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낙화落花

영국의 시 축제들

시인은 청진기, 아픔을 듣고 붉은 꽃을 처방한다

여성의 눈으로 희망 찾기

특집을 기획하며 민족의 의지와 행운이 함께한「독립선언서」 작성 과정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린 영문 「3·1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에서 배제된 여성들의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독립선언서」에 담긴 이상과 현실

이야기꾼의 운명, 이야기의 힘

SNS는 눈, 유튜브 문학은?

“깨끗한 것이 선악보다 낫다”

자동차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에서

일출(日出), 빛과 색 이야기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모든 순간들이 한국문학이고 ≪현대문학≫이다

하필이면

김점순 어머니

가면 오리, 오면 십리

티브이를 보다가,뼈 펴는 소리 포스터

행자가 사라졌다! 눈과 사람과 눈사람

불꽃놀이

「동시대 문학의 시간착오와 불안」에 부쳐

운이 좋은 이유 작가, 같이 아픈 사람들이 주는 큰 위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세밀하게, 간결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LOVE NEVER FAILS

“차(茶)란 먼저 형태를 만들고 마음을 담는거야”

역사가 인류에 대해 말해주는 것

다르게 또 새롭게, 문학 안에서 전진하는 페미니즘

통째로 얼지 않으려고

“죽음의 그림자 가운데 써나간 고통의 기록”

터키인들도 ‘타는 목마름’을 아는가!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대산창작기금,대산청소년문학상 등

2019 대산창작기금 및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공모 등

단편소설

눈과 사람과 눈사람

임솔아 ㅣ 시인, 소설가, 1987년생
소설 『최선의 삶』,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등


먹을 것을 좀 사가자고 영혜가 말했다. 마트에서 이틀 어치의 식량을 골랐다. 규미가 애플망고를 집었다가 가격을 보고 다시 내려놓았다.
“먹고 싶었던 것 다 먹고. 하고 싶었던 말 다 해요.”
애플망고를 카트에 담으며 영혜가 말했다.
“우리가 말할 수 있을까요.”
나는 영혜에게 물었다.
“할 수 있지요.”
규미가 애플망고를 카트에 하나 더 담으며 답했다. 영혜는 대답 대신 계산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영혜는 이런 식으로 계산을 도맡았다. 수입의 대부분을 여기다가 써왔다. 처음으로 영혜가 카드를 내민 것은 1년 전 겨울이었다. 그때 나는 성폭력 피해자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사람을 살리러 갈 사람이 필요하다 했다. 병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먼저 도착한 나래와 영혜를 만났다. 환자는 의식불명이었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 입원치료를 하면 살릴 수 있다 했다. 그 절차를 밟으려면 병원비부터 결제해야 한다 했다. 100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결제는 영혜가 했다. 이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넷을 떠돌아다녔다. 영혜가 으스대며 카드를 내밀었다고. 거액을 쉽게 결제하는 영혜를 보며 돈 없는 자의 소외감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하는 일도 있는 자들이 차지한다고. 나래는 개탄했다.
영혜는 카드 연체를 혼자서 견디고 있을지 몰랐다. 영혜가 결제를 안 했더라면. 그저 발을 동동 구르고 걱정만 하고 있었더라면. 영혜가 그 장소에 달려가지 않았더라면. 다음 날 누군가가 병원으로 달려간 것에 그저 고마움을 표하는 정도였다면. 이런 가정법을 레일처럼 끝없이 나열해놓고 나는 매일매일 마룻바닥의 끄트머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늘 같은 곳에 나는 도착해 있었다. 우리들의 출발지. 우리가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하지 않았다면.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더라면.

새해를 낀 연휴였지만 고속도로 하행선은 차가 많지 않았다. 영혜가 눈이 침침해지면 모두가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규미가 선곡했다. 모두에게 졸음이 몰려오면 셋이서 끝말잇기를 했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오고, 진천교를 건너고, 아파트 단지를 지나고, 드문드문 주유소와 공장과 목재소를 지났다. 숲길을 통과해 저수지에 도착했다. 하얗게 얼어붙은 저수지 위에서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창밖을 바라보며 규미가 말했다.
“위험하겠지요. 따뜻하기도 하겠지요.”
영혜는 저수지에 흩어져있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닥불로 모여들었다. 장갑을 벗고 두 손바닥을 모닥불을 향해 펼치고 있었다. 지원은 저수지 북쪽 마을에 살았다.

펜션 입구에서 지원이 팔을 들어 우리에게 손짓을 했다. 영혜와 규미와 나는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켰다. 너무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하셨다며 지원은 트렁크에서 우리의 캐리어를 꺼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지요.”
규미가 지원에게 말했다. 지난 1년 동안 지원은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진천에서 서울을 왕복해 다녔다. 영혜와 규미와 내가 끝말잇기를 해가며 견뎌낸 거리였다.
지원이 음식 봉투를 들고 앞장섰다. 주변은 온통 새하얬다. 도로도 도로가 아닌 곳도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두 손으로 캐리어를 번쩍 들어 앞사람의 발자국에 내 발을 넣어가며 걸었다. 한 사람이 걸어간 것처럼 보이는 네 사람의 발자국이 찍혔다.
만수위를 찾아 붕어가 모여드는 여름 한철과 빙어가 연안으로 올라오는 겨울 한철에 사람들은 이 저수지를 찾아온다고 지원은 말했다. 낚시 장비 대여 가게들, 그 가게가 운영하는 펜션, 그 펜션에서 운영하는 횟집이 이 동네에 있는 건물의 거의 전부였다. 한철이 지나가면 물고기가 되돌아가고 사람들도 되돌아가고 가게들은 문을 닫는다 했다.
“지원 씨는요?”
영혜가 물었다.
“나는 다시 산책을 해야지요.”
지원이 가장 자주 한 말이었다. 지원의 자동차에는 짙은 개 냄새가 늘 배어 있었다. 차문을 열면 하얗고 얇은 개털들이 공중으로 피어올랐다. 시트에도 개털이 뒤엉켜 있었고 색색깔의 개 목줄과 개껌이 놓여 있었다. 바스러지다 만 낙엽과 나뭇가지들을 싣고 다니는 듯 보였다.
“미안해요. 사람이 타는 건 처음이라서.”
그 차를 처음 탔을 때 지원은 조수석 서랍에서 박스테이프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내 옷에 붙은 개털을 떼어냈다. 15년 동안 매일 아침마다 개 네 마리를 이 차에 태웠다고 지원은 말했다.
“아침 먹고 설거지하고 돌아서면 개들이 차 문 앞에 쪼르르 앉아 있어요. 빨리 문 열어 달라고요. 차에 타면 서로 창밖을 보겠다고 난리예요. 창문마다 한 마리씩 자리를 차지하고요. 창밖으로 머리를 쭉 내밀고 바깥을 구경해요. 옆 마을에 사람이 안 오는 산이 있거든요. 거기에다 차를 세워요. 개들하고 산길을 걸어요. 사랑이는 제 옆만 졸졸 따라다니고요. 걸으면서 자꾸 저를 올려다봐요. 소망이는 진흙만 찾아다녀요. 새하얀 털이 다 새까매질 때까지 온몸을 진흙에 비벼요. 그리고 나한테 달려와서 앞발을 들고서 덥석 안겨요. 내 옷에 진흙을 다 묻혀놔요. 진실이는 하울링을 해요. 목을 쭉 빼고 하늘을 보고 울어요. 자기가 늑대라도 되는 것처럼요. 하울링을 하다가 자기가 무슨 절창이라도 한 양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봐요. 믿음이는 저 혼자 산속으로 마구마구 뛰어가요. 숲속으로 아예 사라져 버려요. 믿음이를 부르면 아주아주 멀리서부터 믿음이 발소리가 들려요. 다다다다, 하고요. 내 목소리를 향해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거예요.”
지원에게 산책은 사는 일의 목적이었다. 서울 토박이인 지원이 직장을 그만두고 진천에 이사를 온 유일한 이유였다. 지원이 서울에 올라오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차에 묻어난 개의 흔적도 냄새도 줄어들었다. 지원은 산책을 할 겨를이 없다고 했다. 영혜는 10년 넘게 키워온 화분들을 죽였다고 했다. 규미는 3개월 동안 이삿짐을 풀지 못했다고 했다. 민조는 아이가 불안증세를 보인다고 했다. 다시 산책을 해야 한다고 지원은 몇 번이고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는 다시 화분에 물을 주어야 하고 집에서 정리정돈을 해야 하고 아이를 돌보아야 한다고 했다. 1년 동안 한결같이 우리에게 이 말을 들려주었다.

펜션 주인은 우리에게 장비는 갖고 오셨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낚시를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주인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여분의 베개를 더 가져다줄 수도 있고, 바비큐를 원한다면 숯을 피워줄 수도 있다고 했다.
“테이블은요?”
영혜가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은 우리를 창고로 안내했다. 스테인리스 냄비들과 장독들 뒤에서 캠핑용 접이식 테이블을 찾아냈다. 철제다리에는 거미줄이 감겨 있었다. 우리는 그 테이블을 운반했다. 각자 걸레를 들고 테이블 다리와 상판을 닦았다. 거실 중앙에 테이블을 펼쳐 놓았다. 주인에게 의자 다섯 개도 받아왔다.
“네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한 자리가 더 필요해요.”
우리는 각자의 노트북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잘 도착하셨나요? 미안해요. 함께 있지 못해서.”
민조가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규미가 핸드폰을 꺼내 빈 의자 사진을 찍어 채팅방에 전송했다.
“민조 씨 자리도 여기 있어요.”
민조는 매번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작년 12월에는 시댁에서 김장을 해야 한다고, 온라인 회의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회의 시간이 되었을 때 민조는 단체 채팅방에 함께 있었다. 배추 한 포기에 양념을 바르고 고무장갑을 벗어 핸드폰을 보고, 회의 안건에 대해 말을 하다가 다시 고무장갑을 끼고 배추에 양념을 발랐다. 결국 시어머니와 크게 다퉜고 김장을 하다 말고 시댁을 나왔다. 민조는 남편과 언쟁하는 일이 잦아졌다. 상담사는 민조의 아이가 엄마의 예전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전했다.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고 민조는 고백했다. 이런 말을 몇 번이고 했고, 이 일에 마음 쓰지 말라는 우리의 답을 듣고도 민조는 언제나 함께 있었다.
영혜가 원두커피를 내리고 연필을 깎는 동안, 나와 규미는 영상채팅 프로그램을 켜서 모두를 초대했다. 지원은 돋보기안경을 꺼내 쓰고 다시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보자고 말했다. 영상 속 민조가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나래 씨의 블로그가 알려지기 시작한 건 1년 전 가을이었어요. 그때 저도 나래 씨의 블로그를 즐겨찾기했고요. 다른 사람들처럼 나래 씨의 글에 좋아요 버튼을 눌렀지요. 다른 사람들처럼 나래 씨의 글에 ‘연대합니다’라고 댓글을 달았고요. 그 무렵 나래 씨의 포스팅 하나가 제 마음을 완전히 바꿔놓았어요. 좋아요 버튼을 누르고 자신의 몫을 다했다고 여기는 사람들, 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댓글 하나로 연대를 표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나래 씨는 호소했어요.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제발 누구라도 함께 일하자고 요청했어요. 실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되었지요. 남편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네 시간 정도 시간을 내서 집회에 참여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집회에서 당신들을 만났고요. 저처럼 나래 씨의 글을 보고 나온 거였지요. 기왕 이렇게 모였으니 작은 일이라도 해보자는 이야기가 우리의 시작이었어요.”
나는 그 집회에서 민조 옆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울고 있어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앞사람이 티슈 몇 장을 건네주었다. 나는 그 티슈를 민조에게 건넸다. 집회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때까지 민조는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민조가 일어날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피해자들의 상황은 제각각이었다. 명예훼손 고소를 당한 사람도 있었고, 고소 위협을 받아서 법률적인 대응이 필요한 사람도 있었고, 이미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전담 변호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영상 속에서 민조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아이가 깼나 봐요. 다시 재우고 올게요.”
민조가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아이가 칭얼대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지원은 돋보기를 벗었다. 영혜는 냉장고에서 애플망고를 꺼내 왔다. 영혜는 잠자코 망고를 깎았다. 영혜의 손 아래로 망고가 미끄러질 때 지원이 잽싸게 손을 뻗었다.
“잡았어요!”
망고의 한 귀퉁이가 뭉그러져 있었다. 뭉그러진 부분을 과도로 도려내 영혜는 자신의 입안에 넣었다. 깔끔하게 잘린 조각들을 우리에게 내밀었다. 망고는 씹기도 전에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맛이 좋다고 규미가 말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한 조각이 접시 위에 남아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양보하려다 끝까지 남아버렸다. 민조가 돌아왔다. 영혜가 입을 열었다.
“그때쯤 나래 씨의 블로그에 묘한 글이 올라왔어요. 나래 씨는 몹시 화가 나 있었어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빼앗아가고 있다고 적어두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우리에게 하는 말일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지요.”
내가 영혜의 말을 이었다.
“저도 그 글을 보고 나래 씨가 하고 있는 일 얘긴 줄 알았어요. 하던 일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나래 씨한테 일러스트를 맡긴 클라이언트가 연락을 끊었다고 했거든요.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고 나서 워낙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 맥락에서 이해를 한 거지요.”

엄지손가락으로 눈썹 뼈를 꾹꾹 누르면서 지원이 말했다.
“그때 우리는 예상한 것보다 일이 너무 많았어요. 정신이 거의 없었지요. 나래 씨를 통해서만 연락을 취하던 피해자들도 우리에게 직접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고요. 그 사람들과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통화를 하고 나면 하루가 금방 가버렸어요. 가해자들로부터 협박성 전화가 걸려오고. 그때만 해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거의 무지한 상태였잖아요.”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