다. 그래야 찬밥이 국물과 같은 정도로 따뜻해지는데 이것을 ‘토렴’ 혹은 ‘토렴 질’이라고 한다는 것도 최근에 알았다. ‘MT’라는 약자로 잘 쓰이는 ‘멤버쉽 트레이닝’의 순 우리말이 ‘모꼬지’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찌나 기쁘던지. 2010년 2월이 그려내는 말의 풍경을 ‘타임캡슐’(나도 이 한 마디는 어쩔 수 없이 영어를 쓰는구나)에 넣어 파묻었다가 10년 뒤에 약발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나 역시 말을 배우러, 배운 말을 부리러 이 세상에 왔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