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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을 기획하며 민족의 의지와 행운이 함께한「독립선언서」 작성 과정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린 영문 「3·1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에서 배제된 여성들의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독립선언서」에 담긴 이상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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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민족의 의지와 행운이 함께한「독립선언서」 작성 과정

글 최우석 ㅣ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1983년생
논문 「재일유학생의 국내 3·1운동 참여 - 「양주흡 일기」를 중심으로」 「3·1운동기 김윤식·이용직의 독립청원서 연구」 등

 

1. 1919년 2월 28일 밤, 「3·1독립선언서」가 뿌려지다!

 
우리들은 이에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1919년 2월 28일 밤, 서울 도처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는 「3·1독립선언서」가 뿌려졌다. 이미 20일 전인 2월 8일,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극도의 긴장상태였다. 하지만 「3·1독립선언서」가 시중에 뿌려지고 3·1운동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독립운동이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일제는 전혀 눈치 채지 못 했다.

 
3월 1일 「3·1독립선언서」는 서울에만 뿌려진 것이 아니었다. 서울과 동시에 만세시위가 진행되었던 평양·진남포·안주(이상 평안남도), 선천·의주(이상 평안북도), 원산(함경남도) 등 7개 도시에서도 배포되었다. 당장 만세시위가 없었던 지역 중에서도 배포된 곳은 더 있었다. 3월 1일에만도 개성(경기도), 강서·중화(이상 평안남도), 선천(평안북도), 봉산·황주·옹진·해주·서흥·수안·연백(이상 황해도) 등지에서 수십 수백 수천 장의 「3·1독립선언서」가 살포되었다. 3월 1일 이북지역에서 행해진 만세시위와 「3·1독립선언서」 배포는 서울 태화관에서 이루어진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식에 맞추어 기독교계와 천도교계에서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3·1독립선언서」는 어떻게 비밀리에 퍼져나갈 수 있었을까? 3·1운동이 시작되고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계기는 「3·1독립선언서」를 만들고 배포하는 계획을 수립하면서 이미 일정하게 마련되고 있었다. 그것은 행운과 의도가 중첩된 결과였다.

 
「3·1독립선언서」가 작성된 과정을 알려면 우선 「3·1독립선언서」 본문이 구성된 형태를 살필 필요가 있다. 「3·1독립선언서」는 크게 세 부분이다. 선언서의 본문과 행동강령이라 할 수 있는 공약3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족대표로 참가한 33인의 명단이 바로 그것이다. 「3·1독립선언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본문과 공약3장과 같은 선언서의 내용 준비가 필요했고, 선언서에 서명할 대표자들의 인선이 필요했다. 작성 과정은 내용 준비와 대표 명단 준비라는 두 과정이 결합된 결과물이었다.

 
두 과정을 추적하는 데에는 주로 두 종류의 자료가 활용되고 있다. 하나는 3·1운동 당시의 재판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1945년 해방 이후 민족대표들이나 주변 인물들이 남긴 각종 회고 기록이다. 20여 년이 흐른 뒤의 회고기록들에는 기억의 착종이 발생하여 내용의 충돌이 있기도 해 어느 것이 사실인지 명확히 밝히는 데 어려움이 따르기도 한다. 1919년 2월 28일 손병희 집에서 민족대표들이 최종 회합을 했을 때, 중요사항을 감추기 위해 말을 맞추어 두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각자 있는 그대로 말하자고 결의했던 사실도 있다. 당시 민족대표들은 민족을 대표해 떳떳한 자세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것이었고 일제의 모진 고문에 말 맞추는 행위 자체가 무위로 돌아갈 것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근거해 이 글에서는 일제의 재판 기록 속 민족대표들의 발언을 중심으로 사실관계를 파악하며 충돌하는 회고들의 내용을 활용하여 「3·1독립선언서」 작성 과정을 살피겠다.

 

 
2. 「3·1독립선언서」 본문은 누가 언제 쓴 것인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국제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세계의 식민지 약소민족들은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고 국내외 한국인들 역시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적으로 독립에 대한 열망을 품기 시작했다. 세계대전의 결과를 조율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인 대표를 파견하자는 움직임이 미국과 러시아 시베리아, 중국 상하이 등지에서 추진되기 시작했고, 이에 상응하여 국내외에 한국인들이 독립의 열망이 크다는 사실을 전 세계적으로 공표하는 독립선언과 대중적 시위운동의 필요성도 대두되었다.


이때 재일본 유학생들이 독립선언과 대중적 시위운동을 공개적으로 처음 추진했다. 이들은 1919년 1월 6일과 7일의 유학생학우회 모임에서 일본 정부당국에 조선 독립에 대해 요구하고 각국 대사관 및 공사관 앞에서 시위운동을 할 계획을 수립했다. 물론 이 운동은 바로 일본 경시청에 의해 제재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재일유학생들은 비밀운동으로 전환하여 2·8독립선언으로 이어갔다. 1월 중순에 이광수는 「2·8독립선언서」 초안을 만들었고, 와세다대 정치과에 다니던 송계백은 그 초안을 들고 국내에 들어와 인쇄 자금과 인쇄용 활판을 구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송계백은 와세다대 유학 선배이자 중앙학교(현 중앙고등학교) 교원이었던 현상윤과 유학 이전 은사였던 보성고등보통학교(현 보성고등학교) 교장 최린을 만나 「2·8독립선언서」의 내용을 공유하였다. 한편, 중국 상하이에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려던 신한청년당에서는 2월 초순 선우혁을 국내로 파견해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계 인사들로부터 대표 파견 여비 모금 작업을 진행하였다. 

일본 도쿄와 중국 상하이에서 찾아온 송계백과 선우혁은 국내에 이미 싹트고 있던 독립의 열망을 꽃피우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천도교계는 1919년 1월 20일을 전후한 시점부터, 기독교계는 이승훈 장로를 중심으로 2월 초순부터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3·1독립선언서」 작성도 추진되었다. 최린의 요청에 최남선은 본인은 학자이므로


민족대표로 나서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거절했지만, 이광수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 초안을 보고는 「3·1독립선언서」와 미국 대통령 윌슨 및 파리강화회의 참석 열국 대표들에게 보내는 청원서, 일본 내각 및 귀족원·중의원·조선총독부 등에게 보내는 통고문을 쓰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2월 초순부터 임규의 일본인 부인인 후지사와[藤澤] 집에서 2주 동안 틀어박혀 「3·1독립선언서」와 다른 자료들을 기초하였다. 가끔 형사가 찾아오면 후지사와의 소매 속에 서류를 숨겼고 후지사와의 일본인 아들에게 외부와의 소통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남선은 2월 22~23일경 선언서와 다른 문서들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일화와는 별개로 「3·1독립선언서」의 작성자, 특히 그중에서도 선언서 내용 중 구체적인 행동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공약3장의 작성자가 누구냐를 놓고 논쟁이 존재한다. 최남선이 본문과 공약3장 모두를 작성했다는 설과 한용운이 일부를 수정했다는 설, 공약3장을 추가했다는 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 논쟁은 한용운의 1920년 당시 공판 과정에서 했던 발언과 그 제자들의 증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한용운은 최남선이 작성한 서류들을 보고 자신의 의견과 다른 점이 있어 개정한 일이 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으며, 한용운의 제자 김법린은 ≪신천지≫ 1946년 3월호에 최린, 최남선과 함께 한용운이 「3·1독립선언서」 기초위원이었고 최남선이 초안 집필, 한용운이 수정, 최린이 기초책임자로 역할분담을 했다고 기술하였다. 

하지만 1919년 당시 천도교계 운동의 중심이었던 최린과 권동진의 회고담에서는 「3·1독립선언서」 집필은 전적으로 최남선에게 맡겼다는 발언만 확인된다. 특히 최린은 「자서전」에서 독립운동에 직접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최남선에게 선언문 작성을 맡기는 것은 불가하다고 반발하며 한용운 자신이 선언문을 짓겠다고 나섰던 일화를 적고 있다. 이때 최린은 한용운의 이의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외 다수의 3·1운동 당대 재판 기록에서도 최남선의 「3·1독립선언서」 및 기타 서류의 집필 사실은 확인되지만 한용운이 그중 무엇을 어떻게 수정 가필했는지 구체적인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여러 청원서, 통고문이 작성되는 과정에서 「3·1독립선언서」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8독립선언서」는 마지막 4항의 결의문 속에 일본정부와 국제사회에 대한 요구를 담아 청원서와 통고문의 내용까지 모두 포괄하고자 했던 반면, 「3·1독립선언서」는 각각의 대상에 맡게 서류를 별도로 꾸며 대응하고자 하였다. 이는 운동을 준비했던 이들이 맞춤형 전략을 짰다고 평가할 수도 있으며, 한편으로는 독립 ‘선언’으로 갈지, ‘청원’으로 갈지, 다양한 운동 형태를 모색하는 가운데 「3·1독립선언서」와 여러 서류들이 함께 준비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이는 더 많은 민족대표를 포섭하고자 한 의도와도 연관된 것이었다. 

 



3. 민족대표 33인의 구성과정

  

손병희(孫秉熙) 길선주(吉善宙) 이필주(李弼柱) 백용성(白龍城) 김완규(金完圭) 

김병조(金秉祚) 김창준(金昌俊) 권동진(權東鎭) 권병덕(權秉悳) 나용환(羅龍煥) 

나인협(羅仁協) 양전백(梁旬伯) 양한묵(梁漢默) 유여대(劉如大) 이갑성(李甲成) 

이명용(李明龍) 이승훈(李昇薰) 이종훈(李鍾勳) 이종일(李鍾一) 임예환(林禮煥) 

박준승(朴準承) 박희도(朴熙道) 박동완(朴東完) 신홍식(申洪植) 신석구(申錫九) 

오세창(吳世昌) 오화영(吳華英) 정춘수(鄭春洙) 최성모(崔聖模) 최 린(崔 麟) 

한용운(韓龍雲) 홍병기(洪秉箕) 홍기조(洪基兆)

 

위는 「3·1독립선언서」에 실린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이다. 이는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 15인, 길선주, 이필주 목사를 시작으로 감리교와 장로교의 기독교 16인, 백용성, 한용운의 불교 2인이 결합된 결과였다. 하지만 처음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민족대표를 꾸리고자 계획했을 당시부터 이러한 인적 구성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천도교계는 1월 하순 손병희의 지시로, 최린 권동진 오세창을 중심으로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등이 합세하여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대표들을 섭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때 첫 영입 대상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나 불교 등 종교계 인사들이 아니었고, 옛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에 고급관료를 지낸 인물들이었다. 

1월 하순에서 2월 초순까지 최린은 한규설, 최남선은 윤용구·윤치호·김윤식, 송진우는 박영효를 설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주로는 음력 정월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간다는 명목으로 찾아갔으며,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유럽 여행을 가라는 식으로 돌려서 운을 떼기도 했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1월에 손병희가 직접 나서서 박영효와 송병준을 찾아가 독립운동 내지 자치운동까지 제안하며 설득을 시도했다. 

천도교에서 설득하고자 했던 옛 관료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1905년 의정부참정대신으로 내각의 수반이었고 을사늑약에 반대했으며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조선귀족 작위를 거부했던 한규설부터, 일진회 활동을 하며 고종 퇴위를 주도하고 한일합방 청원서를 제출해 강제병합 이후 자작 작위를 받은 송병준까지 반일적 인사와 친일적 인사 모두를 아우르려고 했다. 이는 1919년의 운동이 친일적 인사들까지 아우른 민족 전체의 뜻이라는 사실을 밝히려고 한 천도교계의 고민이 담긴 작업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월 9일과 16일에 이루어진 김윤식과의 교섭에서도 뜻하는 답을 얻지 못하면서 천도교계의 민족대표 1차 구성 작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민족대표 참여 여부와 별개로 송병준 같은 대표적 친일파나, 박영효나 김윤식같이 적극적이지는 않았으나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인물들조차 독립운동 준비 사실을 일제에 누설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특이하다. 이는 그들 역시 당장의 운동 성패와 지향점의 차이로 반대하거나 주저했을 뿐이지, 독립이든 개혁이든 식민지 상황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당위성에는 공감하고 있었음을 반증해주는지도 모르겠다. 

옛 관료들과의 협의가 지지부진했던 2월 10일경 천도교계는 최남선의 제안으로 기독교계 이승훈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이승훈은 2월 12일 경성에서 송진우 등과 만나 공동행동에 대한 큰 틀에 합의를 이루고 다시 평안도로 내려가 지역의 기독교계 인사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아직 구한국 관료들과의 교섭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천도교에서 제안했던 내용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계속해서 독립청원을 발의하는 방식이었다. 제1회에는 천도교 28인, 기독교 20인 등 50명으로 하고, 제2회는 100명으로 하고, 10회까지 연속해서 청원하자는 안이었다.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 했지만 독립선언에 식민지 조선의 대표로 볼 수 있는 인물 대다수를 총동원하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승훈은 평안도 지역에서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2월 20일 상경하여 최린, 최남선 등과 함께 독립선언 준비 작업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천도교 측에 5,000원의 운동자금을 요청하고 현순이 「3·1독립선언서」 초안과 파리강화회의 및 윌슨 대통령에게 보낼 서류를 들고 중국 상하이로 가기로 협의했다. 

한편 불교의 한용운은 1월 말부터 최린과 협의하여 민족대표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백용성 등 불교 대표자들의 모집을 진행했고 유림계가 민족대표에 빠진 것을 염려해 직접 2월 20일 경상도 거창으로 곽종석을 찾아갔다. 섭외를 위해 찾아간 시간이 너무 늦었고 선언이라는 문제에 대한 충돌로 유림계의 참여는 결국 없었지만 또 다른 민족대표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2월 27일에 드디어 최종적으로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33인의 대표를 확정하여 일본 정부에 제출할 통고문에는 민족대표의 인장을 날인하였다. 

 
4. 「3·1독립선언서」 작성 과정의 끝, 인쇄와 배포 

 
1919년 2월 27일 민족대표 33인이 확정되면서 최종 인쇄에 들어간 「3·1독립선언서」는 기록에 따라 2만1,000장~3만5,000장 가량 인쇄되었다고 한다. 현재 정확한 수치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상당한 양의 「3·1독립선언서」가 짧은 시간 동안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성사 사장으로 「3·1독립선언서」 인쇄에 관여했고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참여했던 이종일의 『묵암비망록』에 근거하여 2월 20일부터 「3·1독립선언서」 인쇄가 진행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3·1독립선언서」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인 민족대표 명단이 완성된 시점은 2월 27일이었다. 

「3·1독립선언서」 명단에 이름 순서는 천도교 대표 손병희, 장로교 대표 길선주, 감리교 대표 이필주, 불교 대표 백용성 순으로 먼저 각 종교 대표 이름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후 이름은 ‘김’이 ‘권’보다 앞서거나 ‘량’, ‘류’, ‘리’로 발음하는 등 지금의 순서와는 조금 다르지만 가나다순으로 적혔다. 일정한 순서로 명단이 작성되기 위해서는 전체 민족대표의 확정이 필요했다. 

1919년 2월 중에 미리 국외로 반출된 「3·1독립선언서」들이 있다. 이 경우 선언서 본문 내용은 거의 동일하지만, 민족대표 명단이 전혀 달랐다. 1919년 3월 만주 임강현에서 발표된 「3·1독립선언서」에는 한규설, 곽종석, 전우, 최린, 윤용구, 손병희, 오세창의 이름이 올라 있어 천도교와 유림계가 연합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중국신문인 ≪시보≫ 3월 9일 자에는 손병희와 김선주(필자 주-길선주) 등 2명의 대표 명단이, ≪익세보≫ 3월 11일 자와 ≪대공보≫ 3월 15일 자에는 손병희, 김병조, 나인협, 이명룡, 박준승, 오세창, 한용운, 길선주, 김창준, 양전백, 이승훈, 박희도, 오화영, 오병유, 이필주, 권동수, 양한묵, 이종훈 등 18명의 대표 명단이 일정한 순서 없이 수록되었다. 이는 아직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연합이 완성되기 이전에 「3·1독립선언서」가 해외로 나갔음을 의미한다. 

『묵암비망록』의 주장처럼 「3·1독립선언서」 본문의 인쇄는 2월 20일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민족대표 명단이 인쇄된 완성본은 2월 27일부터 작업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인천대학교 문헌정보학과 오용섭 교수는 「3·1독립선언서의 서지적 연구」라는 논문에서 보성사판 「3·1독립선언서」 8개를 비교 검토하면서 민족대표 33인 명단이 시작되는 행의 가로부분에 미세한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 1919년 당시 보성사에서 압수한 「3·1독립선언서」 중에는 민족대표가 31명만 있는 판본도 존재했다. 본문과 공약3장을 미리 인쇄해두고 민족대표 33인이 확정된 이후에 남은 지면에 별도로 명단 인쇄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보성사에서 인쇄하던 중에 종로경찰서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잡는 악질 형사’ 신승희라는 인물에게 「3·1독립선언서」가 발각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인쇄 책임자였던 이종일은 그에게 눈감아줄 것을 종용했고 손병희로부터 제공받아 5,000원이라는 거금을 신승희에게 주어 입막음을 하였다. 신승희는 이후 3·1운동이 터지고도 평소와 같이 ‘독립운동가 잡는 악질 형사’로 활동했지만 2월 27일에서 3월 1일 사이 3·1운동이 준비되고 있던 상황에 대해서만은 입을 다물었다. 1919년 5월 이것이 문제가 되어 5월 15일에 헌병대 사령부에 끌려갔던 그는 조사를 받고 다음날 아편중독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매일신보≫에서는 자살이라고 보도했지만, 신승희와 제법 가깝게 지냈던 윤치호는 1920년 1월 6일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경시 오카모토와 경기도 경찰부 하시모토 경부와의 식사 자리에서 신승희가 자살을 가장한 고문치사를 당했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증언하였다. 「3·1독립선언서」 작성 및 인쇄 과정은 친일파들에게 민족대표 참가를 요청했으나 누설되지 않았고, 최남선이 일본인 여성 집에서 선언서를 작성했으나 발각되지 않았고, 마지막 선언서 인쇄 때 발각되었으나 보고되지 않았던 행운들이 잇따른 결과였다. 

천도교계 출판사인 보성사에서 만들어진 「3·1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28일 이종일 집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각 종교계와 학생대표들에게 분배되어 서울과 전국 각지로 뿌려졌다. 만세시위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듯이 「3·1독립선언서」도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3·1독립선언서」의 전체 내용은 일반 민중들이 모두 이해하기에는 어려울 수 있는 국한문으로 기술되었지만, 축약적이고 강렬한 ‘공약3장’ 내용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어 운동의 전파자 역할을 하였다. 3·1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