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낙화落花

영국의 시 축제들

시인은 청진기, 아픔을 듣고 붉은 꽃을 처방한다

여성의 눈으로 희망 찾기

특집을 기획하며 민족의 의지와 행운이 함께한「독립선언서」 작성 과정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린 영문 「3·1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에서 배제된 여성들의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독립선언서」에 담긴 이상과 현실

이야기꾼의 운명, 이야기의 힘

SNS는 눈, 유튜브 문학은?

“깨끗한 것이 선악보다 낫다”

자동차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에서

일출(日出), 빛과 색 이야기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모든 순간들이 한국문학이고 ≪현대문학≫이다

하필이면

김점순 어머니

가면 오리, 오면 십리

티브이를 보다가,뼈 펴는 소리 포스터

행자가 사라졌다! 눈과 사람과 눈사람

불꽃놀이

「동시대 문학의 시간착오와 불안」에 부쳐

운이 좋은 이유 작가, 같이 아픈 사람들이 주는 큰 위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세밀하게, 간결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LOVE NEVER FAILS

“차(茶)란 먼저 형태를 만들고 마음을 담는거야”

역사가 인류에 대해 말해주는 것

다르게 또 새롭게, 문학 안에서 전진하는 페미니즘

통째로 얼지 않으려고

“죽음의 그림자 가운데 써나간 고통의 기록”

터키인들도 ‘타는 목마름’을 아는가!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대산창작기금,대산청소년문학상 등

2019 대산창작기금 및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공모 등

나의 데뷔작

하필이면

글 듀나 ㅣ SF소설가, 영화평론가
소설 『나비전쟁』 『면세구역』 『민트의 세계』, 영화칼럼집 『스크린 앞에서 투덜대기』, 산문집 『가능한 꿈의 공간들』 등


‘나의 데뷔작’ 꼭지의 원고 청탁을 무심코 받아들였다가 움찔하고 말았다. 내가 알기로 이 꼭지에 나처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런 제목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데뷔작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의미 있는 데뷔작이란 무엇인가. 몇몇 작가들은 이 데뷔 자체가 드라마이기도 하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나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을 브론테 자매 같은 사람들을 보라.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쓴 이야기는 얼마 전에 영화로도 만들어져 극장에 걸렸다. 『브론테 자매』라는 프랑스 영화도 있었는데, 난 브론테 자매가 남자 이름으로 출판한 책의 저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장면을 좋아한다. 혜성과 같은 작가들의 출연에는 분명 매력적인 구석이 있다.
한국 문학계에는 등단이라는 관문이 있다. 신춘문예나 문예지 공모 등을 통해 공식적인 작가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데뷔작은 첫 작품이 아니다. 데뷔작이라는 한 방을 위한 꾸준한 노력과 공부와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 경우는 데뷔작의 경계선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 없어서 신기할 지경이다. 그래도 20년 넘게 죽지 않고 버티긴 했는데, 언제부터 직업적으로 글 쓰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지?
태초로 돌아가 보자. 집에 첫 컴퓨터가 생기자 나는 하이텔에 들어가 과학소설동호회에 가입했다. 당시엔 과학소설에 관심이 좀 있었다. 내 관심사는 꾸준히 바뀌었기 때문에 몇 년 전이나 몇 년 후에 가입했다면 전혀 다른 동호회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추리소설이나 사진 동호회였을 수도 있다.


그때부터 단편들을 써서 동호회에 올렸는데, 첫 작품 제목이 「시간을 거슬러간 나비」였다. 내용은 진짜 별게 아니었다. 시간여행자가 과거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왔는데, 타임머신에 묻어 있던 나비가 나비효과를 일으켜 지구를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만의 내용은 하나도 없는, 장르 연습이었던 셈이다. 그래도 이것은 나의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쓴 완결된 SF 단편이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읽힌 첫 번째 픽션이었다. 하지만 이걸 데뷔작이라고 한다면 뭔가 좀 모자란 거 같다.
그 뒤에 단편들을 조금 더 썼다. 그러다가 「미메시스」라는 단편을 써서 역시 동호회에 올렸는데, 여기서부터는 의미 있는 캐릭터와 대사와 액션이 있었다. 여자 현상금 사냥꾼이 말레이시아로 내려와 남자 도망자를 유혹하는데, 알고 봤더니 (아, 놀라워라!) 둘 다 로봇이었다. 이 단편은 내가 쓴 이야기 중 최초로 활자화된 작품이었다. 1994년에 창간한 워프라는 SF 전문 만화 잡지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내 기억엔 창간호이자 종간호였던 거 같은데. 지금 꺼내보니 표지엔 제목이 「미네시스」라고 나와 있다. 본문에는 제목이 제대로 실렸다. 그렇다면 이게 나의 데뷔작인가? 글쎄. 그럼 좀 민망할 거 같다. 당시엔 한국어로 쓰인 SF가 워낙 없었기 때문에 그때 맥락 속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 수도 있는데, 정확히 어떤 의미였냐고 물어보신다면……. 모르겠다. 잊어버렸다.
「미메시스」 이후에도 꾸준히 단편들을 과학소설동호회에 올렸다. 그러는 동안 누군가가 채팅 중 묻는다. “듀나 님이 올리는 단편들은 습작인가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도대체 습작이 뭐지? 「시간을 거슬러간 나비」는 분명 장르 연습이긴 했다. 「미메시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연습이고 어디까지가 진짜 진지한 무언가인가? 왜 난 그런 걸 구별해야 하는 거지? 이런 건 진지한 작가 지망생에겐 꼭 필요한 구분인가? 열심히 연습을 하다가 아, 이제 나는 작가가 되었구나! 하면서 진정한 첫 데뷔작을 내야 하나? 그 뒤부터는 더 이상 연습이 아닌 건가? 난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 그냥 재미없을 때까지 해보는 수밖에. 문단 데뷔 같은 걸 전혀 생각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거 같다. 당시 장르 작가에게, 특히 SF 작가에게는 공식적인 데뷔 통로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순문학’을 겸업하지 않을 거라면 그런 데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 뒤로도 계단이 조금씩 있다. 몇 개월 뒤 과학소설동호회 회원 네 명이 『사이버펑크』라는 공동단편집을 냈는데, 나는 「미메시스」를 포함한 단편 여섯 개를 실었다. 내 첫 번째 단행본이었다. 단편들이 꽤 많이 모인 1997년에 『나비전쟁』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건 내 첫 번째 단독 작품집이었다. 이런 흐름이 꾸준히 계속되었고 지금까지 내 이름을 단 꽤 많은 책들이 나왔고 지금도 새 단편집을 준비 중이다. 습작과 정식 작품의 경계선을 언제 넘어섰는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던 거 같지만.
이건 보편화시키기 어려운 경험이다. 문단 데뷔, 심지어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해 어떤 계획도 없었던 사람이, 1990년대라는 시기를 통과하며 장르물로 분류되는 글을 쓰는 동안 겪었던 일. 지금 같은 경험을 되풀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 당시 과학소설동호회에서 활동했던 회원들이 겪었던 경험도 나와는 많이 달랐다. 어떤 사람들은 나보다 가볍게 즐긴 아마추어였고 어떤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진지했으며 그 진지한 사람들 중 일부는 여전히 나보다 훨씬 진지하게 활동하고 있다. 후자는 나보다 더 선명한 데뷔작의 기억을 갖고 있겠지만, 어쩌나 이 질문을 받은 건 하필이면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