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명함을 팠다. 누런 마분지에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 내 이름 석 자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완성된 명함을 처음 받던 날이 떠오른다. 손바닥 반 정도 크기의 도톰한 종이를 두 손에 꼭 쥐고는, 만져도 보고 뒤집어도 보다가 배시시 웃기도 했다. 머리맡에 명함을 쌓아놓고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사실, 명함이라는 것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다지 비싸지도 않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흔한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명함을 손에 쥘 때마다 가슴이 두근대는 것일까?

명함을 받는 것도 이렇게 두근대는 일인데, 그것을 주는 일은 오죽할까. 지갑이 터질 만큼 명함을 넣어 두고도, 막상 명함을 내밀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머뭇거리기 일쑤다. 윗사람에게 주자니 ‘네가 건방지게 명함을’이라는 느낌을 줄 것만 같고, 아랫사람에게 주자니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같이 생각할 것 같아서이다. 덕분에 가장 친한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명함을 줘 본 일이 거의 없다.

며칠 전 사석에서 연극 연출을 하는 분을 소개 받게 되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순간, 바로 지금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살폈다. 그런데 막상 처음 이름을 소개 받고 인사를 나누는 타이밍을 놓치니 명함을 건넬 수가 없었다. 대학로 연극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내 머리 속에는 명함을 줘야한다는 압박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불쑥 명함을 내밀며 ‘여기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대화 중간에 ‘혹시 제 이름 기억 하세요? 역시! 못 하시는군요. 절대 까먹지 마시라고 이렇게 명함을 드려요’라며 뮤지컬 대사를 날리기에 나는 너무 소심했다. 테이블 아래로 명함을 쥐고 만지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나눌 때 슬쩍 건네주리라 마음먹었다. 드디어 자리를 정리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왔다. 하지만, 어물어물 대다가 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 분이 돌아서는 순간, 나는 결심한 듯 이렇게 외쳤다. ‘명함 드릴까요?’ 뜬금없었지만, 상대가 ‘아니요, 당신의 명함 따위 필요 없어요’라고 대답할 수 없는,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그 분이 명함을 받아들고 ‘명함이 참 예쁘네요’라며 웃으셨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 생각할수록 창피했다. 명함을 주지 못해 안달난 사람 같아 보였을 것 같았다. 대체 왜 자연스럽게 건네지 못한 걸까. 명함을 주는 일이 이렇게 부담스럽고 괴로운 일이라면, 명함을 왜 팠을까. 후회가 밀려들었다.

세상에는 자신의 이름을 특별하게 만드는 이들이 있다. ‘장미희’ ‘안성기’ ‘홍명보’ …… 이들의 이름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작동 되는 프레임이 있다. ‘장미희’란 이름을 들으면 매서움, 날카로움, 질투 같은 말들이 덩달아 떠오른다. 또한 ‘안성기’란 이름은 자연스럽게 국민배우, 따사로움, 변함없는 같은 말들이 따라온다.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적어도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었을 때, ‘작가’라는 프레임이 작동 되었으면 좋겠다. ‘쥐고 있으면서 책임지지 않는 것은 버리는 것과 같다.’ 내가 자주 되뇌는 말이다. 아마도 나는 명함에 박힌 ‘작가’라는 말 앞에서 긴장을 하는 것인가 보다. 입으로 몇 백번 말한다 해도 언제든지 날아가 버릴 수 있는 ‘작가’라는 이름이 종이 위에 새겨진 그 순간, 내가 책임져야하는 이름이 된다. 그래서 그 이름을 건네는 일이 망설여지고, 가끔은 두렵기까지 한 것인가 보다.

자연스럽게 명함을 내밀고 싶다. 당연하다는 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렇게 명함을 건네고 싶다. 그렇게 ‘작가’라는 타이틀도, ‘이오진’이라는 내 필명도 오롯이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길 꿈꾼다. ‘아마 잘 모르시겠지만, 제가 사실은 작가거든요’라는 마음으로 우물쭈물 전하는 명함이 아니라, ‘제가 바로 그 이오진입니다!’라는 눈빛을 쏘며 명함을 건네는 날을 기대한다. 그 때 즈음엔, 테이블 아래로 만지작거리지 않고도 자연스레 내 이름 석 자를 전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