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들꽃’이 피었던 길을 걷다, ‘황혼의 집’에 이르렀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기획특집 ｜ 가깝고도 먼나라, 새로운 한국과 일본 ①열 채의 이불까지는 준비하지 못하더라도 ②진짜 자기문제로 돌아가는 순간은 타자의 인생을 통해 자신을 발견할 때 ③차이와 상호 무지에 대한 인정 ④독재가 통하지 않는 외교무대
①어느 한 詩人의 음악사랑 ②잠시 기다려주세요, 신호가 끊겼습니다 ③지도와 여행
①한국문학은 여전히 건재하다 ②제2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 ③영역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미국 《퍼블리셔스 위클리》 ‘올해의 책 톱 10’ 선정
들녘의 하루
박홍규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1952년생
저서 『인문학의 거짓말 1, 2』 등
‘길을 묻다(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한 칼럼)’라는 내용의 글을 부탁받았는데, “내 삶이 내 길”이라고 생각하여 나의 하루를 쓰기로 한다. 보잘것없는 시골 늙은이의 급변하지 않는 가난한 삶의 길에서 독자들이 나름의 길을 찾는다면 고마울 일이다.
동이 트고 붉은 새벽노을이 그려지면 못가의 들녘에 가서, 닭장 문을 열고 반갑게 소리치는 닭들에게 아침인사를 하며 나오게 하고, 꼬리를 흔드는 개와 들녘과 못가를 산책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노란 저녁노을이 그려질 때까지 함께 들녘에서 지낸다. 닭들은 내가 움직이면 졸졸 따라오고, 앉아서 책을 보거나 일을 하면 내 손발을 쪼아댄다. 개도 자주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한다. 말로 한다고 대화가 아니다. 눈으로 하는 마음의 대화가 대화다. 말은 얼마나 피곤한가? 들에서 말없이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마냥 즐겁거나 쉬운 일이 아니다. 햇빛도 피해야 하고 모기를 비롯한 벌레도 쫓아내야 한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닭들이 책 위에 변을 갈긴다. 방금 나는 그것을 치우고 다시 이 글을 쓴다. 나도 밭에서 개나 닭처럼 자유롭게 변을 본다. 노을을 그리는 캔버스 위를 닭들이 날아다니기도 한다.
개와 닭은 이웃에게 우연히 받은 것들이다. 그들에게도 나는 우연한 존재다. 혈연이니, 지연이니, 학연이니 하는 것을 평생을 좌우할 필연인양 조작하는 세태와는 다르다. 모두 어쩌다 잠시 함께 우연히 만난 것에 불과한데도 대단한 연줄을 만들려고 야단이지만 동식물과는 그런 연줄이 필요 없다. 지금의 들과 집을 갖게 된 것도 우연이다.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이름이 그때 내가 읽던 시집 이름과 같아서 바로 이사를 했다. 도시에서 살던 20평 아파트의 전세금으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촌집과 들을 샀다. 큰길에서 멀고 공동묘지 옆이어서 돈은 안 되지만 조용하고 못이 있어서 좋았다. 20여 년이 지나도 값은 그대로다. 내가 올리지 않으니 오를 리가 없다. 그러니 집값, 땅값이 저절로 오른다는 걸 이해할 수 없다. 한 번도 사본 적이 없는 주식 값이 오르니 내리니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코스피니 뭐니 세상에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들에는 인터넷커녕 핸드폰커녕 노트북커녕 전화도 TV도 없다. 개 와 닭, 책과 풀, 그리고 흙뿐이다. 그 밖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알아야 할 것도 없다.
들에서 몇 걸음 안 되는 못을 지나 집에 가서 밥 먹는 일 외에는 해질 때까지 거의 들에서 지낸다. 22년을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년 전까지는 학교에서 강의를 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도 없다. 그야말로 야인이다.
속세와 연을 끊고 숨어산다는 고상한 야인이 아니라, 그냥 들에 살기에 문자 그대로 야인이다. 교양 없고 거칠다는 의미의 야인이거나 야만인일지는 모르지만, 소위 ‘야인시대’나 ‘야당인’ 따위의 잘나가던 야인은 아니다. 그냥 들놈이나 들사람, 촌놈이다.
그러나 촌에 산다고 야인은 아니다. 농민이나 농부도 아니다. 자급자족을 위해 최소한의 야채나 과일을 기르며 스스로 즐겁게 하루 한두 시간 일하기에 직업도 아니다. 수확한 것을 남들에게 나눠주기는 해도 팔아본 적은 없다. 농약도 비료도 전혀 치지 않고 수확 전에 이미 벌레, 닭, 새, 두더지 등이 함께 씨앗이나 싹을 먹어대니 수확할 것도 거의 없다. 수확의 기쁨이란 것도 없다. 그냥 함께 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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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시골 사람들은 들에 살지 않는다. 농약을 치고 비료를 뿌리거나 경운기 등 기계를 움직일 때 잠시 보일 뿐이다. 농산물 생산을 위한 공장 같다. 대부분의 농가에는 자가용도 있다. 한 집에 두 대 이상 있는 경우도 흔하니 기후변화는 당연한 결과다. 모두들 자가용으로 이산화탄소를 뿜어내면서 기후변화를 탓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대중교통이 부족한 탓이지만, 시골길은 걷거나 자전거를 타야 제격이다. 자연이 좋아, 자연을 지키려 들에 살러 오는 사람도 거의 없다. 대부분은 일할 힘이 없는 노인들이다. 그들은 오로지 연금을 받는다는 점에서 나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받지 못하는 연금을 받기에 행복하지는 않다. 노동능력이 없다는 조건만으로 죽을 때까지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받는다는 삶이 왜 이렇게도 어려운가? 그것만 보장되면 정말 살만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정치란 모든 사람에게 고루 삶의 기본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의 들이나 집은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다. 내 삶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멋진 전원주택이나 화려한 정원 같은 것을 상상하고 TV 방송국이나 잡지사, 신문사 같은 데서 찾아왔다가 헛걸음하고 가는 경우가 많다. 사전에 제발 오지 말라고 해도 무리하게 와서는 찍어대지만 찍을만한 것이 정말 없다. 들은 그냥 들이고 오로지 들이어야 한다. 자연 그대로의 들은 인조가 아니기에 아름다운 것이지 인공적인 것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추악해진다. 그래서 베르사유 같은 인공 정원은 질색이다. 자연을 가장한 중국 정원이나 일본 정원도 질색이다. 자연 그대로를 살렸다고 하는 소쇄원 같은 우리 정원도 역시 꾸민 것 같아 싫다.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제일 좋다. 자연을 꾸미지 마라. 화장하지 마라. 면도하지 마라. 얼굴도 마음도 면도하지 마라. 무엇이든 관리하지 마라. 규제하지 마라. 법으로 하지 마라. 모두 자유롭게 두라. 그냥 생긴 대로 두라. 렛잇비.
시골에 들어올 때부터 들의 잡초를 그대로 두었다. 어쩌다가 들리는 마을 사람들은 들이 너무 엉망이라면서 기계를 가져와 몇 분 만에 깨끗이 정리를 해주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게으른 놈이라고, 무식한 놈이라고, 미친놈이라고, 때려치우고 당장 돌아가라고 욕도 한다. 제초제로 잡초를 없애고 기계로 땅을 파라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무농약, 무기계로 자연농법을 한다고 했더니 정말 한심해 한다. 들에다 1년 걸려 작은 연못을 파는 것을 보고 5분도 안 걸릴 일이라고 하며 한심해 한다. 몇 달을 걸려 동네 주변 쓰레기 폐자재를 모아 책 읽을 오두막을 짓는 것을 보고도 한심해한다. 몇 해 뒤에 그것을 허물고 다시 짓는 것을 보고는 더욱더 한심해한다. ‘개나 소나’ 농사짓는다고 야단이라는 소리도 듣는다.
닭 취급을 받지 않아 그나마 다행일까? 닭은 누구마냥 그 대가리에만 적용되어 닭은 물론 사람에게도 다행일까? 닭대가리라고 하지만 먹이도 알고 항상 함께 다니며 해가 질 때면 제 집을 찾아든다. 높은 곳에 올라가 암탉들을 보살피는 수탉은 웅계라는 소리를 들을 만해 ‘웅’이라고 부르지만 항상 무시당한다. 개는 이름이 있지만 닭은 이름이 없는 것이 차별 같아서 이름을 지어 불러도 제 이름이라고 알지 못하니 역시 닭대가리인가? 각각의 이름은 없어도 구구라고 부르면 모두들 따라온다. 사실 내 이름이 무슨 소용인가? 그냥 모두 같은 인간들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야 인류애가,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지 않을까?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남겨서 뭘 하나? 적어도 내 이름은 남길 게 아니다. 호랑이 가죽도 인간이 사냥하여 잔인하게 벗겨야 남는 것이니 못할 짓이다.
호랑이처럼 값비싼 가죽을 남기지 못해 ‘개나 소나’라고 할까? 흔하다고 그럴까? 소는 전통사회에서 가장 귀하고 비싼 가축인데 왜 그렇게 말할까? 소위 육축, 여섯 종류의 가축 중에서 소나 말은 물론이고 양과 돼지도 개와 닭보다는 귀하고 비싸지 않은가? 나는 어릴 적에 돼지나 소를 키워본 적 외에 말이나 양을 키워본 적이 없다. 말은 너무 비싸다고 하니 힘들지 모르지만 염소나 양은 키워보고 싶다. 개와 닭은 어려서부터 계속 키워왔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동서고금에 개와 닭은 가장 흔하고 사람과 가장 가까웠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나온다. “이웃이 개 짖고 닭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도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을 노자의 이상국가라고 하지만 3천 년 전에 국가라니 터무니없다.
20여 년 전 시골에 들어온 가장 큰 이유도 개와 닭 등의 동물을 키우고 싶어서였다. 집안에서 애완견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고, 마당이 있는 집에서 동물과 함께 살고 싶었다. 그러나 좁은 마당에서 동물을 우리에 가두거나 묶지 않고 키우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절망했다. 어떤 식으로든 관리를 해야 한다는 점이 너무 괴로웠다. 그러나 다른 집에 폐를 끼치니 모두들 싫어할 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이 와서 닭을 잡아먹기도 한다. 닭을 집에서 키우는 것도 사람들은 싫어한다. 냄새가 나고 시끄러워서다. 나는 닭장 앞에서 항상 책을 읽지만 사람들은 먼발치에서 코를 막는다. 개와 함께 산책하는 것도 시골 사람들은 끔찍이도 싫어한다. “교수라는 게 개나 끌고 다니고”하면서 혀를 끌끌 차는 소리를 면전에서 듣기도 했고, 개가 어쩌다가 짖으면 위협을 한다고 욕하기도 하고, 침을 흘리며 잡아먹으면 딱 좋겠다는 소리도 자주 듣는다. 깊은 산속의 장애인 시설에 준 개가 도망을 쳤다고 해서 밤새 산을 뒤지면서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어느 겨울 날, 먼 들에서 잠시 풀어주었다가 논들에 뿌려진 농약을 먹고 개가 죽기도 했다. 통곡을 하며 들에 묻어준 뒤로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다시금 새로운 개와 닭이 인연을 맺는다.
20여 년 전 시골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깨면서 자연스럽게 새벽형 인간이 되었다. 『햄릿』에서 닭을 새벽의 나팔수라고 하며 그 울음소리를 들으면 여기저기 떠다니던 헛것들이 모두 자기 자리로 줄달음질칠 수밖에 없다고 한 것보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라고 한 육사가 더 좋다. 개천의 날에 닭이 울었느냐 아 니냐를 두고 말다툼이 있고, 시인은 하찮은 닭 울음 대신 광야에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야한다고 했다고도 하지만, 이는 닭 울음보다 인간의 노래가 우월하다는 것이 아닐까? 광야는 아닐지라도 내 작은 들에서 가난한 노래나 닭 울음은 같은 것이다.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라는 시인의 염원은 매일 듣는 닭 울음소리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에게는 닭 울음소리가 역사다. 매일 아침은 역사의 시작이고 매일 밤은 역사의 끝이다. 매일이 반복되듯 역사도 반복된다. 그렇게 자연의 역사는 순환의 역사다. 나날의 순환이고 계절의 순환이며 매년의 순환이다. 그러니 처음과 같이 없다.
매일 들에서 개와 닭만 보니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동물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년간 월든 호수에서 살았던 소로는 수탉을 자신의 도플갱어라고 하며 야생과 교감하는 능력을 가지 려고 노력했다. 하루를 좀 더 동물처럼 보내고 싶어 했던 소로는 인간이 자신과 다른 동물 사이에 놓은 거대한 격차를 거부하고, 모든 살아 있는 이들을 하나로 결속하는 공통의 유대를 찾고자 했다. 그러니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이니 뭐니 하면서 다른 동물과 구별하려는 짓은 사실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인간 외의 동물에게는 명예도 예의도 도덕도 범죄도 처벌도 없다. 그러니 개보다 못한 놈이라니 닭대가리니 하는 말을 하지만, 명예 따위가 없어도 된다면 그런 말들은 사실 인간의 편견이 만든 욕지거리에 불과하다. 도리어 인간은 닭과 개를 비롯한 동물들에게 몹쓸 짓을 얼마나 많이 저지르는가?
내 이웃 동네에도 한 달 만에 처분하는 육계 공장, 1년 만에 처분하는 산란계 공장들이 많다. 동네 구석구석, 야산 구석구석에는 먹이용으로 키우는 개들도 많다. 보호받는 개는 아파트 집 안에 살고 있다지만 그 개들도 곧잘 버려진다. 특히 시골 개는 먹이용이지 산책하는 반려견이 아 니다. 몇 년 전, 몇 달간 벌어진 촛불집회에도 답답해했지만 나는 그 겨울에 닭을 비롯한 수천만 마리의 가금류를 ‘살처분’하는 사태에 연일 눈물을 흘렸다. 내 평생 그렇게 잘못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사실 ‘살처분’이라는 말이 우습다. ‘살생명’이다. ‘살인’만이 최악의 범죄인가? ‘살동물’은 범죄가 아닌가? 지난 10년간 4조 원을 들여 7천만 마리의 동물을 ‘살처분’했다. 닭과 오리만이 아니라 소와 돼지도 ‘살처분’되었다. 죄책감 때문에 자살한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럴 정도로 양심적이지 못하여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닭이나 개는 물론 모든 동물이 자유롭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코로나19가 왔을까?
모든 존재에 대한 자비를 가르치는 불교가 채식을 하는 것은 분명히 동물과의 인연과 연대 때문일 것이다. 윤회니 하는 이야기도 그래서 나온 것이겠다.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동물 사랑을 위해서는 나쁜 것이 아니다. 책거리용으로 개를 잡아먹었다는 서당 선비보다도 나물을 먹는 절간의 중이 훨씬 인간답다. 닭고기만 먹는다는 힌두나 소고기만 먹는다는 무슬림보다도 낫다.
내가 인도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세계 채식주의자의 70퍼센트 이상이 그곳에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인도가 카스트니 달리트니 하며 인간을 차별하는 것을 보면 히틀러가 채식주의자라는 것을 새삼 의식하게 된다.
인간과 동물의 연대를 구축해야 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연대도 이렇게 어려운데 보잘것없는 내가 무슨 연대를 모색한단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들에서 동식물과 함께 사는 것이다.
주변의 닭 처분 공장들, 개 처분 공장 속에 있는 닭과 개의 자유로운 놀이터다. 그 밖에 뱀도, 개구리도, 두꺼비도 모두 모인다. 나의 들은 섬이다. 주변의 농약 바다 위에 떠있는 외로운 섬이다. 명색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으로서 내가 만물에게 할 수 있는 도리는 이 정도뿐이라는 것이 너무 슬프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도 나는 내 작은 들녘과 촌집과 못을 떠날 생각이 없다. 소로의 월든은 아니지만 노자가 말한 상선약수를 매일처럼 깨우쳐주는 못가의 흙길은 올레길이나 스페인 순례길보다 아름답다. 들녘은 항상 변해서 아름답고 못물은 불변이어서 아름답다. 내 집도 작고 낡아서 아름답다. 그럼에도 삶이 답답하다고 해외로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지구를 오염시킨 것이 죄스럽다. 그래서 코로나19가 나 같은 의지 박약아에게 여행을 하지 못하게 해주어서 고맙다. 코로나19가 끝나도 비행기를 탈 생각이 없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듯이 자전거 말고는 탈것을 찾지 말아야 한다. 그 밖에는 코로나19가 끝나도 바뀔 것이 없다. 지난 20여 년처럼 혈연, 지연, 학연 따위나 관혼상제를 인연이라고 하여 찾을 생각이 전혀 없다. 인연은 우연이 만드는 것이고, 자각하여 자발적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이어야 가치가 있다. 가난도 자발적인 가난이어야 한다. 자연도 자발적인 자연이어야 한다.
사랑도 자발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젊었을 때 짝사랑만 하는 못난 놈이라고 자학하기도 했다. 못생기고 못나서였다. 나이가 들면서 좋은 점은 그런 고민이 없어진 점이다. 아무것도 아닌 그고민을 버리는 데 거의 평생이 걸렸다니 참으로 창피하다. 이제는 하루 종일 개와 닭과 말없이 살아도 좋다. 우리 사이에는 못나고 잘나고가 없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찾아갈 사람이 없다고, 그래서 외롭다고 느낄 필요가 없어서 더 좋다. 이웃이나 후손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모두 그렇게 스스로 충만하여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제 마지막으로 즐겁게 스스로 맞을 일은 고독사뿐이다. 들에서 혼자 죽는 동식물처럼 사람도 결국 혼자 죽는다. 장례도 무덤도 묘비도 제사도 필요 없다. 불에 태우고 남는 재는 들에 버려라. 남길 이름도 없다. 제발 잊어다오. 그것이 마지막 행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