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무서운시간時間

로마,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시간 속에서

절대적 비순응주의 비평과 ‘있는 그대로’의 번역

유령작가 X｜특집을 기획하며 ①못 먹고 펌 랜딩 ②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싶을 수도 없다. ③생시의 여러 단면 ④새로운 계급우화, 좀비 아포칼립스

①‘동아시아’에서 ‘문학’으로 ②마음의 연대 :전 통, 차이, 미래 그리고 독자 ③중·일 참가작가 프로필

고집 피워 될 일이 아닌데

You Imagined, Now You Live - 존 레논과의 인터뷰

“요즘 어디 가서 그런 얘기 하면 큰일 납니다”

쓰고 또 쓰다, 정통 관인학자의 기록문학

못 쓰는 종이로 비행기를 접는다 비행기는 푸릉푸릉 날아갈 테지 하늘나라 별애기를 태우고 올 테지

새 신문, 새 작품 그리고 새 삶

①대서,마음의 방향 ②이것이 나의 차례

①단추를 채울 때마다 ②눈빛 드라이브

선녀의 아이

첫 번째ㅣ문학이 오는 순간 두 번째ㅣ벼락 맞은 어린 대추나무가 있던 방 세 번째ㅣ 나의 작은 불안 노트 -불안과 문학

2018 대산창작기금ㅣ 자신만의 개성 속에 확보해 낸 심도와 성장가능성 제26회 대산문학상 ㅣ 제26회 대산문학상 시·소설 부문 본심 대상작 선정

만해(萬海)와 무산(霧山), 그리고 백담사

삶의 풍경을 바꾸어 놓은 근대 철도

상상력의 확장, 혹은 축소

한국문학 침체기? 그래도 등불 밝히는 작가·작품들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

2018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지원대상작 선정 등

나의 데뷔작

새 신문, 새 작품 그리고 새 삶

글 고정욱 ㅣ 소설가, 아동문학가, 1960년생
동화 『가방 들어주는 아이』『까칠한 재석이 시리즈』 등

학원 도서관 휴게실에는 낯선 신문 한 무더기가 늘 쌓여 있 었다. 한 해 전에 창간한 새 신문이었다. 널리 알리기 위해 누 군가가 매일 갖다 놓는 것 같았다. 그 무렵 한창 박사 논문을 쓰던 나는 아침이면 대학원 도서관에 출근하듯 나가 작업하 고 저녁이면 집에 돌아오는 가열한 삶을 살고 있었다. 가끔 휴 식 시간에 펼쳐보는 신문은 그런 나에게 제법 큰 청량감을 주 었다.
새로 만든 신문이라 편집은 참신했고, 내용도 특이한 것들 이 제법 있었다. 그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건 ‘문예사계’라는 작품 현상공모였다. 살펴보니 그 신문은 신춘문예 대신 계절 마다 한 명씩 장르별로 작품을 뽑는다는 것이 아닌가. 벌써 세 번을 뽑았고, 마지막 계절인 겨울철에 새 작품을 기다린다는 공고였다. 순간 내 가슴은 뛰었다. 박사논문을 쓰느라 깊이 묻 어 두었던 창작욕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 다시 솟구쳤던 것 이다. 물론 논문이라는 우선순위를 잊고 있지는 않았다.
그날부터 귀가하면 시간 날 때마다 컴퓨터 하드디스크 안에 깊숙이 묻어 두었던 파일을 불러내 소설을 다듬었다. 가장 자 신 있는 작품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골라든 작품은 단편소설 「선험」. 5, 6년 전에 써 놓은 것이었다. 물론 시간 날 때마다 고치고 또 고쳐 더 이상 다듬을 수 없는 지경이긴 했다.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는 독특했다. 하나뿐인 여동생은 잠시 간호대학을 다녔다. 받아 온 교 과서들이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심리학 교재를 우연히 읽다 보니 ‘선입견’이라는 항 목이 있었다. 제목 없는 글을 던져주며 아리송한 표현들을 통해 이 글이 무슨 내용인지 맞춰 보 라는 것이었다. 제목 없이 글을 읽는다는 것은 정말 실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새로운 난감함이었 다. 그때 나는 세상 사물과 사건을 먼저 경험해 보고 나중에 의미 부여한다는 것이 또 다른 인식 체계의 접근방법임을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내가 서술하려는 사물이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하도록 독자들에게 화두를 던지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2인칭 소설. 그 작품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 행하고자 하는 이 작업의 준비상황을 설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소설은 시작한다. 작가가 던지는 당신이라는 지칭에 독자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 구성이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나의 자전적인 문제도 있었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내가 소설을 쓴다 했을 때 주변의 평가는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경험과 현 장을 중시하던 당시 문단 풍토에서 활동이 제한적인 나에게 작가로서의 성공은 기약하기 어렵다 는 세평이 주위에 가득했다. 그리하여 선험적인 사고로도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다는 오기 비슷한 시도가 작품을 쓰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완성은 5년이나 더 지나야 가능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고혜숙이라는 중문 과 여자 후배를 만났다. 그녀가 내 작품을 보고 싶다 하여 몇 편의 습작을 건넸을 때 콕 집어 이 작품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을 군더더기라 지적하였다. 독자들 입장에서는 없어도 되는 부분 이라며 덜어내면 어떻겠냐는 거다. 어차피 나는 내 글에 대한 집착이 별로 없었다. 못할 것도 없 다는 생각에 과감히 삭제하고 보니 정말 작품은 알찬 것으로 변신했다. 한마디로 꼭지를 딴 것이 다.
이 작품을 이웃집 친구처럼 한 번씩 불러내 읽으며 다듬는 일을 하는 것은 차라리 즐거움이었 다. 건조한 논리와 이성의 문장을 짜내느라 혹사당했던 나의 뇌는 작품을 수정할 때 비로소 감성 의 샤워로 활력을 되찾았다. 그렇게 신선함을 줄 수 없었다. 마침내 공모 마감 전에 마무리되었으 니 완성이라기보다 반짝이는 구리거울을 더 빛나게 거친 가죽으로 연마하는 격이었다.
작품을 학교 우체국에서 발송한 뒤 나는 바로 잊어버렸다. 박사 논문 심사의 긴 여정이 시작되 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심사를 앞뒀던 12월 중순의 어느 날, 신문사의 신효정 부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내가 쓴 소설이 당선되었다는 통보였다. 믿을 수 없었다. 논문 심사장에서 이 사실 을 발표하자 심사위원 교수들 전원은 크게 손뼉을 쳐 주었다. 모두들 국문학자들이라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결국 다음해에 나는 박사학위와 함께 소설 등단이라는 칼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이 험한 세상 에 나올 수 있었다. 지금도 모니터의 커서가 깜빡일 때면 나를 구원으로 이끌어 오늘날의 작가 고 정욱을 만든 등단작 「선험」을 기억한다. 나의 문학은 내 삶의 선험이었다. 작품에 고언을 던진 후배 고혜숙은 지금 저작권에이전시 회사의 대표가 되었고, 중견매체가 된 그 새로운 신문은 《문화일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