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시집 『투구꽃』이 간행된 뒤 오월시 동인들이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다. 오월시가 동인으로 활동하던 시기는 오래 전에 지났지만 요즘도 간혹 우정으로 만나곤 하는데 나의 시집 간행이 모임을 가질 명분으로 작용한 것이다. 우리가 동인활동을 하던 시절은 각자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던 시기이면서 첫 시집을 준비하거나 간행하던 시기이다. 그때 형성된 순수하면서도 끈끈한 우정이 오늘날까지 여운으로 남아 있다고 하겠다.
당연한 일이지만 모임의 성격은 많이 변했다. 문학운동을 함께 한다는 사명감 혹은 긴장감은 사라지고 개개인의 근황과 안부를 묻는 모임이 된 것이다. 젊은 날에는 비판의 날을 세우고 언성을 높이는 일도 잦았지만 요즘은 건강을 걱정하는 형편이니 상대를 찌르는 말은 서로 삼가는 편이다. 이번 모임도 나이 들어 계속 시를 쓰는 걸 격려하는 덕담 수준의 대화가 오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재주의라는 비판이 들어와 인상적으로 뇌리에 남아 있다.
오월시가 동인으로 활동하던 시절, 그러니까 내가 신인으로 활동하던 1980년대는 시의 정치성이 크게 부각되던 시기였고 소재주의라는 비판 또한 자주 제기되었다. 당시의 시대적 과제에 몰두한 나머지 예술성이 충분히 살지 못할 때 소재주의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소재주의는 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시에 대한 낙인인 셈이다. 그걸 판정하는 것은 평자의 몫이어서 막상 당사자인 시인은 억울해도 무어라 변명할 여지가 없다.
독자의 공감 혹은 감동에 기대지 않고서는 예술로서의 시가 존립하기 힘들다. 그런데 공감 혹은 감동은 다분히 독자의 취향에 따르는 만큼 시인이 무어라 말하기 어렵다. 이제까지 평론가들의 비판에 대해 내가 대응을 자제해 온 이유는 그들의 비판이 다분히 취향과 감각의 차이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소재주의라는 비판도 그대로 넘기고 말았는데 술이 깨고 나자 뭔가 생각의 갈피를 잡아두고 싶어졌다.
실상 시를 쓰는 데 소재 찾기는 매우 중요하다. 나이 들어서도 계속 시인이고자 하는 자에게 신선한 소재를 찾아내는 것은 더욱 절실한 과제이다. 시인 자신이 살아가면서 겪은 일이 소재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시집을 몇 권 내다보면 직접 체험으로서의 소재는 고갈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손쉽게 찾는 돌파구가 기행인데 아마도 많은 기행시가 소재주의라는 비판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기행 차원에서 만나는 사물들이 육화되거나 숙성될 여유 없이 시 속에 생경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충분히 육화되지 못한 시는 내놓지 않는 것이 나의 시인으로서의 자존심이다. 기행시나 행사시를 거의 쓰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니까 형상화가 덜 된 시라는 의미에서의 소재주의라는 비판은 적절치 않고 그런 뜻에서 소재주의를 거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근래의 나의 삶과 얼마나 밀착되어 있느냐는 의미에서 소재주의를 말한 것이라면 의미 있는 비판이라고 생각된다.
근래의 나는 도시에 살면서 생태적인 사물로 시를 쓰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사실 자체에 소재주의의 혐의를 둘 수 있다. 다시 말해 생태적 소재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이 경우 기행이 아닌 답사라 해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시인의 삶과 깊이 연루되지 않은 사물은 시가 되기 힘들고 그 점은 생태적 사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 생계나 생활이 도시에 엮여 있기에 더욱더 생태적 사물들에 애착이 간다. 그들을 만나야 마음이 놓이고 숨통이 터진다고나 할까.
가령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는 무력감이 들거나 우울증에 시달릴 때 자주 찾아가는 내 마음의 성소이다. 소에서 힘차게 솟구치는 물을 마시고 석회암 암반 위로 세차게 흘러 바로 시내를 이루는 모습을 보며 힘을 얻곤 한다. 검룡소에 드나든 지 수 년 만에 이를 소재로 시를 한 편 쓴 적이 있고 그 뒤로도 십 년 가까이 한 해에 두어 번은 이곳을 찾곤 한다. 하지만 연작시를 기획해서 쓸 생각은 없다. 나에게 시는 씌어지는 측면이 강해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다보면 새로운 소재도 찾아지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