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자꾸 옛 기억들이 떠오르는데 그런 것들이 점점 사라져갔다.
몇 년 뒤면 북성포구 횟집에 앉아 느껴보던 바다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기억할 수 있을까.
정호 형과 다시 횟집에 앉아 영화에는 나오지도 않은 달을 얘기하고,
손가락에 불이 들어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그 밤,
스돈스돈거리며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무전을 쳤던 우리의 목소리를 밤바다는 들었을 것이다.
이 포구 어디쯤 우리의 빛나던 청춘이 스돈스돈돈스돈스돈돈돈, 무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행기 안이야? 정호 형이 병상에 누워 뜻밖의 말을 했다.
간성혼수가 오면 욕을 하거나 패악을 부리는 사람이 많다는데 저 이는 자꾸 어딜 가나 봐요. 들 어보지도 못한 나라 이름을 대기도 하고요. 형수가 기운이 다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간암이라는데 황달까지 와서 병원에서도 별다른 의료행위를 하지 못하는 처지라고 했다. 단단 한 형이라고 생각했다. 배가 나오기 시작하고 고혈압이 경계에 있어 술을 줄이고 담배를 끊어야 하나 고민하는 나와는 달랐다. 얼마 전 만났을 때에도 이런 일이 있게 되리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형이 누운 침상 옆 흰 벽으로 연기 같은 그림자가 움직여 천장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창밖에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형은 몰라보게 살이 빠져 있었 고, 얼굴이 노랬고 검었다. 무엇보다 흐릿한 초점 없는 눈동자는 형이라고 믿을 수 없게 했다.
포구로 다가갈수록 바닷바람에 비린 냄새가 실려 왔다. 신선한 해조류 냄새라기보다 어패류 썩는 쪽에 가까운 냄새였다. 적막한 어둠 속에서 두어 곳의 횟집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만조 시 간인지 물결이 방파제 바로 아래에서 검푸르게 출렁였다. 한쪽은 난간에, 한쪽은 바다 깊이 다 리를 박은 횟집에 들어섰다. 안쪽에 자리 잡고 뒷문으로 나가보니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물 이 발아래에서 출렁였다. 갈매기들이 근처에 있는지 웅웅대는 소리가 작게 들리다 어둠에 묻혔 다. 쓸쓸해질 때,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고개가 저어질 때, 우리는 여기로 스며들 듯 와서 말없이 술잔을 비우며 바다와 어둠과 적막 같은 것들이 축축하게 젖어들 때까지 견뎠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포구를 뒤에 두고 나올 때면 누군가 어깨동무를 하듯 손을 올렸고, 우리는 스며들 때와는 다른 걸음으로 포구를 빠져나왔다. 그래서 이 포구는 우리의 아지트였다.
주문한 찌개가 나오기도 전에 소주를 연거푸 비웠다.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위로 스며들자 비 로소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주인이 찌개를 휴대용 버너 위에 올려놓고 가스 불을 켰다. 그 날그날 있는 생선으로 알아서 찌개를 해주는 곳이라 별다른 주문을 하지 않았는데 작은 병어와 감자를 넣은, 조림에 가까운 찌개였다.
정호 형이 해외여행을 가고 싶었던 걸까?
성태가 젓가락을 집었다가 내려놓으며 물었다. 내가 알기로 형은 여행을 거의 가지 않았다. 애 들 어렸을 때는 우리들 성화에 반 강제로 몇 번 국내여행을 같이 간 적이 있긴 했지만 가게를 비 우는 게 어려워 늘 망설였다. 언젠가 형이 가족과 설악산을 다녀왔다고 자랑처럼 얘기한 적이 있 었다. 우리가 형도 여행 좀 다니고 인생을 즐기라고 얘기한 뒤였다. 가족끼리 설악산에서 이틀을 묵고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가는 길에 오대산 월정사를 둘러보고 산채정식을 먹고 설악 산 콘도까지 가는데, 가만 보니까 작년하고 똑같은 코스로 가게 된 거야. 월정사 아래 산채정식 식당까지 똑같았어. 우리가 앉은 자리까지. 방바닥에 앉아서 먹는 곳인데 식당 테이블이 둥근 유리였거든. 테이블 아래는 반원 모양의 나무통이어서 음식을 먹은 사람들이 그 안에 몇 자 써넣고 간 메모들이 들어 있었는데 혹시나 하고 유리 안을 들여다보니까 우리가 작년에 써넣고 간 메모가 있더라고. 같은 식당 같은 자리였던 거지. 그게 뭐냐고 구경할 데가 얼마나 많은데 똑같 은 데를 똑같은 코스로 두 번씩이나 가냐고 했더니 형은, 난 낯선 곳이 별로야, 했었다. 익숙한 곳, 익숙한 사람들이 좋다고.
어디를 가고 싶었던 걸까.
나도 소주를 들이켜며 물었다. 답을 해줄 사람이 이 자리에 없었다.
예전에 형이랑 E.T. 영화 봤던 거 생각나냐?
성태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호 형이 어딘가로 떠난다면 타고 가 는 건 비행기가 아니라 자전거일지도 몰랐다. 성태도 비슷한 생각을 한 거였다.
형은 E.T.에 자전거가 나온다는 것 하나로 그 영화에 꽂혀 있었다. 우리를 불러내 영화를 보여 준 것도 그 형이었다. 달로 가는 자전거 봤지? 한 편의 서정시 같지 않냐? 형만큼 감동한 것은 아니어도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장면은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E.T.를 보고 나서 정 작 화제가 된 건 자전거보다 무선이었다.
E.T.가 텔레비전에 나온 인간이 전화 통화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사는 별에 무선 교신을 보내 려고 하는 장면이 있었다. E.T.가 포크와 나이프, 둥근 톱니바퀴, 문자가 가능한 전화기 등으로 통신 장비를 만들어 산 위에 올라가 나무 위에 줄로 연결해서 교신을 시도했고, 어쨌든 그렇게 만든 장비로 외계와의 교신에 성공해 E.T.가 다시 자신의 별로 가게 되는 장면이었다. 이게 어떤 식으로 가능하느냐 하는 토론이었다. 그 당시에는 삐삐조차 등장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니 휴 대전화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 화제를 주도적으로 이끈 건 역시 정호 형이었다. 우리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고 그럴 만하다고 여겼다. 우리는 정호 형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고 한때 형을 추종했던 시절까지 있었다.
우리가 살던 동네에 부처산이라는 산이 있었다. 어떻게 붙여진 산 이름인지 몰라도 꽤 높은 봉우리여서 산에 올라가면 동네에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뿐만 아니라 활터고개, 멀리 월미도나 영종도도 보일 정도였다. 그 부처산 꼭대기에 무선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는데 학생들에게 모 스 부호와 진공관 라디오 조립 등을 가르쳤다. 그 당시에는 무선 기술을 익히면 체신부나 정보 기관에 취업하기도 쉽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공장 아니면 부두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인 동네였다.
그 학교 건물 옥상에는 대형 실습용 레이더도 설치되어 있었다. 판잣집이 즐비한 촌 동네 산 꼭대기에 학교가 세워지고 그 건물 옥상에 대형 접시 모양의 레이더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만으 로도 학교가 대단해 보였다. 정호 형이 그 학교에 다녔다. 형은 종종 우리들 앞에 학교 교복을 입고 나타났다. 사관생도 복장과 비슷한, 금장 단추가 달린 검은 코트는 우리들 눈에 학교의 대형 레이더만큼이나 멋있어 보였다. 형은 우리를 모아놓고 땅바닥에 막대기로 必通之信念이라고 한자를 적어놓고 ‘필통지신념, 전파는 반드시 통한다는 신념’을 복창하게 했다. 우리는 목청껏 따 라했다. 형한테 잘 보이면 ‘무선’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었다.
스돈스돈만 할 줄 알면 전 세계 사람들과 교신할 수 있어.
형의 그 말은 필통지신념이라는 말과 더불어 우리의 굳건한 믿음이 되었다. 그 당시 일주일에 한 번씩 주말에 방영하는 미국 드라마 ‘전투(combat)’ 열풍이 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에서 독일군과 싸웠던 미국 병사들의 활약과 전우애를 그린 전쟁 드라마였다. 동네 아이들은 이 ‘전투’를 보고 골목에서 전투를 흉내 냈다. 형은 편을 갈라서 무선 치는 전쟁놀이도 시켰다. 그야 말로 이론에 이은 실전연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이었 다. 형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집에서 몰래 국자를 가지고 나와서 무전기를 대신한 적도 있었다. 형은 그런 내가 기특하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중대장님, 대대장님한테서 급한 무전 이 왔습니다. 나는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 무전병이 되었다.
실제로 나는 글자를 형이 가르쳐준 모스 부호로 변환시켜보기도 했다. 먼 거리에 정확한 통 신문을 전송하려면 전건을 길게 누르거나 짧게 눌러서 신호를 보내는데 이게 우리가 아는 모스 부호였다. 이 신호를 받아서 문자로 풀어 통신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각 문자에 대 응하는 부호를 만들어야 했다. 짧은 신호는 ‘돈’, 긴 신호는 ‘스’였다. A는 약속 신호가 짧게 한 번 길게 한 번이었고 ‘돈스’로 읽었다. B는 긴 신호 한 번 짧은 신호 세 번, 그러니 ‘스 돈돈돈’. 한글 ㄱ은 돈스돈돈 식이었다. 무선 놀이할 때 우리 입에서는 스돈돈돈돈 스돈스 돈돈돈 하면서 ‘돈’ 과 ‘스’가 무한대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일기를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무선 암호로 쓴 적도 있었다. 물론 일기는 몇 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문장이었다. 비밀을 품을 나이였다. 그때 나는 공책에 시 립도서관에서 우연히 보았던 은희 이름도 적어놓았었다. ‘은희야 보고싶다’는 모스부호로 ‘-·- -·· ··-· ·--- -··　··- -·- ·· ·--　·- ·-··　·- --· ··- --- -··· ·’
라고 표시하고 ‘스돈스 스돈돈 돈돈스돈 돈스스스 스돈돈 돈돈스 스돈스 돈돈 돈스스 돈스 돈 스돈돈 돈스 스스돈 돈돈스 스스스 스돈돈돈 돈’이라고 읽는 식이었다. 그렇게 나는 ‘스’와 ‘돈’만 으로 문장을 만들 수 있었다. 외계언어와 다를 바 없었다.
우리에게 무선을 가르쳐주던 형이 정보기관에 취직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몇 년 지나 그 일을 그만두었다. 우리도 그때쯤에는 전쟁놀이가 시시해 더 이상 하지 않을 때였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여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