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들꽃’이 피었던 길을 걷다, ‘황혼의 집’에 이르렀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기획특집 ｜ 가깝고도 먼나라, 새로운 한국과 일본 ①열 채의 이불까지는 준비하지 못하더라도 ②진짜 자기문제로 돌아가는 순간은 타자의 인생을 통해 자신을 발견할 때 ③차이와 상호 무지에 대한 인정 ④독재가 통하지 않는 외교무대
①어느 한 詩人의 음악사랑 ②잠시 기다려주세요, 신호가 끊겼습니다 ③지도와 여행
①한국문학은 여전히 건재하다 ②제2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 ③영역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미국 《퍼블리셔스 위클리》 ‘올해의 책 톱 10’ 선정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 박완서 작가의 타계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1962년생
시집 『비밀을 사랑한 이유』 『나만의 것』, 저서 『편집자 분투기』 『책 사용법』 등
곧 박완서 작가의 10주기다. 2011년 1월 22일, 여든 살에 담낭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9년이 지났다. 나는 박완서 작가의 타계 소식을 중국 상하이에서 들었다. 출판인 여러 명이 함께 떠났던 워크숍, 이동하는 차 안에서 여독으로 슬몃 잠이 들었는데, 앞자리에서 몸을 돌린 이가 나를 툭툭 치더니 박완서 선생님이 떠나셨다는 뉴스가 방금 들어왔다고 전했다. 꿈인가, 생시인가. 낯선 풍경을 가로질러 달리는 차 안에서 잠결에 들었던 소식에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일행 모두가 당황했고,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모두들 박완서 작가의 타계에 숙연해졌다.
귀국 다음 날이 발인이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지인들의 눈가가 붉었다. 작가의 영원한 거처, 용인 천주교 묘지는 며칠 전 내렸던 눈이 녹질 않아 희끗희끗하고 메마른 풍경이었다. 운구 차량은 묘지까지 닿지는 않았다. 차에서 내린 조문객들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눈에 미끄러질세라 서로 조심하자고 당부하며 관을 멘 사람들 뒤를 따랐다. 속도가 거의 나지 않는 행렬이 한 줄로 이
어졌다.
묘지는 양지바른 곳이었다. 아침 햇살이 환했다. 우리는 준비한 꽃잎들을 관 위로 뿌렸다. 꽃눈이 내렸다. 기도와 염원, 작별의 시간은 짧았다.
박완서 작가의 기일에는 생전 사시던 아치울 ‘노란집’에서 추모 미사와 함께 제사를 지낸다. 조광호 신부의 집전으로 미사를 진행하며 여전히 우리 곁에 남은 작가의 이야기를 나눈다. 가족과 친지, 작가들 수십 명이 매해 빠지지 않고 모이는 이 풍경은 매우 따뜻하고 문학적이다. 문단과 독자
들이 생생히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작가, 샘물처럼 고이는 그리움을 퍼 날라도 메마르지 않는 그 문학적 축복은 10년 전 세상을 떠난 겨울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박완서 선생의 자택에서 |
1931년 개풍에서 태어난 박완서 작가는 다섯 살이 되기 전에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혼자서 언문을 익혔다. 교육열 강한 어머니 손에 이끌려 서울로 와, 일본어를 사용하던 국민학교를 다녔다. 숙명여고 재학 시절에 박노갑 국어 선생의 영향으로 문학에 빠졌고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휴교령이 내려지자 휴학했다. 이념 대립 전쟁으로 오빠와 숙부가 죽음을 맞았다. 그 후 생계를 위해 군부대 PX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삶의 형태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결혼 후 1남 4녀를 둔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나이 마흔에 PX 경험을 소재로 한 장편 『나목』으로 등단하게 된다. 이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40여 년 동안 수많은 걸작을 발표했다.
작가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적 시선과 풍성한 이야기에는 작가의 고유한 표현과 어조가 살아 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의 비인간성과 이후 급속히 전개된 산업화의 폐해, 속물성과 위선의 사회를 온몸으로 겪은 작가. 한국 현대사의 목격자인 작가는 능란한 이야기꾼으로서 그 현실을 기록하고 인물을 창조하며 독보적인 풍속화를 언어로 완성했다.
1주기 때부터 매해 기일에 맞추어 박완서 작가의 책들이 출간되었다. 후배 작가들이 추모하며 헌정한 책도 나왔다. 여전히 살아 있는 언어들, 독보적인 작품 세계, 보물 창고에서 꺼낸 듯한 유고집과 기존 원고의 새로운 기획 편집본은 새로운 독자를 만났다. 무엇보다 전집의 형태로 작품이 정리되어 산맥을 이루었다.
1주기에 출간된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22권은 데뷔작 장편소설 『나목』부터 마지막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까지 망라하여 한국문학의 유산으로 남았다. 작가가 생애 마지막까지 직접 손보고 다듬고 매만진 결정판 전집이었다. 시기와 지역을 넘나드는 당대 문화를 반영한 문장과 날카롭고 비판적인 세태 풍자는 다양한 삶의 경험과 언어 경험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피천득 선생과 함께 |
 데뷔 시절의 박완서 선생 |
4주기에 나온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7권은 1971년 발표한 첫 단편 「세모」부터 2010년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까지 연대기순으로 편집되어 있어, 박완서 작가의 단편 작품 이해에 이정표가 되었다. 2015년에 출간된 『박완서 산문집』 7권(이후 두 권이 추가되었다)에는 1977년 첫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부터 1990년 산문집까지, 일상적인 소재에서 탁월한 이야기의 리듬과 의미를 부여하고 일상의 작은 행복과 즐거움을 끄집어냈던 따스하고 엄정한 시선이 들어 있어 작가의 인간미를 느끼게 했다.
8주기 때 출간된 헌정 소설집 『멜랑콜리 해피엔딩』은 독특했다. 강화길 작가부터 함정임 작가까지, 한국 작가 29인이 박완서 작가에게 헌정하는 책이다. 박완서 작가의 문학적인 질문에 후배 작가들이 보내는 저마다의 답신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 대다수가 중산층이었던 데 대해 어떤 평론가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저소득층 여성을 다루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 때 담담하게 답하던 박완서 작가의 음성이 들린다.
“제가 중산층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에는 언제나 승복합니다. 그렇지만 작가가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인데, 그쪽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실감으로 와닿지가 않아요. 그래서 현장 취재도 해보았지만, 체험을 바탕으로 한 취재가 아니라서 그런지 작품이 잘 안 써져요. 가장 잘 아는 것밖에 쓸 수 없는 것이고, 제게 소설이란 뭔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저리고 아프면서 끓어오를 때 써지니 참 곤란하고 어렵네요.”
- 「박완서의 말」에서
 선생의 남편, 아들과 함께 |
작가의 작품엔 영혼이 실렸다. 가슴 밑바닥부터 저리고 아프면서 끓어오를 때 쓴 작품들이니까. 이어진 나직한 목소리에는 묵직한 힘이 들어갔다. 중산층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저계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산층의 허위의식,안이한 태도, 속물근성, 기회주의적 속성 등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 중산층적 삶이 어떻게 확립되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박완서 작가의 생전 생활상 그대로 보존된 침실과 서재 등이 있는 아치울 ‘노란집’에는 큰따님 호원숙 선생이 사신다. 박완서 작가의 유고가 정리되어 새 책으로 만들어지고, 흩어진 소설들이 전집의 형태로 갈무리되고, 기일에 사람들이 모이는 데 중심 역할을 맡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리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책을 펼치면 살아 계실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와서 생생한 목소리로 들릴 때가 있습니다.”
 생전 거주하던 ‘노란집’에 보존되어 있는 침실의 한편 |
독자의 마음도 그러하다. 10주기에 어떤 책이 나올지 기다려진다. 그 새로운 책에서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편안한가 하면 날카롭고 까다로운가 하면 따뜻하며 평범한가 하면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작가”라고 표현한 고정희 시인의 말처럼, 박완서 작가의 작품에는 깊고도 넓은 삶의 질문들이 담겼다. 인간다움에 대하여, 세상의 관계에 대하여 복잡한 인생사 마디마디에서 겪는 시름의 순간에 큰 위로와 지혜를 얻는 작품들은 연년세세 우리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박완서 작가의 타계는 문학 세계의 마침표가 아니다. 세속의 변화를 비추는 거울처럼 다양한 인물 군상과 역사의 이해, 문학의 온기를 느끼게 하는 새로운 입구다. 문학을 향유하려는 사람들에게 식지 않는 축원으로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