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낙화落花

영국의 시 축제들

시인은 청진기, 아픔을 듣고 붉은 꽃을 처방한다

여성의 눈으로 희망 찾기

특집을 기획하며 민족의 의지와 행운이 함께한「독립선언서」 작성 과정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린 영문 「3·1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에서 배제된 여성들의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독립선언서」에 담긴 이상과 현실

이야기꾼의 운명, 이야기의 힘

SNS는 눈, 유튜브 문학은?

“깨끗한 것이 선악보다 낫다”

자동차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에서

일출(日出), 빛과 색 이야기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모든 순간들이 한국문학이고 ≪현대문학≫이다

하필이면

김점순 어머니

가면 오리, 오면 십리

티브이를 보다가,뼈 펴는 소리 포스터

행자가 사라졌다! 눈과 사람과 눈사람

불꽃놀이

「동시대 문학의 시간착오와 불안」에 부쳐

운이 좋은 이유 작가, 같이 아픈 사람들이 주는 큰 위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세밀하게, 간결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LOVE NEVER FAILS

“차(茶)란 먼저 형태를 만들고 마음을 담는거야”

역사가 인류에 대해 말해주는 것

다르게 또 새롭게, 문학 안에서 전진하는 페미니즘

통째로 얼지 않으려고

“죽음의 그림자 가운데 써나간 고통의 기록”

터키인들도 ‘타는 목마름’을 아는가!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대산창작기금,대산청소년문학상 등

2019 대산창작기금 및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공모 등

나의 아버지

가면 오리, 오면 십리

- 나의 어머니 홍윤숙

글 양윤 ㅣ 홍윤숙의 장남. 이l화여자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1958년생
저서 『소비자심리학』 등

홍윤숙 ㅣ 시인, 1925~2015
시집 『그 소식』 『쓸쓸함을 위하여』 『태양의 건너마을』 『지상의 그 집』 『내 안의 광야』 『지상의 끝에서 돌아보는 지상』 『조선의 꽃』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별을 노래한다』 등

참으로 무덥던 지난여름, 어머니의 유고집이 박스로 들어왔다. 마치 너희들 나를 잊고 있었지? 하시듯 집으로 들어오셨다. 정말 그랬나 보다……. 어머니를 잊고 있었나 보다…….

“내 생애의 마지막 시집에 할 말은,
다가올 죽음 앞에 당당하고 의연하게 마주 설 것이다.”

어머니는 왜 그렇게 늘 당당하고 의연하고자 하셨을까? 내가 어렸을 때 내 앞의 어머니는 늘 투정의 대상이었다. 고맙게도 뭐든 이루어졌었다. 좀 더 자라서는 뭐든 좋게만 봐주는 예쁜 누님 같은 분이셨다. 결혼하고 자식을 키우며 내 앞의 어머니는 인생 선배님이셨다. 그러나 난 내 인생을, 어머니 세대와는 다른 인생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교육이 달랐고 생활 습관과 누리는 문화도 달랐다. 그러면서 우리는 할머니 손자 손녀 딸 아들 며느리 시어머니 엄마 아빠로서 그렇게 서로서로 얽히고설켜 몽쳐 살았다.
뭐가 그렇게 바빴을까? 난 정말이지 어머니의 생활을 몰랐다. 아니 알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맞을 듯하다. 어머니는 늘 강인하셨고 옳으셨으며 나의 불편함을 먼저 걷어 주셨다. 어머니에게 난 우선이었고 그래서 충분히 바쁠 수 있었기에 어느 날부터인가 고집을 부리시는 어머니를 납득하기 어려웠고 회피하며 외면하였다. 고약하게 매우 바쁘다며…….
어머니는 「벌판 끝에 서서」라는 시에서 “태어난 일에 얼마나 값했을까”라 반문하시며 “세상의 큰 별들 사이에 이름 없는 작은 돌 하나 끼워 넣느라 지척이며 달려온……”이라고 하셨다. 이제 지하철 안에서 곧잘 쉽게 자리를 양보 받고, 한 번이면 끝낼 일들도 두세 번의 수고를 더 하고 나서야 끝맺기에, 안 되겠다 싶어 받아 든 꿀 같은 휴식 기간. 마치 시험공부 전에 책상 정리를 시작하듯이 제일 먼저 서재를 정리했다. 어머니의 시집이 이렇게 많았다니…… 하며 집어 든 시집의 첫 장, 친숙한 필체의 ‘나의 희망에게’와 책갈피 사이로 붉은 단풍잎, 그 옆으로 「희망에게」라는 시가 보였다. 읽어 내려가며 가슴은 두근거리고 눈은 뜨거워졌다.

너는 나의 집이었다 / 꿈꾸고 기다리고 / 밤에도 창문 열어놓고 별을 바라보던, / 수많은 날 쉴 수 없는 길 위에서 / 헤매던 때도 / 너의 넓은 등에 기대어 따뜻했었다 / 늘 푸른 이마에 금빛 별 반짝이며 / 깃발 하나 펄럭이던, 멀어서 아름답던 / 먼 전방의 기수 / 나 무시로 지쳐 쓰러지던 날에도 / 네가 받쳐준 풀빛 장대 하나로 / 다시 일어나 걸었었다 / 그때 우리의 우정은 영원한 줄 알았었지 / 그러나 이제 나는 너를 작별해야 한다 / 병들어 뿌리째 흔들리는 나무 / 희망이 산더미로 달려온다 한들 / 무슨 소용 있는가 / 오던 길 되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없는 / 이제 나는 네 손을 놓아야 한다 / 희망의 끝에는 무엇이 올까 / 너는 결코 말하지 않고 / 나 또한 너에게 묻지 않는다 / 하늘 우러러 겨울 광야에 서서 / 너 없는 빈 땅에 발끝을 모을 뿐

― 시 「희망에게: 놀이 46」 전문


‘가면 오리, 오면 십리.’ 집 가까이에 있는 산책로에 어머니가 붙여준 이름이다. 아이들에게, 비록 눈에 띄게 크게 보이진 않더라도 세상은 온통 꽃 천지임을 알려준 곳. 나와 아이들은 ‘오요오요’하며 많이도 놀았던 곳이다. 이제는 당신의 손자, 손녀가 그 강아지풀을 손바닥에 놓고 ‘오요오요’하며 그리워하고 있음을 아실까?

나는 할머니의 ‘새끼’이고 ‘강아지’였다 / 밤마다 잘 자라고 / 등을 긁어주시던 할머니의 손은 / 한 다발의 까실하고 보드라운 강아지풀이었다 / 돌아가신 할머니는 / 강아지풀 우거진 산으로 가시고 그로부터 / 자욱하게 흐드러진 강아지풀 밭에 서면 / 오요오요 부르던 어린 날의 할머니 목소리 들려온다 / 그 목소리 옛날의 나를 불러주던 / 낙원의 소리임을 이제 알겠지만 / 소리의 임자 간 곳 없고 / 그날의 빈자리 혼자서 돌아가는 / 쇠락한 일몰의 귀로에서 / 온몸 따가운 가시에 찔리고 있다 // 추억이 그처럼 아픈 가시임을 / 몰랐었다

— 시 「강아지풀」 전문


‘시’라는 지독한 배냇병을 갖고 계셨던 어머니는 ‘가면 오리, 오면 십리’ 그 산책로에서 아이들과 재미난 추억과 함께 시집도 만드셨다. 지금은 아이들과 어머니 다 함께 걷지는 못하는 그 산책길을, 어머니 시집 속에 나오는 꽃들을 찾으며, 어머니의 발자국을 더듬으며 걷는다.

내가 지상을 마지막 떠나는 날은 / 꽃 피는 춘삼월 어느 아침이거나 / 만산홍엽으로 불타오르는 / 노을 속 해 지는 가을 저녁 무렵이면 좋겠다

― 시 「내가 떠나는 날은: 십자가 29」 중에서

꽃 피는 춘삼월이거나 만산홍엽 가을 저녁 무렵을 바라셨는데, 눈이 부시게 푸르른 가을 아침에 떠나셨다. 그해 가을은 유난히 짧아, 눈부신 가을 하늘을 마지막 선물로 주시고 꿈같이 푸르디푸른 하늘로 사라지셨다. 구차스러운 모습 보이기도, 부탁하기도 싫어하셨던 딱 어머니다운 모습이셨다.

그대 먼저 와서 터 닦아 세운 집 / 생의 마지막 집 한 채 여기 있으니 / 내 희망 또한 여기 와 쉬리라

— 시 「이별」 중에서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어머니의 비문은 어머니의 깔끔한 성품 그대로였다. 이제 어머니는 더 이상편찮으시지도 불면으로 고통받지도 않으시겠지. 친우들과 그렇게 가고 싶어 하시던 외가도 쉽게 방문하고 혹부리 영감처럼 옛날이야기를 쉬지 않고 들려주셨다는 그리운 할머니도 즐겁게 만나고 계시겠지.

더러는 / 외할머니 머리쪽 같은 / 파꽃 대궁이 / 더러는 / 큰이모 옥비녀만큼 한 / 파꽃 대궁이 // 갓난이 아린 꿈이 / 꽃술처럼 피어나던 / 파밭 이랑에서 / 긴 날을 심심하던 / 어머니 봄나들이 // 외갓집 / 잔칫날은 / 길기만 했다

― 시 「파꽃: 파밭에서」 전문


무슨 때마다 어머니가 쥐어주신 하얀 봉투 속 편지지에는 한결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술 그만 드시게.” 어머니의 그 바람 아직 완전히 들어주진 못하지만 마음만은 늘…….

일 년 삼 백 육 십 오 일 / 내 부 수 리 중 입 니 다 평 생 / 고 쳐 도 고 쳐 도 비 가 샙 니 다

― 시 「마음: 놀이 53」 전문


어머니와의 시간을 추억하면 모든 시간이 놀이였었다. 다만 어머니의 말년엔, 그 당시엔 그럴 수가 없었다. 워낙 깔끔하고 반듯하셨던 분이셨기에 아들로서 어머니가 변하는 모습에 마냥 지혜롭기만은 힘들었었다. 불면의 고통으로 시 쓰기 힘들다며 영어 문법책을 부탁하셨다. 어머니에게 재미난 영어 회화를 권하자, 재미난 영어책을 읽고 싶다며 그래서 문법책이 필요하다며 고집을 부리셨다. 돌아보면 어머니의 고집에는 분명한 명분이 있었고 어머니다운 것이었다.

이제 손 놓고 헤어져야 한다 / 여기까지는 /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름다운 이름들 / 사랑 또는 미움으로 꽃밭도 일궜지만 / 여기서부턴 / 누구도 함께 갈 수 없는 나라 / 위리안치(圍籬安置) 아득한 적소의 변방이다 / 혼자서 가야 하는, / 편지하지 마라 / 전화도 사절이다 / 나는 여기서 오래전부터 / 아무도 모르는 마지막 공부에 / 골몰하고 있다 / 잊혀지고 작아지고 이윽고 부서져 / 사라지는 법 / 이 세상 마지막 공부에 / 땀 흘리고 있다 //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에도 / 땅이 울리는 / 이 마을에 지금 살아있는 건 / 삼복염천에 불같이 울어대는 매미뿐이다 / 짧은 생에 목 놓아 울고 있는 / 매미의 애끓는 곡성뿐이다

― 시 「마지막 공부 1: 놀이 9」 전문


어머니의 손때 묻은 물건들 속 한 수첩에는 삐뚤빼뚤하지만 분명 어머니의 필체가 가득하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습작을 하셨던 듯하다. 어느 한순간의 감정도 놓치지 않으며, 글로 표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셨던 그런 분이셨다. 특히 「방문」이라는 시를 읽으며 나는 먼저 떠나신 아버지를 향한 어머니의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자녀들이 다 떠나 텅 빈 듯한 집안에 두 분만이 남아 먼저 한 분을 떠나보내며……. 그 상실감은 감히 가늠하기 힘든 것이리라.

먼 후일……내가 / 유리병의 물처럼 맑아질 때 / 눈부신 소복으로 / 찾아가리다 / 문은 / 조금만 / 열어놓아주십시오 // 잘 아는 노래의 / 첫 구절처럼 / 가벼운 망설임의 / 문을 밀면 // 당신은 그때 어디쯤에서 / 환—히 눈 시린 / 은백의 머리를 / 들어주실까…… // 알 듯 모를 듯 / 아슴한 눈길 / 비가 서리고 // 난로엔 / 곱게 세월 묻은 / 주전자 하나 / 숭숭 물이 끓게 하십시오 // 손수 차 한 잔 / 따라주시고 / 가만한 웃음 / 흘려주십시오 // 창 밖에 흰 눈이 / 소리 없이 내리는 / 그런 날 오후에 / 찾아가리다

— 시 「방문 1」 전문


어머니가 지금은 먼 곳에 계심을 안다. 그러나 어머니의 시집들을 한 권 두 권 읽다 보니, 어머니가 항상 내 곁에 계신 듯하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시 속에 계시고, 또 그 시 속에는 어머니의 인생이 들어있다. 심지어 어머니의 목소리까지 들어있었다. 댕댕댕, 뚝뚝뚝, 쟁쟁쟁~ 어머니의 유려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예전에 어머니는 늘 내 앞쪽에 자리하셨다. 이제 어머니의 시들과 함께 있는 나는, 어머니와 나란히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어머니의 목소리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들으며…… 어머니를 만날 수 있기를 갈망해 본다.

감꽃 지는 / 감나무 밑에서 / 지는 감꽃을 바라보노라면 / 어디선가 시나브로 해 지는 소리 들려 / 을지로 퇴계로 한남동 고개에서 / 한강 서강 샛강 건너에서 / 지는 해 댕댕댕 우는 소리가 들려 / 가슴에 새 한 마리 / 덩달아 부엉부엉 우는 소리가 들려 / 감꽃 지는 / 감나무 밑에서 / 지는 감꽃을 바라보노라면 / 사방에서 뚝뚝뚝 해 지는 소리 들려 / 동서남북 어디서나 지는 소리만 들려 / 이 근래 나의 귀엔 / 지는 소리만 들려 / 눈 감고 지는 소리 듣고 있노라면 / 무척 아름다운 세상 하나가 / 쟁쟁쟁 피리 불며 떠나는 소리 들려 / 감꽃 지는 / 감나무 밑에서 / 지는 감꽃을 바라보노라면 / 이 나라 사람들이 모두 / 보슬보슬 빗발 되어 / 저 먼 나라로 떠나는 소리 들려

— 시 「감꽃 지는 감나무 밑에서 1」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