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내 사명… 월드컵 우승의 초석이 됐으면… - 차범근 감독과의 만남
눈부처를 바라보며 화쟁의 길을 묻다 - 원효대사와의 가상 인터뷰
특집을 기획하며｜B급, 非급, 秘급 ①B라는 말로 우리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들 ②비(秘)급을 향해, 그저 온전한 의지로서 ③비급 작가로 살기 ④도서출판 b, b급 맞습니까?
앙스트블뤼테(Angstblüte)와 말년의 양식(Late Style)
무화되는 품위, 최선을 다하는 삶과 역사 - 2017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 『남아 있는 나날』
고전 산문의 마지막 불꽃 - 조선 한문학의 마지막 대가 정인보의 『담원문록』
“사랑, 추억 그리고 비애에 대한 거장다운 통찰” - 아일랜드의 맨부커상 수상작가 존 밴빌과의 만남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 튀어오르는 몸 그 샘솟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①강남 스타일,백 년 동안 새로운 노년 ②눈 내리는 거리,묘지 식탁
첫번째｜시인의 나무 세번째｜술과 글 두번째｜'문학'하는 요괴를 바라보며 네번째｜문학이 죽으면 성실해지겠죠
①자신의 세계, 건강함 그리고 작가의식 ② 우리의 우리에게… 점과 점을, 잇는 선, 으로 이루어진, 육면체.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몇 개나 되는, 서로 다른, 세계. 그리고, 빛에 대해
이 방에 어떤 생이 다녀갔다 - 소설집 『이 방에 어떤 생이 다녀갔다』
‘소년이 온다’에서 ‘인간의 작품’으로 - 독역 한강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리뷰
번역의 출발선과 마침표에 대하여 -영역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일출과 일몰처럼
글·사진 최민석 ㅣ 소설가. 1977년생 장편소설 『능력자』 『풍의 역사』 『쿨한 여자』, 소설집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 에세이 『꽈배기의 맛』 『꽈배기의 멋』 『베를린 일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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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 쓰는 공간 - 커피 발전소
나는 무언가 하나를 정하면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예컨대, 한 번 기쁘게 마신 커피가 있으면 줄곧 그 커피만 마시고, 마음에 드는 외투가 있으면 계절 내내 그것만 걸친다. 사실, 해가 바뀌고 그 계절이 돌아오면 그 코트를 또 입으니, 옷이 해지지만 않는다면 십 년 정도는 같은 것만 고집하는 셈이다. 커피 역시 몇 년째 따뜻한 만델링을 마시고 있고, 마찬가지 이유로 몇 년 째 글 역시 같은 장소에서 쓰고 있다.
바로 합정동 당인리 화력발전소 앞에 있는 ‘커피 발전소’인데, 이곳에서 2010년 초부터 글을 써왔다. 햇수로는 9년째이다. 내 등단작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도, 첫 장편소설 『능력자』도, 등단하기 전에 출간한 『너의 눈에서 희망을 본다』도 이곳에서 썼다. 사실, 이곳에서 쓰지 않은 글이 없을 정도다. 10권 정도의 책 중 딱 한 권 『베를린 일기』만이 말 그대로 베를린에서 썼는데, 이 책의 퇴고 역시 ‘커피 발전소’에서 했다. 그러니, 내게 ‘커피 발전소’를 거치지 않은 원고는 없는 셈이다. 사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원고 역시 손님이 아무도 없는 오전의 ‘커피 발전소’에서 묵묵히 쓰고 있다.
왜 이리도 ‘커피 발전소’에서 글쓰기를 고집하고 있느냐면 우선, 조용하기 때문이다. 가게는 오전 열 시에 문을 여는데, 그 시간에 오면 주인장 홀로 앉아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다. 그럼 나는 간단하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9년째 앉아온 자리에 앉아 내 노트북과 책상을 닦는다. 아침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는 책상과 노트북을 보고 있노라면, 비로소 ‘자, 이제 진짜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하는 기분이 든다. 그렇기에 9년째 이 일상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 손님이 없는 한적한 커피숍에 주로 흐르는 것은 클래식 음악과 내 손가락이 내는 타자(打字) 소리. 여기에 더해지는 게 있다면, 주인장이 커피콩을 볶을 때마다 생기는 향과 연기 정도다. 로스터 기계가 뿜어내는 연기가 반쯤 열어놓은 창밖으로 꾸준히 빠지는 풍경은 마치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성실히 달려가는 증기기관차 같다. 이렇게 꾸준히 주인장은 콩을 볶고, 나는 타자를 하고, 서로 휴식을 할 때는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으며 매일의 일상을 유지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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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말하지만, 사실 이 커피숍에 눈독을 들인 이유가 있다. 때는 2009년 말, 나는 여차여차한 개인 사정으로 본가에서 독립을 하게 됐다. 당시 직장인이었던 나는 회사가 있는 여의도에서 가깝고, 혼자 작업도 할 수 있는 거주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다 당인리 발전소 길에 다다랐는데, 가로수가 길 양쪽으로 나란히 우거져있고 인적은 없어 고즈넉하기에 ‘야, 이곳에 살면 퇴근해서도 글을 쓸 수 있겠다’ 싶었다. 마침 한 공간이 빈 채로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데 그곳은 주거지가 아니라 사무 공간이었다. 나는 2주 정도 혼자서, 사무 공간의 절반을 주거 공간으로 개조하여 사는 계획을 짜며 고민했다. 마침내 ‘그래. 까짓것, 어떻게든 해보는 거야’라며 결심하고 그곳을 찾아가니, 누군가 실내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현재의 ‘커피 발전소’ 주인장이다. 이 이야기를 나중에, 그러니까 한 5년 뒤에 털어놓으니, 주인장은 ‘어차피 매일 이곳에 와서 글을 쓰고, 때로는 잠만 집에서 잘 정도니 사실상 사는 거 아닙니까?’라고 했다. 따지고 보니, 집과 작업 장소가 분리되어 내게는 더 좋은 결과가 빚어진 셈이다. ‘커피 발전소’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매일 쓰는 작가’가 되지 못 했을 것이다. 주인장이 나를 매일 환대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봇짐장수처럼 노트북을 등에 이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눈치껏 글을 쓰는 떠돌이 글쟁이가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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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9년 전 오직 햇볕과 매화만 가득하고, 간간이 마을버스 한 대가 지나가던 이 거리의 풍경은 이제 완전히 바뀌었다. 몇 걸음 지날 때마다, 커피숍과 식당과 옷집과 술집이 보인다. 그 사이 기억도 못할 가게들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변하지 않은 건 ‘커피 발전소’와 사장님과 나뿐이다. 단골들도 떠나갔고, 시끌벅적하게 개업식을 치른 꽤 많은 가게들도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내년이면 ‘커피 발전소’ 개업 십 주년이고, 내가 이곳에서 작업한 지도 십 년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한다면, 부디 그때까지 만이라도 이 소중한 작업 공간이 잘 버텨줬으면 좋겠다.
2. 달리는 공간 - 한강변
이렇게 쓰다 보니 결국은 내 일상에 대해 말하는 꼴이 돼버렸는데, ‘커피 발전소’에서 오전 작업을 마치면 (대개 오후 두세 시 경) 달리기를 하러 간다. 날씨가 좋으면 한강변을 달리고, 비가 오거나 혹한이거나 미세먼지가 심하면 체육관으로 간다. 한강에서 달릴 때는 대개 집 앞의 망원정 사거리부터 난지 기점까지 왕복해서 달린다. 봄에는 벚꽃을, 여름에는 데이트 중인 커플을, 가을에는 키 높이까지 자란 억새를, 겨울에는 좀처럼 녹지 않는 하얀 눈을 배경 삼아 달린다. 이 구간 역시 합정동에 이사 온 뒤 꾸준히 달리고 있으니, 9년째 반복하고 있는 코스다. 그전에는 이쪽과는 반대인 용산 쪽으로 달리기도 했으나, 결국은 억새와 흙길이 있는 이 구간을 택했다. 사실 ‘커피 발전소’로 출근하고 퇴근하는 길 역시 한강의 흙길을 이용하고 있으니, 혹한기를 제외하고는 이 길 역시 내 하루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며칠만 더 다니면 십 년이 되니, 조금 과장하자면 내 삶의 일부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강을 꾸준히 달리다 보면 느껴지는 게 있다. 그건 바로 인간은 매우 미미한 존재라는 것이다. 매일 뜨거운 태양 아래 땀 흘리고,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달을 마주 보며 달리고, 쏟아지는 비와 눈을 피해 다니다 보면, 어쩐지 ‘날씨에 의존적인 어부’ 같은 생활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이 허락하는 환경에 따라 생활의 절반 이상이 바뀌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전의 따뜻한 곳에서 작업을 하고, 오후의 자연환경 속에서 달리는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좀처럼 교만해지기 어렵다. 그래도 겸손을 잃는 게 인간의 본성이겠지만. 어쨌든, 이 때문에 몸의 건강뿐 아니라, 정신의 건강도 강제로 유지되고 있다.
3. 휴식하는 공간 - 펍 ‘사이’
술은 간혹 마신다. 과거엔 거의 매일 한두 잔쯤의 맥주를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40대가 된 후로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간혹 시원하게 목을 축이고 싶거나, 은은한 조명 아래서 책을 읽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집 맞은편에 있는 펍 ‘사이’로 간다. 무슨 연유인지 미대 출신의 주인장이 맥주에 빠져버려, 이런저런 맥주와 와인, ‘하몽’까지 구비한 동네 펍이다. 개업 초기에는 야심 차게 벨기에 트라피스트 맥주(수도원 맥주)부터, 영국 ESB, 하와이 맥주까지 종류별로 구비해놓았으나, 지금은 단출하게 ‘플래티넘 IPA’와 ‘산 미구엘’ 두 종류의 생맥주로 간추렸다. 나는 애초부터 ‘플래티넘’ 생맥주만 마셨으므로, 이곳에 갈 때면 대개 혼자서 스탠드 등을 켜고 장편 소설을 한두 챕터 읽다 돌아온다. 평일 저녁에 가면 이곳 역시 주인장과 나뿐인 애매한 공기가 흐르곤 했는데, 여기에 둘 다 익숙해져서 이젠 서로 개의치 않는다. 기본 안주로 주는 소금기 밴 서양과자 몇 점에 IPA 생맥주 두 잔을 마시는 걸로, 혼자만의 휴식은 끝이 난다.
내 일상은 이렇듯 글쓰기와 운동, 이따금 하는 맥주 한두 잔이 전부다. 그 외에는 모두 가정생활이다. 써놓고 보니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다. 마치 해가 떠오르고, 해가 지는 듯한 반복적인 일상이다. 하지만 해가 뜨고 해가 져야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듯, 이렇게 일출과 일몰처럼 반복적인 일상이 가능할 때 내 안의 모든 창작 세포들이 살아갈 수 있음을 나는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렇기에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이 일상을 앞으로도 별일이 없다면, 유지할 요량이다. 해가 피곤하다 해서 갑자기 내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